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69화 (169/450)

30화. 협력 (1)

숨을 크게 들이쉰다.

‘나는 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욕 처먹는 건 당연하지. 나라도 쌍욕했을 거야.’

욕먹는 것에서 안 끝날 수도 있지만 각오한 일.

고작 이런 일로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그녀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짓이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한 발을 내딛는다.

살수로서 찾아온 게 아니니 정문으로 가서 신분을 밝히고 홍가려를 만날 생각이었다.

만약 문전박대를 당한다면?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일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여차하면 강엽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중에 가기 전까지 중경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어?”

용기를 품고 내디딘 발걸음은, 다음 순간 생각지도 않은 광경을 보고 우뚝 멈춰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보표들의 모습.

야심한 밤이라고 하나 아직 삼경(三更)밖에 되지 않았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다니?

“어휴, 보표 새끼들이 군기가 빠졌네. 한두 명도 아니고 전원이 다 졸면 집은 누가 지켜....”

무심코 중얼거린 혼잣말이 흐려진다.

아무리 군기가 빠져도 보표들 전원이 다 졸고 있는 것이 말이 되나.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전부 죽었어!’

살수로서 숙련된 그녀조차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깔끔한 죽음.

특수한 독을 썼는지 쓰러지지도 못하고 선 채로 뻣뻣하게 절명했다.

‘싸운 흔적이 없어. 죽인 뒤에 일부러 세워놓은 것도 아니야. 자기가 어떻게 죽은지도 모르고 죽은 거야.’

누군지는 몰라도 살수 무공이 경지에 오른 자의 솜씨였다. 이렇게 죽이는 건 그녀조차....

‘아니, 할 수는 있으려나?’

일전에 광명마교의 마인들을 암살했을 때도 그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몰래 접근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사원루에 쳐들어왔을 때와 비교하면 무인으로서도, 살수로서도 훨씬 고강해졌다.

이제는 흑접주가 상대라고 해도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보표들을 암살한 자의 솜씨도 그녀 못지않은 경지라는 건데....

‘이만하면 흑접주의 아래가 아니야.’

황산을 떠나기 전에 하오문주는 홍가려에게 자신의 호위대 일부를 붙여줬다고 했었다.

전원이 은패급의 고수로, 그중 한 사람은 은천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절정고수라고.

하지만 이만한 살수 무공을 익힌 자라면 은천패의 고수조차 안심할 수 없었다.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젠장, 이게 웬일이래.”

속으로 욕지거리를 구시렁거린 백서희가 사원루의 정문을 넘었다.

* * *

“...죽었나요?”

홍가려의 눈이 흔들렸다.

소창후가 던진 창을 맞은 나무 줄기가 폭발하듯 터지면서 사람으로 보이는 뭔가가 떨어졌다.

높이를 생각하면 사 장은 되었다. 저런 높이에서 낙법도 취하지 못하고 떨어졌다면....

“제가 가서 확인해보지요. 만약을 위해서 홍 소저는 여기서 기다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홍가려를 제지시킨 소창후가 창문을 훌쩍 넘어 뒤뜰에 착지했다.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나무에 떨어진 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무릎은 앞쪽으로 꺾여 있고, 한쪽 눈알은 터진 것처럼 짜부러져서 피와 진물을 흘리고 있는 몰골.

다리의 부상이야 떨어지면서 부러졌다고 쳐도, 눈알의 상처는 그렇게 생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안와가 함몰될 정도로 짓이겨놨어. 권의 고수가 주먹으로 후려친 거다.’

이런 지경에 처했으면서도 사내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천조각으로 입을 막아놨기 때문이다.

“읍! 으읍!”

“이런...! 지금 벗겨드리겠습니다.”

사내의 정체가 무엇이든 입을 풀어줘야 말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사내가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쳤다.

‘왜 저러지?’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그녀는 사내의 천조각을 잡아뗐다. 사내는 손도 뒤로 꺾인 채 묶였기에 소창후의 접근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창후는 천조각을 떼고 나서야 사내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깨달았다.

파파파파파팍!

사내의 구강을 꽉 채운 죽통.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비침이 소창후의 안면을 향해 쏘아졌다.

“흐읍!”

헛바람을 집어삼키면서 고개를 틀자 비침이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갔다.

동자료혈에 공력을 집중한 그녀는 비침의 끝에 시퍼런 독이 발라진 것을 알고 입술을 깨물었다.

‘함정!’

자신을 노리고 판 함정이 아니다.

애초에 사원루에 찾아온 것은 계획하지 않은 충동적인 선택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

“홍 소저, 피해요!”

“예?”

홍가려가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멀뚱멀뚱 바라봤을 때, 별안간 지붕 처마 아래로 한 줄기 빛살이 전광석화처럼 떨어졌다.

면전에 짓쳐드는 칼날 앞에서 홍가려는 석고마냥 굳어졌다.

대신 등 뒤에서 튀어나온 청색무복의 여인이 살수의 칼날을 받아냈다.

까앙!

“감 호위?”

“물러나십시오, 아가씨!”

사원루주가 호위라면서 붙여준 여고수였다. 그녀가 어딜 가든 안 보이는 데서 지켜주는 사람.

소창후가 창을 던지는 순간 이상을 알아차리고 홍가려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감 호위라 불린 여인뿐 아니라 그녀와 비슷한 행색을 한 여인들이 삼면에서 홍가려를 호위했다.

그때쯤엔 소창후도 창을 회수해서 여인들이 있는 삼층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미의 소창후라... 훗, 대어가 걸렸구나.]

낮게 깔리는 어둠 속의 목소리.

마치 동굴에서 외치듯 대기를 흔드는 전성이 귓가를 강타했다.

“누구냐!”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반대쪽으로 몸을 틀며 반격초를 날렸다. 전성이 들린 곳의 반대쪽에서 공기가 일렁거렸던 것이다.

쐐애애애애액!

협봉검이 창대 위로 미끄러졌다.

목을 노리는 기습에도 소창후는 당황하지 않고 한 박자 가속하며 변초를 구사했다.

상대의 오른팔 아래쪽에 창대를 밀어넣고는 절묘한 흐름으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창대를 한 바퀴 돌렸다.

유려하게 회전한 창대가 살수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두개골에 금이 가는 충격을 받고 고꾸라졌다.

그러나 소창후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사방에서 그녀를 위협하는 움직임이 다가왔다.

[소창후 너라면 제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지. 홍가려보다 더 맛있는 먹잇감이리라.]

아까와는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혜심 스님!”

홍가려가 비명처럼 소창후의 법명을 불렀다.

검은 야행복을 입은 살수들이 그녀와 호위들을 빽빽이 에워싼 채 날붙이를 들이밀고 있었다.

하나같이 극독을 발라서 날이 시퍼런 것이,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또다시 누군가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살문에 의뢰를 넣은 걸까?

[흑접이 널 죽이려다 실패했지. 그 때문에 멸문했고 말이다. 우린 널 죽여 흑접이 못 다한 살업을 완수하고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셈이다.]

“뭐라고요?”

[소창후 역시 훌륭한 제물이지. 혈교가 정파 고수들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음을 알고 있나?]

목소리는 사방에서 울렸기에 소창후도 이를 뿌득 갈았다.

“한낱 사마외도 따위가...!”

[큭큭,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 구파의 고수를 죽이는 건 멸문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니.]

속가 제자도 아니고 본산 제자라면 문파 전체가 나서서 복수할 터. 흑접도 청성파와 아미파를 직접 건드릴 엄두를 내진 못했었다.

그러나 난세에선 달랐다.

[너흴 도와줄 자들은 없다. 장원을 지키는 보표들은 전부 제압했으니까.]

“그 많은 사람들을...?”

홍가려와 호위들은 아연해졌다.

비록 장사를 하진 않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사원루를 지키는 보표들은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

한데 그들을 모조리 제압하다니.

‘대체 이들의 정체가 뭐지?’

모두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컥...?”

그녀들을 포위한 살수들이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한둘이 아니라 여럿이, 마치 동심원이 퍼지듯이 더 많은 살수들이 연달아 쓰러진다.

[...뭐냐?]

어둠 속의 목소리도 당혹한 기색.

다만 아직도 어떤 영문인지 깨닫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비상한 기감으로 상대를 찾아냈다.

[네년은 또 어디서 튀어나온 계집이냐? 너도 홍가 계집을 지키는 호위인가?]

그 말에 벙찐 것은 홍가려 본인이었다.

‘다른 호위가 또 있었어?’

감 호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돌아봤지만 그들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 듯 혼란스러워했다.

“누가 이 지랄을 하나 싶었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너울진다.

“섬서의 백환곡(百幻谷)이 여긴 웬일이래?”

[하, 계집이 은신술을 펼치고 있구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몸을 날린 살수들은 날붙이를 휘두르기도 전에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안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만큼 얇은 강사가 매복처럼 방 곳곳을 가로질렀던 것.

“끄윽...!”

“으읍!”

그 자리에서 절명한 자들은 말이 없었고, 어설프게 팔다리가 잘린 자들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은 의연한 태도를 칭찬해줘야 할까.

흑접이 그랬듯 백환곡의 살수들 역시 인간적인 감정을 거세당한 살인병기로 길러졌다.

그렇기에 백서희는 백환곡의 살수들을 동정했지만, 손속에 사정을 두진 않았다.

팔 하나 움직일 힘만 있어도 살행을 완수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살수들의 본성이었으니까.

촤라라라락-!

“대충 열여섯인가? 소창후가 상대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서른둘. 예순여덟 명이 남았네.”

백환이라는 이름 그대로 백환곡은 백 명의 살수로 구성된 살문이다.

[우릴 알고 있다니... 네년 역시 살수였구나.]

“전직 살수지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백환곡의 살수들은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날붙이를 휘둘렀다.

하나 그들의 예상을 비웃듯이 손에 쥐어진 검은 허공만 꿰뚫었을 따름.

오히려 쌍검이 그들의 사혈을 찍고 급소를 베어 황천길로 인도한다.

이윽고 열여섯 명의 살수들이 모두 죽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낸 백서희의 자태에 홍가려의 눈이 부릅뜨였다.

“당신은...!”

엄밀히 말하면 두 사람이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홍가려는 백서희를 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백서희가 강엽에게 제압당해서 의식을 잃었으니까.

그래도 백서희는 홍가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음, 안녕. 이런 만남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너도 팔자가 참 사납네.”

계면쩍은 얼굴로 어색한 감정을 숨기면서도 그녀는 홍가려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그녀의 은신술을 꿰뚫어본 백환곡주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

‘흑접주 그 인간과 동급이라고 평가받은 작자야. 휘하의 살수들까지 끌고 왔다면....’

규모는 좀 작아도 흑접과 비슷한 전력을 지닌 백환곡이었다. 백환곡의 정예 살수들이 나선다면 소창후가 있어도 필승을 보장하지 못했다.

“여길 빠져나가야 해.”

“네?”

“우리만으로는 무리야. 도움을 받아야지. 낭인전으로 가자.”

이럴 거라면 강엽과 같이 올 걸.

뒤늦게 후회했으나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는 수밖에.

[흥, 웃기는 말을 하는구나. 누가 네년들을 고이 보내준다고 하더냐?]

그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새로운 살수들이 나와서 활시위를 겨누었다.

통짜 무쇠로 만든 철전들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아, 아가씨!”

감 호위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둘렀다.

공력이 듬뿍 담긴 철전은 절정고수에게도 부담스러웠지만, 그녀가 가장 많은 화살을 받아낸 덕에 상대적으로 약한 두 사람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백서희 역시 철전을 튕겨내며 뒤로 물러났다.

문제는 복도에도 살수들이 즐비하다는 것.

[말하지 않았느냐. 곱게 보내주지 않겠다고. 가벼운 여흥으로 여겼던 일이 꽤 커졌구나. 네년들의 목숨으로 죽은 녀석들의 넋을 위로하겠다.]

“죽이기 전에 재미는 봐야겠지만.”

복도에서 기다린 자의 검을 타고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 피를 본 것이리라. 여인들을 쭉 둘러본 살수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간만에 눈호강을 하는군. 홍가려는 말할 것도 없고, 쌍검 계집도 끝내주는데. 오히려 몸매는 더 훌륭한 것 같아. 소창후도 비구니라서 그렇지 나름 미인이고.”

“지랄도 풍년이다, 색마 새끼. 내가 예언 하나 할까? 넌 셋을 셀 때쯤에 뒈질 거야.”

“농담도 잘하는군.”

그는 백환곡에서 가장 강한 다섯 명 중 하나였다. 흑접에 비유하면 한 자릿수와 맞먹는 일류 살수.

“네 실력은 인정하지만 셋을 셀 동안 나를 죽일 정도는 아니지. 게다가 난 혼자가 아니다.”

그가 손을 휘젓자 뒤편에 쿵 떨어지는 소리가 연속으로 울렸다.

살수의 신법치고는 지나치게 둔중한 소리.

백서희를 신경 쓰면서도 본능적으로 뒤를 힐끔거린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무슨...!”

목이 꺾인 채 떨어지는 살수들의 꼬락서니.

뭔가 잘못됐다고 여긴 그가 다시 백서희를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말했잖아. 넌 셋 셀 동안 뒈진다니까?”

“이 시건방진 년이...!”

심지어 욕을 끝맺지도 못했다.

콰앙!

바닥을 뚫고 나온 붉은 줄기가, 그의 턱주가리를 후려쳐서 천장에 처박았던 것이다.

찰진 일격에 백서희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역시 혈목이야! 믿고 있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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