31화. 당문 (4)
삼화취정에 오른 자만이 격공권을 쓸 수 있다.
그것은 강호 무림이 존재한 이래, 심지어 그 경지에 도달한 고수들마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상식이었다.
여기, 그 상식을 깨부순 자가 있었다.
투하악!
강엽이 내지르는 일권이 허공을 격해서 멀리 떨어진 상대를 친다.
똑같이 격공으로 그 일수를 받아친 당우경은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놀랍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 모든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
경이감.
“삼화취정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 자신이 삼화취정에 올랐기에 알 수 있었다.
강엽은 삼화취정에 오르지 못했다.
그 경지를 목전에 둔 것은 틀림없지만, 목전에 둔 것과 실제로 밟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
‘백보 양보해서 강기라면 어떻게든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격공은....’
강엽 정도의 고수가 후유증을 각오하고 억지로 단전을 쥐어짜낸다면 강기 비슷한 것을 만들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격공의 경지는 달랐다.
기를 다루는 감각이 고차원적인 경지에 오르지 못한 자들은 흉내내지도 못할 고절한 기예.
단순히 발경한 경파를 쏘아보내는 것이 아니다. 적과 자신의 사이에 놓인 거리를 무시하고, 적의 면전에 바로 일격을 꽂아버리는 수법.
‘아직 어설프고, 제한도 많지만... 분명히 격공권이다.’
강엽의 격공권은 완성되지 않았다.
하나 삼화취정에 오르지 못한 자가 자신의 의념으로 일대 공간을 장악하고 진기를 투사하는 것만으로도 뭇 고수들이 경악할 사건이었다.
‘이건 그 하후진이라는 청년이 한 것보다 몇 수는 고단수인데...?’
과거 하후진이 혈교의 교령과 싸웠을 당시, 당우경은 바깥으로 뿜은 외기마저 제 손발처럼 다루는 하후진의 솜씨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강엽이 보여준 격공권은 몇 수나 앞선 기예.
일대 공간을 장악하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직접 투사하는 식으로 당우경을 압박하고 있었다.
“격공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격공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당우경은 문득 성긴 거미줄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강엽이 투사한 격공의 일격이 거미줄의 실을 타고 자신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온다.
그 일격이 터지기 전에 당우경 역시 같은 수법으로 되받아쳤다.
“격공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봅시다.”
당우경의 기파가 확장되면서 강엽의 의념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자신의 색채로 물들였다.
강엽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역시 봐주고 있었군.’
운 좋게 격공을 터득했다 한들 그들 사이의 격차는 아득했다.
당우경이 진심으로 나온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실전이었다면 재생력에 의존해서 어떻게든 버텼겠지만, 이건 사람들이 지켜보는 비무였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재생력을 쓸 수는 없으니, 이 싸움은 어디까지나 강엽 자신의 기량만으로 당우경의 압박을 벗겨내야 하리라.
‘온다.’
느껴진다.
당우경의 격공이 의념의 간합을 뚫고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는 것을.
허공에 일권을 뻗었는데 실제로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의 손마냥 수많은 권격을 날려온다.
보신경을 놀릴 수 없도록 육합을 틀어막고 쏟아지는 격공의 소나기.
소리보다 빠른 권격이 강엽의 전신을 두들겼다.
꽈아아아아아......!
뒤늦게 메아리치는 굉음이 연무장을 휩쓸고 지나간다.
지켜보던 관중들은 솟아오르는 흙먼지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드러난 광경에 망연해졌다.
“격공도 모자라서 이젠 호신강기인가?”
강엽을 감싸고 있는 불그스름한 둥근 막.
자신의 격공이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는 것을 파악한 당우경은 침중하게 수염을 쓸었다.
“...혹시 격공을 이전에도 많이 겪어봤소?”
강엽이 격공을 터득했다 한들 이토록 수월하게 대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당우경 역시 막 격공을 터득했을 당시부터 다른 사람과 공방을 주고받을 정도로 능숙하진 않았다. 그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몇 번쯤 있었습니다. 일단 단혼마백과 싸우면서 처음으로 격공을 겪었고....”
지금 생각해도 단혼마백과의 싸움은 오싹했다.
재생력이 아니었다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금방 당했으리라.
“그다음은 낭왕에게 배웠습니다.”
“배웠다고 했소?”
“정확히는 몸으로 때웠지요.”
낭왕은 단혼마백 이상으로 격공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는 절대고수.
두 달간 가르침을 받으면서 격공에 처맞고, 처맞고, 무한히 처맞는 경험을 얼마나 했던가?
당시엔 어떻게든 격공을 피하거나 막겠다면서 이를 갈았는데, 어느 순간 격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의념으로 공간을 장악하고, 격산타우의 수법과 의기상인의 수법을 기반으로 적을 타격한다.’
격산타우도, 의기상인도 진작부터 깨달은 기예.
격공은 두 기예를 기반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감각이 고차원적인 영역에 접어들어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광명마교의 십이위를 잡고 놈의 피를 마셔서 육룡환의 경지에 올랐을 때.
강엽은 자신이 격공을 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삼화취정에 오르진 않았지만, 진조의 초월적인 영성과 감각이 불가능을 가능케 만든 것이다.
‘뭐, 완벽하진 않지만.’
일단 거리가 일 장밖에 되지 않고, 위력도 전력으로 내지른 발경 권파보다 약하며, 허공에 주먹을 뻗는 등의 동작이 수반되어야 했다.
삼화취정의 고수라면 사전에 격공이 이루어지는 징조를 감지하고 대응할 수 있다.
굳이 당우경에게 비무를 청한 것은 자신의 격공이 얼마나 통하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만약 당우경이 거절했다면 전강에게 부탁했으리라.
“아무래도 강 무사는 삼화취정의 고수를 상대로 격공을 비장의 한 수를 생각하는 모양이구려.”
“맞습니다.”
“흐음.”
당우경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실전에서 쓰려면 조금 더 갈고 닦아야 할 것 같소. 위력과 거리, 시전 속도... 모든 게 조금씩 떨어지는 듯하오.”
“알고 있습니다.”
“며칠 만에 가능한 일이 아닌데....”
“불가능해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기껏 날카로운 무기를 쥐었는데 당장 잘 쓰지 못한다고 내버려두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시간은 별로 없겠지만 내 최대한 요령을 전수해주겠소.”
“감사합니다.”
강엽이 두 손을 잡고 진심을 다해 공수의 예를 취했다.
‘이것까지 부탁할 생각은 없었는데... 운이 좋군.’
물론 당우경이 단순한 호의로만 이런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강엽에게 은혜를 입혀두면 훗날 몇 배로 되돌려받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겠지.
“아, 그전에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사실 당문에 온 게 혈라분 때문만은 아닙니다. 당문의 장인들에게 맡기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장인들에게 말이오?”
“예, 제가 가져온 방패를 기억하십니까?”
“아, 그것 말이군. 이전에 만났을 땐 못 봤던 물건이라 뭔가 했었소.”
“실은 광명마교의 보물입니다.”
“무어라!”
멀찍이 떨어져 있던 당문의 원로들에게도 강엽의 말은 똑똑이 들렸다. 광명마교의 보물이라는 말에 다들 눈이 튀어나올 듯이 펄쩍 뛰었다.
당우경도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광명마교라니... 그들과 싸운 거요?”
“일전에 낭왕을 뵈러 갔을 때 마찰이 있었습니다.”
강엽은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는 않았다. 너무 자세히 말한다면 낭왕이 황산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까지 말해야 할 테니까.
“방패가 요상한 효과를 지녔는데, 살펴보니 안에 정교한 기관이 있더군요. 그래서 당문의 장인들이 실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맡겨보고 싶었습니다.”
이어서 십이위와 싸웠을 때 겪은 방패의 공능을 설명하자 당문 무인들이 술렁였다.
그때 반백의 초로인이 원로들 사이에서 뛰쳐나왔다.
“그 광명마교의 방패는 어디 있나! 내 즉시 장인들과 함께 살펴보겠네!”
원로원주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보게, 당표 아우. 이게 무슨 짓인가? 원로라는 사람이 체신머리없이...!”
“에잇, 형님은 좀 빠지시오! 이 아우는 평생 철과 불을 벗 삼은 몸! 저런 보물이 가문에 굴러들어왔는데 어찌 안 보고 배기겠소?”
“하나 마교의 물건이란 말일세.”
“아,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뭣이?”
“이보게, 귀영이라고 했나? 그 방패는 어디 있나? 내 즉시 방패를 뜯어봐야겠네!”
“활명원에 두고 나왔습니다만....”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장인의 기세.
천하의 흡혈귀도 저도 모르게 주춤거릴 만큼 늙은 장인의 눈은 미지에 대한 광기로 불타고 있었다.
“아, 근데 그 방패 자네가 쓸 건가?”
“전 방패의 공능만 알면 됩니다.”
어떻게 타격 순간 적의 진기를 흩어버릴 수 있었는지.
그걸 규명하기 위해서 방패를 당문까지 가져온 것이었다.
“그렇구만. 그럼 자네가 본문을 떠나도 그 방패를 뜯어볼 수 있다는 뜻이렷다?”
“예, 그야 뭐....”
“허허, 자네 참 좋은 젊은이구먼! 이제 와서 말하기도 좀 뭣하지만 당문에 온 걸 환영하네.”
강엽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몇 번이나 호의를 표시한 노인은 경공까지 쓰면서 방패가 있는 활명원을 향해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폭풍처럼 사라진 뒷모습에 원로원주가 혀를 찼다.
“쯧쯧,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친구가 삼척동자처럼 좋아하는 꼴이라니....”
“껄껄, 원로원주께서도 마교의 독이 눈앞에 있으면 관심을 보이시지 않겠습니까?”
“노부를 저런 종자와 똑같이 취급하지 말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강엽에게 은근슬쩍 눈빛을 보내는 것이 마치 마교의 독은 없냐고 묻는 것 같았다.
강엽이 시선을 피하자 입맛을 다시면서 애써 낯빛을 다스리는 원로원주였다.
* * *
사람이 살지 않는 깊숙한 오지.
기련산맥의 깊숙한 곳에 마련된 일월신교의 비밀 분타는 때 아닌 수난을 겪고 있었다.
본래 그들의 역할은 일월신교에 투신할 의향을 밝힌 사마외도의 마인들이 잠시 머무르는 동안 안전한 거처와 따뜻한 끼니를 제공하는 것.
또한 비단길을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중원의 정세를 수집하고 교단의 총단에 보고하는 게 전부였다.
그들이 믿는 일월성신(日月星辰)께 맹세코 세인들의 눈에 띌 만큼 사악한 짓거리를 벌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운명은 실로 잔혹해서, 나름 은인자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해와 맞닥뜨렸다.
화르르륵......!
“쿨럭! 크헉! 크읍!”
비밀 분타를 이끄는 분타주는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하면서 저편에서 걸어오는 사내를 노려봤다.
그가 걸어오는 보보마다 푸른 불길이 일고, 숲과 땅이 불타서 새카만 잿가루만 흩날린다.
사람의 형상으로 뭉뚱그려놓은 듯한 자연재해.
이제 막 이립이 되었을 법한 수려한 용모의 사내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장발을 나부끼며 걸어온다.
심연 같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분타주가 짓씹듯 분노를 토해냈다.
“당신이 왜...!”
“으음?”
사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아나?”
“...본교의 요주인물이니까.”
“그렇군.”
“왜 우리를 공격한 거냐? 당신과 본교는 요즘 별다른 마찰도 없었을 텐데...!”
“별 건 아니다. 돈이 필요해서.”
“뭐, 뭐라고?”
“마침 돈이 필요한 일이 생겼는데 모아둔 돈이 다 떨어졌다. 해서 너희에게 온 것이다. 일월신교의 비밀 분타쯤 되면 모아둔 돈도 꽤 되겠지.”
“이런 미친, 고작 돈 때문에... 쿨럭!”
솟구치는 혈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선지피를 울컥 토했다.
‘돈이 없으니 일월신교의 주머니를 털겠다는 발상을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삼마교라 불리는 일월신교에서도 대적불가로 여겨지는 흉신악살이었다.
곤륜과 화산, 종남, 공동. 일월신교를 견제하는 네 개의 구파보다도 위험시되는 괴물.
“...염왕(閻王).”
오십 년 전에 천하팔존에 오른 절대고수이자 흑룡교주의 목숨을 거둬간 사내.
“네 목숨은 거둬가지 않으마. 대신 윗대가리들에게 전하도록.”
“염왕이 강도질을 했다고 말이냐?”
“아니.”
“...?”
“중원에 기어나올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천산 산기슭에 처박혀 있으라고. 그게 네놈들 목숨을 보전하는 가장 안전한 길이 될 것이다.”
“하, 하하....”
오만하다.
삼마교 중 하나를 상대로 이런 협박을 할 줄 아는 이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나.
염왕이기에, 왕년의 흑룡교주를 죽였기에, 그때보다 더 강해졌기에 할 수 있는 선언.
“천하로... 나갈 생각이냐?”
“그렇다.”
“오래전에 은거한 자가 이제 와서?”
“착각하지 마라. 금분세수(金盆洗手)를 하진 않았다.”
전대 천하팔존인 염왕.
그가 강호 재출도를 선언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