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73화 (173/450)
  • 31화. 당문 (2)

    산이 굽이치듯 용사비등한 필체로 사천당문이라 적힌 현판.

    당가타의 오르막길을 지나서 구중궁궐 같은 대장원을 앞둔 강엽은 엄청난 규모에 혀를 내둘렀다.

    과연 팔대세가의 일익답다고 해야 할까.

    ‘고수들도 득실거리겠지.’

    기감으로 이 안에 많은 기척들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초음을 써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만두었다.

    일전에 낭왕에게 썼을 때처럼 누군가 초음을 감지한다면 곤란에 처할 수도 있을 테니까.

    대문을 넘어 낮고 평평한 판석을 밟자 온갖 기화요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경내가 눈에 들어온다.

    새해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겨울임을 생각하면 퍽 해괴한 광경.

    강엽은 문지방을 넘는 순간부터 공기가 약간 따뜻해졌다는 것을 알고 잠시 멈칫했다.

    당문 무인들이 어떤 생각인지 짐작한다는 듯이 설명했다.

    “장원에 환경에 간섭하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약재를 원활히 수급하기 위함이지요. 그렇기에 각 구역마다 기온이 조금씩 다릅니다.”

    즉, 강엽이 보는 저것들이 모두 약초라는 뜻.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예쁘다고 함부로 만지지 않는 걸 추천드립니다. 대다수는 평범한 약초들이지만 드물게 독초도 있는지라....”

    물론 위험한 독초들은 안 보이는 곳에서 기르거나 보이는 곳에서 기르더라도 울타리를 쳐놓는다.

    다만 이렇게 말해야 가문을 찾아온 손님들이 괜한 짓을 삼간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다.

    가문에서 기르는 화초들도 약이나 독에 관련되었다는 게 참으로 당문답다고 해야 할까?

    능정각이 실소하며 말을 보탰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눈으로만 감상하면 되니까.”

    몇 개의 정원과 연못, 월동문을 지나서 안쪽으로 가자 현판에 활명원이라 적힌 전각이 나왔다.

    당문의 의원들이 상주하는 구역. 입구에 들지도 않았는데 온갖 약냄새가 뒤섞여서 코끝을 찌른다.

    “원주님, 두 분을 모셔왔습니다.”

    “모시게.”

    전각 내부로 들어가서 허락을 구하자 낯익은 목소리가 화답한다.

    당문 무인들이 문을 밀자 온갖 서류와 서책에 파묻힌 당우경이 두 사람을 반겼다.

    “어서 오시오, 두 분.”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구려. 참, 능 무사는 괜찮소? 가문의 무인들 말로는 교령 두 명과 싸우다 다쳤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강엽이 능정각을 향해 초음을 써봤다.

    경맥 곳곳에 흉진 것처럼 크고 작은 내상들이 감지되었다.

    ‘어쩐지 운신이 약간 불편해 보이더라니.’

    어쩌면 잔섬이라는 은천패 낭인이 무례하게 뻗댄 것도 능정각이 내상을 입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능정각이 내상을 입어서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고 여기고 말이다.

    “몸도 정상이 아니면서 술 마실 생각이었나?”

    “이 정도는 잘 먹고 잘 자면 낫는다. 왕년엔 이것보다 훨씬 심하게 다쳤는데도 아무렇지 않았어.”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당우경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종이로 감싼 환단을 꺼냈다.

    “받으시오.”

    “어이쿠, 이 귀한 걸 받아도 될지....”

    말은 그렇게 해도 능정각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당우경이 주는 약을 받아챙겼다.

    당우경이 수염을 쓸며 강엽을 돌아봤다.

    “얼마 전에 혈귀들이 분원(分院)의 의원들을 납치했다오. 능 무사는 의원들을 구하기 위해 본문의 무인들과 함께 갔다가 교령 두 명과 맞닥뜨렸소.”

    활명원은 사천 각지에 분원을 내고 병자들을 치료했다. 한데 혈교도들이 분원을 습격, 한바탕 난장판을 피우고 의원들을 납치했던 것이다.

    강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의원들까지 건드렸단 말입니까?”

    “혈귀들은 강호와 민간을 구분하지 않거든.”

    당우경에게 눈빛으로 허락을 구한 능정각이 대신 말했다.

    “아까 객잔에 낭인들 몰려있는 거 봤지? 의원들을 구하기 위해 고용된 낭인들이었어.”

    한 군데가 아니라 사천 전역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

    그중 능정각이 상대한 자들은 성도 분원의 의원들을 납치했던 무리로, 교령이 끼어 있었다.

    “근데 막상 갔더니 교령이 한 명 더 있지 뭐야. 그땐 나도 좀 당혹스럽더군.”

    심지어 개중 한 명은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였기에 능정각도 자칫했으면 당할 뻔했다.

    그때를 생각하며 고개를 휘휘 내저은 그가 당우경을 향해 말했다.

    “혈귀들이 의원들을 납치한 까닭은 뻔합니다. 혈라분에 중독된 사람들을 치료하지 못하게끔 하려는 거죠. 겸사겸사 당문의 무인들도 유인해서 격파하고 말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당우경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강엽이 인상을 찌푸렸다.

    “별별 짓을 다하는군.”

    “소문이 퍼진 이후에 더 막나가는 경향이 강해졌어.”

    “소문?”

    “그래, 그 혈라분이라는 비약을 먹으면 죽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 어떤 곳에선 괴물이 된다는 소문도 있고... 아무튼 별 해괴한 소문이 다 퍼지고 있어.”

    강엽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황산에 있었을 적에 하오문주에게 했던 부탁.

    비약에 관한 소문을 널리 퍼뜨려달라고 했는데, 황산을 떠나고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사천 구석구석에 소문이 퍼진 듯싶었다.

    당우경도 첨언했다.

    “혈라분에 대해서는 좀 알아낸 게 있소. 두 가지로 나뉘며, 들어가는 약재도 조금씩 다르지. 본문에선 편의상 갑약과 을약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갑약은 공력을 큰 폭으로 격발시키는 효능을 지녔소. 그리고 을약은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데, 중독자들은 쾌락에 빠지면서 환청과 환각을 접하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혈교의 교리에 매료된다는 것이오.”

    일전에 하오문주를 통해서 들은 말과 일치한다.

    그러나 당우경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간의 괴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이오. 혈라분을 복용하면 신체가 단단해지고 감각도 기민해지지. 이건 갑약과 을약 모두 비슷하오. 무공과 연이 없는 필부도 을약을 일정량 복용하면 건장한 장정을 단매로 때려죽일 만큼 강해지더군.”

    약에 취해서 이지가 흐릿한데도 감각은 놀랄 만큼 기민해지는 모순.

    무인이 복용하면 더욱 강한 효능을 발휘했다.

    “물론 이런 힘을 아무 대가도 없이 쓸 수는 없소. 갑약은 몇 번만 복용해도 목숨을 잃을 거요. 을약 역시 서서히 몸이 망가질 테고.”

    “선천지기를 소모한다는 거군요.”

    “핵심을 정확히 짚었구려.”

    문제는 무공을 잘 모르는 양민들에게 선천지기니 뭐니 해봤자 이해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강엽은 그제야 왜 소문이 두루뭉술하게 퍼졌는지 알 것 같았다.

    ‘하긴 강시가 된다는 것보단 훨씬 직관적이군.’

    복잡한 소문을 내봤자 와닿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들이 혈라분을 복용하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니 굳이 구구절절 진실을 짚어줄 필요는 없으리라.

    “그리고 이건 하오문에서 보낸 소식인데... 그들 말에 따르면 모산파의 술법이 관련됐을 거라고 하오.”

    “그렇습니까?”

    강엽은 시치미를 뚝 뗐다.

    낭왕과 하오문주에게는 모산파의 술법을 익혔노라 고백했지만, 굳이 당우경에게까지 진실을 말해줄 이유는 없다고 판단한 것.

    “정작 그들도 근거를 대진 못했지만, 혈교가 혈라분을 뿌리는 목적이 대량의 강시를 얻기 위해서라는군. 본문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오. 술사들을 청해서 자문을 구해봐도 명확한 답을 주는 사람이 없고....”

    당우경이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강엽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른 것은 그라면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글쎄요. 저도 나름대로 연구해봤지만... 많이 알아내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하오문에서 없는 말을 지어서 하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당우경의 눈빛에 약간 실망의 기색이 스쳐지나갔지만 강엽은 애써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대신 다른 걸 알아냈습니다. 잘하면 놈들의 본거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지도 모릅니다.”

    “...!”

    “저, 정말로?”

    당우경과 능정각이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근 몇 달간 사천 여기저기를 이잡듯이 뒤졌지만 큰 성과를 보진 못했던 것이다.

    “낭왕을 뵈러 갔을 때 들었다. 한중의 암시장에 혈라분을 대량으로 뿌리는 자가 있다고. 그놈을 잡으면 놈들의 본거지를 찾을지도 모르지.”

    “그건 또 어떻게... 아.”

    무언가 깨달았는지 능정각이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금패인 만큼 낭왕의 곁에 하오문주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 것이리라.

    “으음, 그럼 한번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는데... 근데 한중의 암시장이라면 병력으로 밀고 들어가기는 힘든데.”

    “그랬다간 오히려 놓칠 수 있어. 소수의 정예로 암시장에 잠입할 생각이다.”

    “금패급이 필요하지 않겠어?”

    “그 몸으로?”

    내상을 입어 전력을 발휘할 수 없는 몸이다.

    당문의 요상약을 복용해도 암시장에 가기 전에 완치되기는 힘들겠지.

    “걱정 마라. 야차마곤이 돕기로 했어.”

    “엥? 그 양반이...?”

    “당신보단 훨씬 만전이야.”

    시무룩해하는 능정각을 말 한마디로 침몰시킨 강엽이 당우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당의 청수 도장과 아미의 소창후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초대장은 딱 한 장이 남았고요.”

    “본문의 도움을 바라시오?”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른 당우경이 와준다면 참 좋겠지만 강엽은 그리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당문의 분원들이 습격당해서 난리통이 난 마당에 활명원주인 그가 선뜻 올 리는 없지 않은가?

    “으음, 내가 가기는 그렇고... 능 무사도 내상을 입었으니 누굴 보내야 할지 모르겠구려.”

    당우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면서 그윽한 향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가 가겠습니다, 숙부님.”

    미인도에서 나온 듯한 단아한 이목구비의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강엽과 능정각에게도 포권을 해보였다.

    당우경이 짐짓 미간을 좁히며 역정을 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손님들이 왔는데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온 건 송구합니다. 하지만 밖에서 듣고만 있을 순 없었어요.”

    사천삼미로 꼽히는 독묘화 당묘정.

    당문주의 딸이자 당우경의 제자인 그녀가 강엽의 시선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밖에서 엿들었습니다.”

    “알고 있었소.”

    모두 금패급 고수만 모였는데 바깥에 다른 사람의 기척이 있는 것을 모를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이렇게 나설지는 몰랐지만.’

    설마 당우경의 허락을 받지 않고 먼저 의사를 밝힐 줄이야?

    언행만 보면 요조숙녀처럼 얌전할 것 같은데 은근히 저돌적인 구석이 있었다.

    “허락해주세요, 숙부님. 무당과 아미가 나섰는데 본문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듣기 싫다. 거기가 어디인지 알고 가겠다고 말하는 게냐? 흑도 사파는 물론이고 정체를 숨긴 마인들까지 드나드는 곳이다. 네가 갈 곳이 아니다.”

    “무당의 청수 도장과 아미의 소창후까지 가는데 제가 못 갈 이유가 있나요?”

    “넌 장차 가문을 이을 몸이다.”

    현 당문주에겐 아들이 없다.

    예전엔 있었지만 어릴 적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 뒤로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기에 당묘정이 소문주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형님도 가문을 비우신 마당이다. 네가 거기 가서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내 무슨 낯으로 형님을 뵙겠느냐? 가문에 고수가 너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보내면 그만이다.”

    당문주가 무림맹주와 혈교의 일을 상의하러 갔기 때문에 당우경이 문주 대리를 맡고 있는 상황.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로 그 사실을 파악한 강엽은 입맛에 쓴맛이 감도는 걸 느꼈다.

    ‘안 좋은 때에 왔나?’

    이래선 혈교의 본거지를 찾아도 당문이 전력을 동원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당우경이 호전적인 성향도 아니고.

    “당 원주님의 말씀대로 위험한 곳이오.”

    “혈라분엔 특이한 약재들이 들어가지 않아요. 대부분 평범한 약재들이죠.”

    “...?”

    뜬금없이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걸까.

    강엽은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그녀의 말을 막는 대신 계속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근데 사천의 약방들을 다 뒤졌는데도 약재들을 대량으로 사간 사람들은 없었어요.”

    “다른 지역에서 들여온 것 아니오? 이를테면 운남이나 귀주, 섬서라든지.”

    “그럴 수도요. 하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요.”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듣자하니 한중의 암시장은 없는 게 없다면서요. 그럼 약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까요?”

    “...!”

    “...!”

    “...!”

    암시장이 혈라분을 유통하는 창구로만 쓰이는 게 아니라 약재를 구하기 위해서도 쓰일 수 있다는 말.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이지만, 아예 일리 없는 말은 아니었다.

    당묘정이 쐐기를 박았다.

    “스스로를 지킬 무공을 지녔으면서 약재에 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은 숙부님을 제외하면 제가 가장 나아요. 물론 저 말고 다른 인재들도 있지만 초대장이 한 장이라면 제가 가는 게 최선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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