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72화 (172/450)
  • 31화. 당문 (1)

    사천당문.

    무림에선 독과 암기의 대종사, 민간에선 의술의 대가로 통하는 이 무림세가는 성도 동쪽 타강(沱江) 유역에 당가타(唐家陀)라는 이름의 집성촌을 짓고 산다.

    중경을 떠난 강엽이 당가타 어귀에 도착한 것은 사흘이 지나서였다.

    흑무암쇄진을 쓰며 낮에도 달린 덕에 하루에 삼백 리씩 이동한 것이다.

    다행히 중경을 떠나기 전 혈목을 시켜 백환곡주와 제자들의 피를 흡혈한 덕에 기력은 충만했다.

    완만한 언덕 위에서 수백 호가 모인 당가타를 한눈에 담은 강엽이 시선을 멀리 향했다.

    “사천당문.”

    강호 무림에서 여덟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대가문.

    역사와 명망, 무력에 이르기까지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왕조가 몇 번을 바뀌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영토에서 굳건하게 뿌리를 내렸다.

    가히 용담호혈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지켜보는 시선이 있나?’

    강엽은 자신을 감시하는 시선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자기들 딴에는 기척을 숨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강엽이 봤을 땐 평범한 은신술이었다.

    아무래도 백서희와 같이 지내면서 그녀의 은신술을 겪다 보니 기준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찾는 데서 그치지 않고 초음으로 그들의 자세와 무장, 축기량까지 자세히 살핀다.

    ‘당문의 무인들 같은데....’

    모두 다량의 암기를 소지한 걸로 봐선 당문 무인들이 확실했다.

    아마 각자의 자리에 은신한 채 당가타로 접근하는 이들을 감시하는 보초들이겠지.

    강엽은 굳이 자신이 그들을 찾았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똑바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갔다.

    비탈을 뜻하는 타(陀)를 붙인 마을답게 당가타의 가옥들은 계단처럼 위로 이어져 있었다.

    외적이 당문을 도모한다면 필연적으로 험한 비탈길을 오르면서 당가타를 통과해야 한다.

    그땐 가옥들이 층층의 성벽이 되어 외적들을 막는 역할로 기능할 터.

    실제로 당가타의 가옥들은 대부분 벽돌로 지어졌으며, 목옥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그렇게 당가타의 입구로 들어갔을 때였다.

    “의원을 찾아오셨소? 본문에 용무가 있어 오셨소?”

    문지기처럼 마을 입구를 지키는 녹색 무복.

    말끔하게 차려입은 당문 무인들이 허리춤의 자성검과 등에 짊어진 방패를 보고 기광을 발했다.

    ‘언제든지 출수할 기세군.’

    몰래 암기를 쥐거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문에 용무가 있어 왔소.”

    “약속은 하셨소?”

    “아니오.”

    “그럼 출입할 수 없소.”

    “실은 활수....”

    강엽이 사정을 설명하려던 때에 무인들이 와락 인상을 썼다.

    “본문은 손님을 받지 않소.”

    당문의 기풍이 폐쇄적이라고 하더니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으면 방문할 수도 없는 모양.

    그러나 강엽도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이름을 말하면 들어갈 수 있으려나?’

    정체를 밝히고 활수명의 당우경과 안면이 있는 사이임을 언급하면 통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입을 열려던 때였다.

    “어? 아니, 이게 누구야! 귀영 맞지?”

    영웅건을 쓴 사내가 옅은 수염을 쓸며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내의 모습에 강엽이 미간을 모았다.

    “금파검?”

    “네 소식은 들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금패가 될 줄이야.”

    금파검 능정각.

    지난날 낭왕의 전갈을 전해주었던 성도 분타의 금패급 고수가 당가타에 있었던 것이다.

    당문 무인들이 의아해했다.

    “능 대협, 아시는 분입니까?”

    “알다마다. 난 오히려 자네들이 이 친구를 못 알아봐서 놀라운걸. 사천 무림의 세 번째 금패인데.”

    “세 번째 금패라면....”

    그 말을 곱씹은 당문 무인들은 그제야 뭔가를 깨닫고는 놀란 얼굴로 강엽을 돌아봤다.

    좀 전에 능정각이 외쳤던 귀영이라는 별호가 떠올랐는지 그들의 표정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낭인전의 금패급 고수라면 함부로 대할 신분이 아닌 것이다.

    그때 능정각이 물었다.

    “한데 널 당문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너도 당문의 의뢰를 받고 온 거냐?”

    “의뢰?”

    “아니야?”

    “난 개인적인 볼일 때문에 온 건데.”

    강엽이 은근슬쩍 말을 놔도 능정각은 딱히 개의치 않는지 턱수염만 긁적였다.

    “흠, 그렇군. 무슨 볼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문은 지금 평소보다 더 폐쇄적이야. 나도 의뢰가 아니면 당문에 출입하지 못했을걸?”

    “활수명의를 만나러 왔다.”

    “그럼 더 힘들지. 그분은 혈귀놈들이 뿌린 비약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거든. 급한 일인가?”

    “그 비약에 관련된 일이기도 해.”

    광명마교의 방패 때문에 왔지만 온 김에 활수명의도 만날 생각이었다.

    몇 달이나 지났으니 그도 비약의 비밀을 밝혀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강엽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비밀까지 알아냈을지도 몰랐다.

    “활수명의께 내 이름을 전해주시오. 귀영이 뵙길 청한다고 말씀드리면 될 거요.”

    “아, 알겠습니다.”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당문 무인들이었다.

    씩 웃은 능정각이 강엽의 어깨를 쳤다.

    “갑자기 찾아왔다면 묵을 데도 없겠군. 이쪽으로 오라고. 마침 좋은 데가 있으니까.”

    * * *

    능정각이 안내한 곳은 당가타 외곽의 객잔이었다. 당가타에 볼일이 있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묵는 곳.

    입구의 주렴을 치우고 들어가자 곳곳에서 술과 간단한 안주를 먹고 있는 무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갈한 복장을 하고 있는 자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무뢰배처럼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자들.

    “낭인들이군.”

    “맞아.”

    능정각의 출현에 놀란 낭인들은 저들끼리 떠드는 걸 멈추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선망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막상 접근하지는 못하는 모순적인 태도.

    하지만 수천이 넘는 낭인들 중에서도 서른 명 남짓한 금패급 고수의 가치를 생각하면, 저들이 어려워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금파검, 같이 온 자는 누구냐?”

    온몸이 흉터투성이인 말상의 사내.

    강엽은 그의 허리춤에 달랑거리는 은천패를 힐끗 보고 이채를 띠었다.

    “잔섬(殘殲).”

    “당문의 객당에 머무르는 네가 여기에 온 것도 특이한데 다른 사람까지 데려왔다니.”

    째진 눈을 더욱 가늘어지며 강엽을 위아래로 훑어본 그가 재밌다는 듯이 사납게 웃었다.

    “용비늘이 돋아난 검은 장갑, 흑포, 그리고 허리춤의 보랏빛 장검까지. 근자에 그런 특징을 가진 놈팡이가 명성을 얻고 있다고 하던데.”

    제법 눈썰미가 좋은 자였다. 강엽의 외양만 보고 소문 속의 귀영임을 알아본 것이다.

    능정각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놈팡이라. 이 친구를 알아보고도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걸. 후환이 두렵지 않나?”

    “전혀. 오히려 반대다.”

    콧방귀를 뀐 잔섬이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강엽을 돌아보는 눈빛에 짙은 호승심이 어렸다.

    “소문을 들으니 짧은 시간에 여러 공을 세운 것 같지만, 그건 시운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똑같은 기회가 왔다면 나도 해낼 수 있었어!”

    “이봐, 너무 자만하지는 마. 이 친구는 신무검을 죽였어. 복건성의 금패급을 처단했다고.”

    “그걸 들으면 내가 쫄 것 같나?”

    잔섬이 강엽을 향해 으르릉거리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떠냐, 애송이? 이 몸과 한번 붙어보는 건? 이런 말을 듣고 도망치지는 않겠지?”

    강엽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능정각을 향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날 여기로 데려온 게 이런 이유였나?”

    “끄응, 뭐라 할 말이 없구만. 근데 나도 이놈이 여기 있는 줄은 몰랐어. 원래 남쪽에서 활동하는 놈이거든. 진멸신권을 따르는 놈인데....”

    사천 남부에서 활동하는 금지패의 낭인. 성정이 호쾌해서 많은 낭인들이 따른다는 풍문이 돌았다.

    무공과 경험, 인맥이 모두 풍부해서 낭인전 내부에선 차기 낭인전주를 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라는 평이 돌고 있었다.

    “낭왕이 널 제법 아낀다지? 어디 얼마나 대단한 실력이기에 우리 형님의 경쟁자라 불리는지 보자고.”

    강엽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경쟁자?”

    “엥?”

    오히려 능정각이 놀랐다.

    “뭐야? 처음 듣냐?”

    “처음인데.”

    “낭왕께 두 달이나 가르침을 받았다면서?”

    “그게 뭐 어쨌다고?”

    “어떤 금패도 너처럼 오래 가르침을 받진 못했어. 난 말할 것도 없고, 진멸신권도 열흘이나 됐을까. 그 때문에 낭인전에서는 낭왕의 복심이 네게 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소문도 돌고 있다고.”

    “그러니까... 낭왕이 나를 후계자로 점찍었다?”

    완전히 금시초문이었다. 낭왕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때도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니, 애초에 가르침을 받은 시일을 가지고 후계자니 뭐니 하는 것도 우스웠다.

    “좀 어이가 없는데. 낭인전주가 무슨 동네 골목대장도 아니고. 이런 소문이 돌면 사람들이 낭인전을 근본 없는 방파라고 비웃을 거다.”

    한데 소속 낭인들이 아니라고 하진 못할망정 일희일비하다니.

    심지어 금패급 낭인인 능정각도 그 소문을 반신반의하는 건 꽤나 충격적이었다.

    “잔섬이라고 했나? 은천패라면 그딴 소문에 휘둘리지 마라. 그리고....”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기질적인 검은 심연이 향하자 흉터투성이 낯짝이 움찔 경직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수치심에 벌게져서 분노를 폭발시키려는 때였다.

    불현듯 아무 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뻗어온 손길이 그의 뒷머리를 잡고 식탁에 내리쳤다.

    콰앙!

    “커억!”

    “소문이 맞다 한들,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 건 꽤 불쾌한 일이야.”

    대나무를 이어붙인 식탁에 균열이 갈 만큼 강하게 내려친 충격.

    하지만 잔섬의 주변에 있던 낭인들은, 그보단 강엽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아니!?”

    “잔섬 형님!”

    그들이 분분이 칼날을 빼들고 강엽을 향해 겨누었을 때 능정각이 일성을 터뜨렸다.

    “멈춰, 이 새끼들아!”

    내공이 실린 고함이었다. 강엽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던 낭인들이 사자후처럼 귓가를 강타한 목소리에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능정각이 입맛을 다셨다.

    “그, 너도 그놈 좀 놔줘라. 진멸신권이 아끼는 놈이라서 죽이면 골 아파져.”

    “죽일 생각은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엽은 한 움큼 움켜쥔 머리칼을 놓지 않은 채 잔섬을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식탁이 깨질 만큼 강한 충격을 받았다면 죽거나 기절하겠지만, 호신기로 스스로를 지킨 잔섬은 피를 뚝뚝 흘리며 이를 갈았다.

    “크악! 너 이 새끼...!”

    “내 소문을 들었다면서. 근데 내 무공에 대한 소문은 한 귀로 흘렸나?”

    허상을 만들고 감각을 속여넘기는 암신의 공능.

    강엽이 육룡환의 경지에 오르면서 이젠 은천패급의 고수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해진 것이다.

    잔섬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그래봤자 우악스러운 괴력에 모근이 뿌리째 뽑혀나갈 뿐.

    순식간에 피투성이 몰골이 된 잔섬의 귀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자꾸 반항하면 아예 병신으로 만드는 수가 있어.”

    강엽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낀 잔섬은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런 미친 새끼....”

    한 낭인이 질린 듯이 중얼거리는 말에 강엽이 쥐고 있던 잔섬의 머리를 다시 식탁에 박아버렸다.

    꽈앙!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이번엔 아예 두 쪽으로 쪼개진 식탁.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린 잔섬이 바람 빠지는 신음 소리를 흘렸다.

    “끄으응...!”

    “뭐라고?”

    맞은 것은 잔섬이지만, 얼굴에 핏기가 가신 낭인들은 숫제 한마디도 뱉지 못했다.

    자신들이 말실수를 하면 잔섬이 다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그 모습을 쭉 지켜본 강엽은 그제야 잔섬을 놔주면서 낭인 한 명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의원한테 데려가라.”

    “오늘 일은....”

    “그래, 잊지 말고 진멸신권한테 꼭 말해라. 이놈이 내뱉은 말도 전부 전하고.”

    “....”

    강엽을 향해 같잖은 도발을 한 것을 말함이었다.

    정작 강엽은 그리 화가 나진 않았지만, 어설프게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우위를 보여주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 독하게 손을 쓴 것.

    낭인들이 잔섬을 들쳐업고 객잔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전낭에서 은전을 꺼냈다.

    “기물을 부숴서 미안합니다, 주인장.”

    “뭐 자주 있는 일이오. 젊은 녀석들끼리 술 처먹고 싸움하는 거야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일이지.”

    무림인들끼리 싸우면 두려울 만도 한데 주인장은 익숙하게 돈을 받아챙겼다. 당문의 무인들이 젊은 혈기에 주먹다툼을 하는 일이 꽤 잦아서 적응이 된 듯했다.

    게다가 주인장 역시 날렵한 근육이 붙은 데다 호흡도 일정한 게 내가기공을 익힌 티가 났다.

    “그래도 ‘우리 씨족’도 아닌 사람들끼리 싸우는 건 꽤 오랜만이구려. 우리 객잔에서 붙는 건 상관없는데, 바깥에선 그러지 마시오. 금패급 고수라도 당가타에서 소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으니까.”

    “유념하겠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팔대세가의 한복판이다. 금패급 고수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하군. 술은 나중에 마셔야 할 것 같아.”

    “쩝, 어쩔 수 없지. 진멸신권의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이 정도 일로 화를 낼 양반은 아니야.”

    잔섬을 죽였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낭인들끼리 술기운에 싸우는 건 흔한 일이다. 진멸신권이 오늘의 일을 알아도 쓴웃음으로 넘어가리라.

    그때 주인장이 턱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저기 우리 가문 사람들이 오는 것 같은데.”

    그 말대로 녹색 무복을 입은 당문 무인들이 주렴을 헤치고 들어왔다.

    그들은 난장판이 된 객잔을 당혹스럽게 둘러보다 주인장이 괜찮다는 시늉을 하자 떨떠름해했다.

    그리고는 강엽과 능정각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포권을 쥐었다.

    “활명원주님께서 두 분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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