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광명 (3)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낭인전은 들어오고 나가는 게 자유로운 대신 낭왕삼칙 등 체제를 유지하는 규칙에 대해서만은 어지간한 문파보다 철저하다.
신무검 우문극이 저지른 짓은 낭왕삼칙과는 관계없으나, 금패의 권한을 이용해서 낭왕의 거처를 알아내고 광명마교의 무리를 끌어들였다.
비록 광명마교가 싸울 의사는 없었다지만 방파의 수장을 위험에 노출시킨 셈.
사전에 허락을 구했다면 모르되, 이런 식으로 불쑥 찾아온 것은 낭왕의 입장에선 불쾌한 일이다.
아니, 그 자신의 감정을 넘어 하오문주가 광명마교의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았을 터.
그렇기에 낭왕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본보기를 세울 참이었던 것이다.
“신무검은 우문세가의 무공을 익혔어요. 서출이지만 무재가 뛰어나고 큰어머니와 배다른 형님을 깍듯하게 모셨기에 가문에서도 잘 대해줬죠.”
하오문주가 말했다. 그녀는 우문극과 대면한 적이 두어 번 있었다. 우문극이 낭왕의 가르침을 청하러 방문했을 때 만나봤다.
그녀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야망이 있는 사람인 줄은 알아봤지만....”
그녀는 언제나 남편에게 우문극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중한 태도 뒤에 칼을 품은 사람이었다. 조금만 약점을 보여도 이리처럼 물어뜯는 부류.
“우문세가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보고는 받았어요. 신무검이 일단의 무리를 대동하고 극비리에 우문세가를 방문했고, 우문가주와 다투던 도중 둘이 생사결을 벌였다는 건 알고 있었죠.”
“그 일단의 무리가 광명마교라는 겁니까?”
“네. 하지만 낭왕삼칙을 어긴 건 아니에요. 신무검이 가문을 차지한 건 의뢰와 상관없었으니까요.”
강엽이 숙정방을 차지했지만 낭인전에서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은 것처럼, 우문극이 광명마교를 앞세워 가문을 장악했다고 하나 낭인전이 관여할 명분은 없었다.
다만 우문극이 가주에 취임하거나 광명마교에 들어갔다면 낭인패를 반납해야 했다. 낭인전은 입회와 탈퇴가 자유롭지만 이중으로 적을 두는 것은 허락하지 않기에.
여담이지만 강엽이 숙정방을 차지했음에도 방주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것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언젠가 찾아올 것은 알고 있었어요. 광명마교를 끌고 올 줄은 몰랐지만요.”
그것도 광명마교주의 전언을 들고 찾아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 본인은 팔사도의 위세를 빌리면 낭왕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여긴 듯하지만....
‘낭왕이 그렇게 만만한 성격은 아니지.’
언뜻 무골호인처럼 보이는 낭왕이지만, 낭왕삼칙을 어긴 자에게 칼같이 척살령을 발동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선을 넘으면 용서하지 않는 단호한 성정.
“만약 신무검이 혼자 조용히 찾아와서 낭인패만 반납했다면 남편은 그를 순순히 보내줬을 거예요. 마음속으로는 애석해했겠지만....”
“그가 실수했군요.”
결국 우문극은 낭왕의 성정을 오판한 셈이었다. 아니면 광명마교의 힘을 과신하거나.
하오문주의 표정이 묘해졌다.
“글쎄요. 상황이 딱 맞물렸죠. 아마 남편이 직접 벌하려고 들었다면 팔사도가 나섰을 테니까요.”
비록 천하팔존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광명마교의 사도라면 만만히 볼 수 없는 존재.
“몇 달 전 광명마교가 강호에 다시 나타났을 때 일사도를 자처하는 존재가 복건성 무이산에 있는 녹림칠십이채의 총타를 방문했어요.”
총타니 뭐니 해도 실상은 산적 소굴이었다.
하지만 녹림칩십이채의 총타는 총표파자(總瓢把子)가 기거하는 곳.
장강수로채와 쌍벽을 이루는 녹림칠십이채의 총표파자 패력산군(覇力山君)은 사도십대고수였다.
“패력산군이 나이가 들었어도 사도십대고수의 저력을 우습게 볼 수는 없죠. 그날 일사도와 패력산군이 내기를 했어요. 패력산군이 이기면 광명마교는 천만 냥에 달하는 재물을 바치고, 일사도가 이기면 녹림은 복건성에서 완전 철수하는 조건으로요. 그 싸움에서 일사도가 십초 만에 패력산군을 죽였어요.”
두 사람의 비무가 은밀했기 때문에 소문이 퍼진 건 나중이었다.
패력산군을 꺾은 일사도는 사도십대고수의 반열에 올랐고, 녹림은 복건에서 완전 철수했다.
“그리고 광명마교엔 사도만 아홉 명이 있죠. 그 모두가 일사도처럼 강하진 않겠지만....”
어느 조직에서나 일(一)은 상징적인 서열이었다.
광명마교의 사도 서열이 반드시 무공이 강한 대로 매긴 것은 아닐지라도 일사도가 최강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일사도의 무위를 보건대 팔사도 역시 사도십대고수에 준하는 고수일 거예요. 게다가 태양볕이 가장 강해지는 한낱이라면....”
천하팔존인 낭왕도 우습게 볼 순 없었다.
낭왕이 패하지는 않겠지만, 싸움이 나면 팔사도 역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터. 어쩌면 하오문주나 연이 인질로 잡힐 가능성도 있었다.
강엽이 결론을 냈다.
“제가 낭왕 대신 싸우면 팔사도가 개입할 명분이 없어지겠군요.”
“공평한 비무니까요.”
낭왕도 아니고 신진 금패급이다. 비무가 무서워 도망친다면 우문극의 체면도 땅에 떨어진다.
우문세가의 새로운 가주로서 권위를 세워야 하는 그로서는 무조건 피해야 할 사태.
심지어 낭왕이 기력을 회복할 시간도 줬다면....
‘외통수로군.’
강엽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무리가 수놓인 밤하늘은 산중의 어둠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때 백서희가 올라왔다.
“이제 싸울 시간이래.”
* * *
강엽이 내려갔을 땐 낭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담스러우냐?”
“암만 부담스러워도 전주님과 싸우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낭왕이 결정한 비무지만 강엽은 개의치 않았다.
굳이 우문극을 콕 찝어 자신의 상대로 삼은 것이 단순히 우문극을 처리하기 위함이 아님을 알기 때문.
웃음기를 삼킨 낭왕이 강엽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넌 낭인전에서도 예외적인 녀석이다. 동패에서 단숨에 금패로 건너뛴 사례는 이제껏 없었지.”
낭왕이 호의를 베풀었기에 가능한 일.
하지만 반대로, 낭인전 내부에서는 강엽이 정말 금패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췄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존의 금패를 꺾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
전직 금패인 우문극을 꺾으면 적어도 실력으로 걸고 넘어지는 자들은 없겠지.
“너라면 잘할 거라 믿는다.”
어깨를 다독이는 낭왕을 뒤로하고 공터로 나아간다.
칠흑처럼 어두운 사위에서도 새하얗게 빛나는 하얀 도복의 사내.
전직 금패였던 광명마교의 교도는 새파란 후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젊군. 이름이 뭐냐?”
“강엽.”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신진 금패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면 광명마교도 알게 될 테니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강엽이 활동한 사천과 우문극이 활동한 복건은 대륙 반대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지만 두 성의 거리는 육천 리를 헤아린다.
강엽이 몇 년간 명성을 쌓았다면 복건에도 이름이 퍼졌을지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우문극이 팔사도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 역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익히 알려진 놈도 아니고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놈이 금패라니... 은패를 꽤 빨리 졸업한 모양이지?”
“사실 은패도 아니다.”
“뭐?”
“이전엔 동천패였거든.”
“...!”
뒤통수를 후려치는 충격에 우문극이 낭왕을 돌아봤지만 낭왕은 팔짱만 낄 뿐이었다.
그 오연한 태도에서 강엽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은 우문극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고작 동천패 따위가 금패에 올랐다고?”
무위에 따라서 차이는 있으나 대개 금패까지 오르는 데는 십 년 이상이 소요된다.
가문의 지원을 받은 우문극도 금패에 오르는 데 그만한 시간이 걸렸다.
이미 고절한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그 기간이 비약적으로 짧아질 수도 있겠지만, 강엽의 나이는 아무리 봐도 이립이 안 되었다.
“애송이, 몇 살이냐?”
“해가 넘어가면 스물넷이 된다.”
“허.”
동천패에서 바로 금패가 되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나이까지 젊지 않나.
“설마 나이를 속인 건 아닐 테고... 너 같은 놈이 정말로 금패가 됐단 말이냐? 동천패면 실력은 차치하고 공을 얼마 세우지도 않았을 텐데?”
강엽이 대형 의뢰만 받았다는 것을 모르기에 품을 수 있는 의문이었다.
실력과 운 덕분에 몇 만 냥이 넘는 의뢰들만 골라서 받으니 금방 승급 요건을 채울 수밖에.
“낭인전의 기강이 말이 아니군.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낭왕이 낭인전의 규칙을 어그러뜨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간 사람이 말이 많아.”
하긴 자기 발로 나간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도 보기 좋은 일은 아니었다.
우문극이 코웃음을 치며 검을 빼들었다.
“그래, 네놈 말대로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덤벼라, 애송이. 진짜 금패의 무서움을 보여주마.”
말은 그렇게 해도 얕볼 생각은 없는지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강엽도 요구하지 않았다.
“.......”
기수식을 취한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다 동시에 사라졌다.
* * *
카카카카카카캉!
번갯불처럼 불똥이 튀고 경파가 터진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사결을 관전하던 팔사도의 얼굴에 흥미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오호라.”
삼화취정에 오른 그녀의 눈엔 두 사람의 움직임이 또렷이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둘 다 쾌검을 다루고 있었다.
“자색 검날... 사천에 그런 검을 쓴다는 검호가 있다는 소문은 얼핏 들었는데....”
“자성검호라고 있었지. 그 친구의 제자다.”
그 중얼거림에 낭왕이 호응했다.
십 장이 넘게 떨어진 두 사람이지만 나직한 목소리도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마냥 또렷하게 들렸다.
팔사도의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 이제 기억나는군요. 그래요. 그런 이름이었죠.”
두 사람의 대화를 우문극도 들었다.
그의 입매가 악다물렸다.
‘제길, 무슨 놈의 반탄력이...!’
꽤 강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상상 이상이다.
검을 부딪칠 때마다 암경이 손목을 찌르르 울리는 게 아닌가?
촤악! 쐐애애액!
파공성보다 자색 검광이 빨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목을 찔러가고 있었다.
비스듬히 틀며 검세를 비껴낸 우문극이었지만 간담이 서늘해졌다.
‘호신기가....’
일검에 종잇장처럼 찢겨나간다.
그때 강엽이 찌른 자세 그대로 역수로 검파를 잡더니 횡으로 베었다. 제대로 힘을 가할 수 없는 자세였지만 우문극은 방심하지 못했다.
터어엉!
빠른데 묵직하기까지 하다.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웬만한 고수들의 검격을 상회했다.
하지만 우문극 역시 금패급의 고수.
귀주성의 야차마곤이 그랬듯 중단전을 열고 정과 기를 공명시키는 경지에 이르렀다.
“흐아압!”
진각을 밟자 지면이 흔들렸다.
검격을 이어가려던 강엽이 멈칫하는 찰나 그가 눈을 빛내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종아리의 비복근에서부터 발경력을 끌어올려 한순간 가속한 신형이 강엽의 면전에 치닫는다.
십(十) 자의 검세가 강엽의 몸뚱이를 찢어버렸다.
팔사도와 함께 비무를 관전한 광명마교도 한 명이 소리쳤다.
“해치웠나!?”
“저런.”
낭왕이 실소를 내뱉었다.
“싸울 때 그 소릴 하면 재수 옴 붙는다는 말도 못 들어봤나?”
그의 말처럼 강엽의 몸이 찢어진 것은 착시였다. 우문극이 벤 것은 암신의 허상이었으니까.
진짜는 우문극의 배후에서 장력을 격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화아아아악!
한천최심장의 한 수.
한순간 등을 덮친 한기에 놀랄 만도 하건만 우문극은 별다른 동요 없이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한기가 그의 몸을 침범하지 못하고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때 팔사도가 봉목을 부릅뜨며 경고했다.
“조심!”
말뿐이라도 무인의 대결에 끼어드는 것은 결례였다. 하지만 그게 우문극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급작스레 바닥을 뚫고 나온 혈목이 우문극의 뒤를 친 것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우문극보다 멀리 떨어진 팔사도가 먼저 알아챘다.
용천혈로 진기를 분사해 훌쩍 뛰어오른 우문극은 그제야 혈목을 보고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이따위 사술을....”
“마교에 투신한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소리 없이 다가온 강엽이 자성검을 휘둘렀다.
일초식 뇌령부터 이초식 뇌익까지, 빛살처럼 펼쳐진 절기가 우문극의 전신 요혈을 꿰뚫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삼초식.
-뇌아(雷牙).
파지직...!
검신을 덮은 붉은 뇌광. 급박한 와중에도 점멸하는 뇌기를 감지한 우문극은 식겁했다.
자성검법의 삼초식부터는 내공 운용법이 완전히 달라져서 뇌기가 실린다. 양갈래로 분절된 뇌검이 어금니로 짓씹듯 우문극을 삼키고....
“......!”
직후 밤의 어둠이 하얗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