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당문 (3)
당묘정이 조목조목 자신이 가야 하는 이유를 들며 고집을 부리자 당우경은 답답해했다.
권위로 찍어누를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애당초 당우경은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뭣보다 그 역시 무가의 사람이었다.
-무인은 고난 없이 성장할 수 없다. 온실 속의 화초가 되느니 비바람을 맞는 들꽃이 되어라.
당문의 무공 교두가 어린 제자들에게 늘상 하는 말이다. 당우경 역시 어린 시절에 전대 문주인 부친으로부터 무수히 들었던 격언.
감정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이성은 당묘정의 말이 타당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제 목숨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아요. 하지만 숙부님.”
숙부이자 사부인 당우경 앞에서도 당묘정은 당당하게 각오를 내비쳤다.
“본문의 식구들이 죽고 다친 때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소문주라고 할 수 있을까요?”
“....”
당우경은 내심 침음했다. 반대 입장이었다면 자신 또한 당묘정처럼 말했을 것임을 안다.
결국 그는 강엽에게 공을 돌렸다.
“강 무사.”
“예, 원주님.”
“이 아이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시오?”
그러자 당묘정과 능정각의 눈길도 강엽을 향했다.
강엽은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는 당묘정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당 소저의 능력을 의심하진 않지만, 전 삼화취정의 고수와 맞닥뜨릴 걸 상정하고 있습니다.”
“...!”
“교령이 나왔으니 이번 일의 배후엔 최소 교성이 있을 겁니다. 운이 없으면....”
“교왕이 있을 수도 있겠지.”
팔대교왕.
흑룡교의 구천호법, 광명마교의 구대사도와 동격으로 여겨지는 절세고수들이었다.
지금으로선 대적할 수 없는 강자.
만약 팔대교왕이 현신한다면 살아남는 것도 불가능했다.
“강 무사의 얘길 들었겠지. 이런데도 갈 셈이냐?”
“...예.”
일순 흐려졌던 당묘정의 안색에 다시 결기가 어린다.
당우경의 입술을 비집고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누굴 닮아 이리 옹고집인지 원.”
“아마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까요?”
“글쎄... 내 생각엔 형님보단 돌아가신 형수님을 닮은 것 같구나.”
당묘정의 모친은 공정하고 어진 성품 덕분에 뭇 세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충격과 몇 번의 유산으로 몸이 쇠약해져서, 간신히 당묘정을 낳았을 때는 결국 산욕열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형수님도 널 닮아서 고집이 무척이나 세셨지.”
“....”
“조건이 있다.”
당묘정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쳐지나갔다.
“강 무사에게 허락을 받거라.”
“강 무사님께요?”
강엽에게도 의외의 말이었다.
“네가 강 무사와 대련을 해서 인정받는다면, 나 또한 이번 일에 왈가왈부하지 않으마.”
당우경은 이어서 강엽에게도 말했다.
“강 무사의 생각은 어떠시오?”
“나쁘지 않군요.”
당묘정의 축기량은 이미 초음으로 살펴봤다.
대가문의 후기지수답게 젊은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지만....
‘중단전을 열지는 못했어.’
하지만 실전에선 내공의 고하만으로 승부가 갈리지 않는다. 독과 암기를 다룬다면 일반적인 무인들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독공이라....’
수많은 강자들과 싸웠지만 독공을 익힌 자는 본 적이 없었다.
과거 흑접에 독공의 고수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만나지도 못했던 바.
이 기회에 독과 암기의 대종사인 사천당문의 절기를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당 소저와 싸운 뒤에 원주님께 가르침을 받았으면 합니다.”
“음?”
“지금의 제가 삼화취정의 고수에게 얼마나 통할지 궁금하거든요.”
이긴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혼마백과 혈전을 치르고, 낭왕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삼화취정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겪었으니까.
하지만 당우경은 그들과는 또다른 느낌일 터.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삼화취정의 초고수를 상대로 자신의 기량이 얼마나 통할지 시험해볼 요량이었다.
세 사람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당우경은 수염을 쓸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 * *
당묘정과의 승부는 싱겁게 끝났다.
처음엔 암신을 써서 그녀의 뒤를 잡았다.
“이걸로 소저가 졌소.”
“...다시 해요.”
아무것도 못해보고 패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당묘정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강엽은 그녀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번엔 선공을 양보했다.
‘채찍을 쓰는군.’
독과 암기에 가려지긴 했지만 당문의 편법 역시 무림 일절로 알려졌다.
“잘릴 수도 있는데 괜찮소?”
“교룡의 거죽을 꼬아서 만든 흑편(黑鞭)이에요. 어지간한 경파는 능히 버틸 수 있어요.”
“그렇다면야.”
그렇게 두 번째 대련이 시작됐다.
선공을 양보받은 만큼 당묘정은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쏘아지는가 하면, 몇 번이나 방향 꺾으며 회오리처럼 내달리는 흑편의 궤적.
강엽이 시험 삼아 격발한 장력은 흑편의 경력을 뚫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졌다.
“하압!”
입가를 타고 울려 퍼지는 낭랑한 기합.
쏟아지는 한기를 좌우로 갈라버린 채찍이 그 아래 있는 강엽의 정수리를 노리고 쇄도했다.
강엽은 피하지 않았다.
쩌어어엉!
한껏 구부린 용조(龍爪)와 채찍이 충돌하면서 묵직한 반탄력이 서로를 밀어냈다.
‘당황하지 않는군.’
회심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당묘정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녀가 당문 비전의 보법으로 거리를 좁히면서 흑편을 휘돌렸다.
그때부터 진정한 절초가 펼쳐졌다.
파파파파파팟!
쉴 새 없이 몰아치며 강엽의 운신 범위를 쪼그라뜨리는 편격.
변초와 허초가 뒤섞인 편법은 방향과 궤적뿐만 아니라 위력까지 속이며 감각을 희롱했다.
강엽이 권격에 경파를 실어 요격했음에도 그 반탄력을 양분으로 삼아 새로운 초식을 구사한다.
“주의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제부터 독을 쓸 거니까.”
사전에 독공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기에 당묘정은 독을 쓰는 것을 거리끼지 않았다.
한쪽에서 관전하고 있던 당우경이 옆에 있는 능정각에게 경고했다.
“능 무사, 물러서는 게 좋겠소. 거리가 가까우면 본인도 모르게 독을 흡입할 수 있소.”
“제가 주의해야 할 정도입니까?”
“평상시라면 괜찮겠지만 지금은 내상을 입지 않았소? 죽진 않아도 곤란해질 수 있소이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물러나자 당묘정이 손톱으로 요대에 찬 가죽 주머니를 북 찢었다.
바람을 타고 흑편에 묻는 황색 가루.
그 흑편이 다시금 천변무쌍하게 궤적을 틀면서 삭풍을 일으키자 강엽에게도 독분이 날아왔다.
“황풍사(黃風沙)라는 독이에요. 들이마시면 재채기랑 콧물 좀 하실 거예요.”
그녀가 쓴 독은 사람의 목숨을 앗는 극독이 아니다.
다만 호흡기에 침투하면 꽃가루에 민감한 사람처럼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며 맥을 추지 못했다.
강엽이 물었다.
“이럼 소저도 영향을 받지 않소?”
“전 내성이 있거든요.”
흑편이 일으키는 강풍에 따라 독분은 강엽에게 집중되었다.
당문의 편법은 그 자체로도 일절이지만, 이처럼 독과 함께 쓰면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
“호흡은 무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 숨을 들이쉴 때마다 황풍사가 강 무사님을 괴롭힐 거예요.”
영원히 숨을 참을 순 없다. 한 호흡으로 수십 번의 공방을 겨룰 수 있는 고수라도 그렇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입을 다물고 수양명대장경의 영향혈(迎香穴)에 공력을 집중한다. 콧구멍을 틀어막고 전사경의 묘리로 회전시켜 독분을 걸러냈다.
[선공은 끝났소.]
전음을 들은 당묘정은 강엽에게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독분 때문에 호흡에 약간 지장이 있었지만, 강엽은 한 호흡만으로 편격의 간합을 깨트리고 면전에 치달았다.
그 순간, 당묘정은 주저없이 흑편의 손잡이를 놓고 쌍장을 내밀었다.
‘독장(毒掌)!’
편법이 파훼될 경우를 대비한 수법이었다.
황풍사보다 몇 배로 강력한 독장은 적중할 시 독기가 암경처럼 파고들어 오장육부를 파괴한다.
강엽은 몸밖에 두른 호신기가 살짝 타는 것을 알고 힘으로 밀고 들어갈 생각을 버렸다.
호신기가 녹는 것을 뻔히 아는데 독장을 맞아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강엽이 종아리에 힘을 주면서 신형을 뒤집을 조짐을 보이자 당묘정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처음부터 강엽이 이렇게 나올지 알았다는 듯이.
‘철질려(鐵蒺藜)를 깔아뒀군.’
마름을 본따서 만든 철질려는 주로 기마대를 막기 위해 바닥에 깔아두는 암기였다.
날카로운 끝부분이 가죽신조차 능히 뚫어버리기에 무림 고수라도 호신기를 두르지 않으면 위험했다.
강엽이 반드시 자신에게 접근할 거라 예상하고 사전에 철질려를 깔아둔 꼼꼼함.
그 사이 독기를 두른 쌍장이 강엽의 가슴팍을 두들기기 직전까지 와 있었다.
졸지에 한 방 얻어맞을 위기.
하나 그녀의 독장은 강엽을 건드리지 못하고 허무하게 허공을 꿰뚫는 데 그쳤다.
“또 같은 수를...!”
강엽이 암신으로 그녀를 속여넘겼다는 것을 깨달은 당묘정은 몸을 뒤집으며 장력을 출수했다.
첫 번째 대련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강엽이 배후에서 기습할 거라 예상했기 때문.
“윽!”
하나 가벼운 일격이 그녀의 완맥을 잡고 들어올리는 바람에 독장은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꺾었다. 독장을 맞은 판석이 부서지며 매캐한 냄새를 피워올린다.
졸지에 완맥을 제압당한 당묘정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엽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제가 졌어요.”
“합격이오.”
“예?”
“내 생각을 읽고 역습을 했으니까. 솔직히 철질려를 깐 건 보지도 못했소.”
“그래봤자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했는데요.”
당묘정이 입술을 삐죽였다. 어떻게든 한 방 먹일 생각이었는데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강엽이 피식 웃으며 손목을 놔주었다.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이고.”
순식간에 결판이 나긴 했지만 당묘정의 무공은 강엽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무공이겠지.’
사실 황풍사만 해도 웬만한 고수들이 아니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독분을 거를 만큼 공력을 세심하게 조절해야 하는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묘정이 손목을 주무르며 투덜거렸다.
“제가 강 무사님께 한 방 먹이려는 게 과한 욕심이면, 강 무사님이 숙부님을 상대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삼화취정의 고수는 별격의 존재예요.”
“그럴지도.”
강엽도 부정하진 않았다.
두 사람의 대련이 끝나자 당우경이 박수를 치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잘 봤소. 나도 정아가 잘 싸웠다고 생각했는데 강 무사에게는 아예 통하지 않는구려.”
그가 강엽과 삼 장 앞의 거리까지 오자 당묘정이 강엽을 힐끗 돌아보며 분분이 물러났다.
“조심하세요. 숙부님은 싸움을 즐기시지 않지만, 호락호락한 분도 아니세요.”
삼화취정의 고수가 호락호락할 리가 있나.
강엽은 작게 고개만 끄덕이며 당우경의 앞에 섰다.
‘탐색전을 할 필요는 없겠지.’
기이이이잉-!
중단전을 감싼 여섯 개의 용환이 고속으로 회전, 하단전과 공명하여 일대의 공간을 장악한다.
멀리서 그 기파를 가늠한 능정각은 식은땀이 등줄기를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음, 이거 장난이 아닌데....”
강엽이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신무검 우문극이 패했다고 자신도 진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강엽이 본격적으로 공력을 끌어올리자 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장삼 소맷자락을 걷어붙인 당우경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하며 손을 까딱였다.
“오시오.”
* * *
쿠우우우우웅...!
난데없는 굉음이 장원을 흔들자 당문 무인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소리랍니까?”
“연무장에서 들리는 소리 같은데...?”
당문의 심처에 기거하는 원로들과 중진들도 소란을 들었다. 외곽의 연무장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멀었지만, 탁월한 기감으로 누군가 부딪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만약 적들이 쳐들어왔다면 당가타에서 경종을 울렸을 테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각자 침소에 들거나 수련을 하던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연무장으로 뛰어갔다.
곧 그들의 안면 가득 놀라운 감정이 떠올랐다.
콰아아아앙!
섬광이 질주하고 일진광풍이 휘몰아치는 싸움.
사방팔방에서 충격파가 내달리며 연무장의 판석을 깨부수고 그들이 있는 곳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일장을 뻗어 경파를 해소한 원로원주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경고했다.
“의기상인(意氣傷人)의 경지다. 하수들은 경파가 미치는 곳에서 십 장 이상 떨어져라!”
의념으로 사람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경지.
경파의 위력을 떠나서 하수들은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 피를 토하는 내상을 입을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자들이 한밤 중에 드잡이질을 하고 있단 말인가?”
“활명원주입니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그 손가락의 끝에 걸린 곳으로 시선을 옮긴 당문의 원로들은, 당우경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그의 옷이 삭풍을 맞은 것처럼 헤졌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들이 반사적으로 장내에 뛰어들려는 때, 당묘정이 그들을 제지했다.
“끼어드시면 안 돼요. 이건 비무입니다!”
“소문주, 그게 무슨 뜻인가?”
숙조부인 원로원주의 물음에 당묘정이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하면서 사정을 설명했다.
“낭인전의 금패인 귀영 강엽 공자님과 숙부님께서 겨루고 계세요.”
“귀영이라고?”
원로들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단혼마백을 죽였다고 소문이 가문의 심처에 기거하는 그들의 귀에도 들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소문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설령 소문대로 귀영이 단혼마백을 척살했어도 공정한 싸움은 아니었을 거라 추측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투아아앙!
“...이보게들. 노부가 제대로 본 것 맞나?”
“제 눈도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원주님.”
강엽이 주먹을 뻗자 일 장 밖에 있던 당우경의 몸이 들썩였다.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가문의 원로들은 당우경의 몸을 친 수법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건... 격공권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