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59화 (159/450)

27화. 광명 (2)

광명마교의 무리들이 낭왕의 거처를 찾은 것은 해가 가장 높이 뜨는 미시 중엽이었다.

입동(立冬)을 넘어 소설(小雪)에 접어든 시기라지만 한낮의 태양은 뜨겁기 마련.

‘저들이 광명마교로군.’

태양볕이 비교적 덜 내리쬐는 응달에 숨은 강엽은 고개를 모로 비튼 채 눈살을 찌푸렸다.

황금빛 수실로 태양을 새겨넣은 하얀 도포. 태양을 상징물로 삼은 마도 종파로서 광명마교의 교주는 금시조의 화신으로 여겨지곤 했다.

‘지금 내 힘으로 놈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일전에 하오문주와의 대담에선 광명마교를 상대할 여유가 없다고 했지만, 저들이 공세를 걸어온다면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태양의 열양지기에 근본을 둔 광명마교의 마공을 감당할 수 있냐는 것.

흑무암쇄진의 공능 없이는 낮에 활동할 수도 없는 그에게 있어 광명마교의 마공은 천적이다.

만일 흑무암쇄진으로도 막지 못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터.

‘한데 저 여자는....’

광명마교의 무리 한가운데에 있는 색목인 여인.

나이가 젊은데도 삼화취정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단전의 축기량 또한 범상치 않았다.

어찌나 찬란한지 초음으로도 그녀가 지닌 기운을 헤아릴 수 없었다. 흑룡교 술법으로 월등히 강해졌던 단혼마백과도 견줄 만했다.

뒤에 숨은 백서희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때?]

강엽처럼 상대의 내공 수위를 가늠할 능력은 없지만, 그녀 역시 여인의 힘을 짐작했는지 하얀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쪽에서 광명마교의 무리가 있는 곳까지는 제법 멀지만 방심할 수는 없는 상황.

[밤에 싸워도 승산이 없어.]

[역시....]

[그보다 하오문주는?]

[안쪽에서 걱정하고 있어.]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목옥에서 멀지 않은 작은 동굴의 앞이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싸움이 났을 때 하오문주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목만 잡아챌 공산이 컸다.

최악의 경우엔 사로잡혀 낭왕을 압박할 인질로 쓰일 수도 있는 일.

하오문주 역시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기에 괜한 객기를 부리는 대신 순순히 피신했다. 낭왕이 호위로 붙여준 연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만약엔 낭왕을 도와달라고 하더라.]

천하팔존 중 한 사람을 누가 감히 해하겠나.

그러나 상대가 광명마교라면 천하의 낭왕이라도 방심할 수 없었다.

[도와줘도 돼?]

[그걸 왜 나한테 묻는지 모르겠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동료로서 같이 다니지만 강엽은 타인의 행동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았다. 작전에 지장이 가지만 않는다면 그들의 의지에 맡겼다.

[하오문주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한 거 아니냐. 그녀를 돕고 싶다고 생각했으면 나한테 허락받을 필요 없어.]

하오문주가 백서희에 대한 감정을 털었다지만 백서희는 아니었다.

언제나 위풍당당했던 그녀가 하오문주 앞에선 위축되었다.

[걱정 마라. 너 혼자 싸우게 두지 않을 테니까.]

[어? 하지만 지금은....]

[여차하면 흑무암쇄진을 쓸 거다. 이번 기회에 흑무암쇄진이 광명마교의 기운을 막을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빚을 진 건 너만이 아니야.]

강엽 또한 빚을 졌다.

낭왕에게 한 달간 가르침을 받으며 이룩한 성과는 족히 몇 달은 고생해야 얻을 수 있는 성과.

유불리를 떠나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낭왕을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또한....

‘슬슬 피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고.’

흑룡교에서 흡혈을 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배가 터지도록 피를 마신 덕분에 당분간 흡혈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슬슬 피를 보충해야 할 시점.

삼화취정에 오른 괴물같은 여자는 차치하더라도, 미리 피를 마셔둬야 흡혈욕을 억누를 수 있다.

물론 저들이 싸우지 않고 얌전히 돌아가는 게 가장 낫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일단 지켜보자고. 놈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 * *

목옥에 있는 것은 낭왕 혼자뿐.

그와 광명마교의 무리가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낭왕이 누군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낭인전은 나가기로 한 게냐?”

“송구합니다.”

신무검 우문극, 복건성의 금패가 작게 읍소하며 금패를 뺐다.

“원칙대로 낭인패는 돌려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담담한 기색을 가장했으나 딱딱해진 안면근육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노릇.

긴장감이 역력해진 전직 낭인은 자신의 강호 인생이 녹아든 증거를 공손하게 바쳤다.

그러나 낭왕의 손이 금패를 잡는 일 따윈 없었다.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정녕 후회하지 않겠느냐?”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그런가.”

전직 낭인의 목소리에서 단호한 결의를 읽은 낭왕은 그제서야 낭인패를 집어들었다.

“낭인전의 규칙대로 네가 낭인전에 돌아오더라도 금패는 반환되지 않을 것이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 것이 낭인전의 기풍.

하나 무조건 관대한 건 아니다. 한번 떠나는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막진 않되, 그렇게 돌아온 사람은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금패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가라. 이제부터 우린 남남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강호식대로 두 손을 모아 포권으로 예를 갖추었다.

낭왕이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리자 분분한 걸음으로 물러나서 본인의 진영에 합류했다.

그리고 같이 온 색목인 여인을 소개했다.

“인사 나누시지요. 본교의 신인을 보필하는 여덟 번째 사도이십니다.”

“호오, 사도라고...?”

낭왕뿐만 아니라 청력을 기울여서 대화를 엿들은 강엽과 백서희도 놀란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때 색목인 여인이 빙긋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살짝 고개를 조아렸다.

“천하를 오시하는 낭왕을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금영낭랑(金英娘娘) 야율진진입니다. 미욱한 몸이지만 과분하게도 본교의 팔사도를 맡고 있습니다.”

“야율...?”

사도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흥미만 보였던 낭왕의 눈이 커졌다.

강엽도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야율산산?’

지난날 흡혈귀가 되었을 때 함께 싸운 색목인 소녀.

하얀 털옷을 입은 북해의 무인들이 소궁주라 부르며 떠받들었던 소녀와 같은 성씨였다.

“특이하군. 내 알기로 야율 씨는 빙궁의 직계들이 쓰는 성씨인데... 그쪽 사람이었나?”

“과연 낭왕. 북해빙궁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마누라 덕분이지.”

“우문 형제에게 들었습니다. 하오문주님을 반려로 두셨다지요? 그분도 뵙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자리를 비웠다. 명색이 일문의 문주인데 일년 내내 서방놈 수발만 들 순 없지 않나.”

“그런가요?”

팔사도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서렸다. 낭왕의 거짓말을 꿰뚫어보듯 의미심장했다.

“뭐, 그분은 나중에 다시 찾아뵙기로 하고... 전주님의 말씀대로 전 빙궁의 혈족입니다. 하나 오래전에 빙궁을 나와서 연을 끊었지요. 야율이라는 성을 쓰긴 하지만 지금의 전 광명신교의 팔사도일 뿐.”

광명마교의 교도들은 절대 자신들의 이름에 ‘마(魔)’를 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거룩한 신앙을 마교로 매도하는 자들에게 철퇴를 가한다.

물론 낭왕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럼 지껄여봐라. 광명마교의 광신도 새끼들이 뭔 이유로 내 집을 찾아온 게냐?”

“.......”

팔사도가 고운 입술을 다물고, 교도들의 눈초리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우문극이 곤혹스러워했다.

“전주님, 본교를 마도로 몰아가시면 곤란합니다.”

“지랄도 풍년이구나. 마교를 마교라고 부르는 게 뭐가 잘못이냐? 네놈들이 모시는 금시조의 화신이 부처나 원시천존이라도 된다더냐?”

자신들의 신앙을 모독하는 자는 천하팔존이든 뭐든 달려들고 보는 게 마교도들의 본성이었다.

하나 교도들이 발끈하기 전에 팔사도가 먼저 기파로 그들의 경거망동을 억눌렀다.

“흐읍!”

“진정하세요, 형제들이여.”

나긋한 목소리에 모든 이가 즉시 복종하고는 병장기에 올려둔 손을 내려놓는다.

자신을 노려보는 교도들의 눈초리에 낭왕의 입술 사이로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냥 덤비지 그러느냐? 이 몸은 네놈들의 성질을 긁는 걸 멈출 생각이 없다만.”

우우우우우웅-!

근육으로 꽉 찬 거구가 일어나자 묵직한 파동이 일대를 찍어누른다.

광명마교의 교도들이 잇몸을 꽉 물고 버텼지만, 낭왕의 존재감은 그들의 저항을 사정없이 분쇄했다.

“크억!”

“쿨럭! 쿨럭!”

침음성과 함께 피를 토하는 자들이 속출한다.

억지로 버틸수록 피해가 컸다. 알량한 기개로 버틴 자들은 무릎이 하중을 버티지 못했다. 슬개골이 부러져 무릎을 꿇지도 못하고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유이하게 버틴 것은 팔사도와 전직 금패급 낭인인 우문극 두 사람뿐. 심지어 우문극마저도 땀을 뻘뻘 흘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아무렇지 않게 기파를 버틴 것은 팔사도가 유일했다.

“야율 씨를 쓰는 처자만 좀 버티는구나. 사도의 지위를 골패로 딴 건 아닌 모양이야.”

“그만두시지요. 저희는 싸우러 전주님을 찾아뵌 게 아닙니다. 교주님의 전언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호오, 금시조의 화신이 내게 볼일이 있다?”

“예, 먼저 이것부터 거두어주시고....”

“먼저 지껄여봐라. 내용에 따라 거둘지 말지 정하마.”

“...그러지요.”

시간을 끌어봤자 교도들이 죄다 낭왕의 기파에 눌려 압사당할 따름.

입술을 핥으며 사이를 둔 팔사도가 말했다.

[본좌는 금시조의 화신으로서 예토(穢土)의 비극을 애달파하며 매일밤을 한숨으로 지새웠노라.]

“음?”

낭왕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고왔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울리는 게 아닌가?

“광명마교의 교주인가?”

[황제는 방사들에게 둘러싸여 국정을 등한시하고, 조정은 뇌물과 권력투쟁에만 관심이 있을 뿐 민생을 돌보지 않는다.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데, 흉년과 역병까지 창궐하고 있다. 장성 이북에선 북로가 판치고 동해에선 남왜가 판치지.]

“.......”

[흑룡교는 전쟁으로 천하를 잿더미로 만들었을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고, 혈교는 오래전에 죽은 망자를 미륵불로 섬기며 중생을 현혹할 뿐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였다. 일월신교는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저들끼리 다투고 있느니라.]

“.......”

[오직 본좌만이 이 그릇된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니. 떠돌이들의 궁궐 주인이여, 방황을 끝내고 본좌와 함께 천하를 논하자꾸나. 팔존에 오른 그대라면 본좌와 같은 눈높이로 천하를 볼 수 있으리라.]

“개소리도 참 개떡같이 하는군.”

팔짱을 낀 낭왕의 잇새로 피식 웃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다른 삼마교가 죄다 안 될 놈들이니 오직 자기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일단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그렇다 치자. 내가 보기엔 원래 세상은 이 모양 이 꼬라지였지만, 네놈 말대로 살기 좋은 세상은 아니니까. 하지만 네놈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오느냐?”

[이 세상에 몽상정토(夢想淨土)를 만들 것이다.]

“몽상... 뭐?”

[모든 중생은 몽상정토에서 복락을 누리리라. 빈자와 부자, 귀족과 천민, 강자와 약자... 그 모두가 진정한 낙원에서 육신의 허물을 벗고 꿈을 꿀 것이다.]

“...그게 뭔 소리냐?”

[안타깝도다. 팔존이라 불리는 그대도 시대의 한계에 갇혀 이상향을 그리지 못하는가.]

“아니, 이놈아. 뭘 알아듣게 설명해야....”

낭인전의 주인으로서 대방파를 경략한 낭왕조차 광명마교의 교주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교주는 제 멋대로 떠들어댔다.

[모든 중생은 몽상정토에서 누구에게도 종속받지 않고 안온한 삶을 누릴 것이다. 몽상정토가 그들의 현실이요, 천하가 될 것인즉.]

“으음.”

[낭왕이여,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좋다. 시간이 지나면 알 테니. 그대가 본좌의 대업에 공감한다면 우린 술잔을 나눌 수 있으리라.]

“글쎄, 그때가 되기 전에 네놈들이 토벌당할 것 같다만. 보아하니 세상을 뒤집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인데, 귀 후비고 똑똑이 새겨들어라.”

[세이경청하지.]

“세상을 뒤집고자 한다면, 세상의 반동을 견뎌내야 하는 법이다. 강호 무림만이 아니야. 세상 전체가 네놈들을 거부할 것이다.”

[.......]

“대충 알아들은 모양이군. 그럼 꺼져라. 네놈과 말을 섞으면 내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으니까.”

파리 쫓듯 휘젓는 낭왕의 손.

직후 낭왕은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도의 몸을 이용해서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건가....’

필시 광명마교의 사술이겠지만, 새삼 교주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과거 정마대전을 일으켰던 흑룡교주는 천하팔존 세 명과 싸웠다.

광명마교주가 당시의 흑룡교주와 동급이라면 그 힘은 당대의 천하팔존 이상.

“으음...!”

어느새 본인으로 돌아온 팔사도는 약간 머리가 아픈지 나직이 신음했다.

그녀가 뚱한 표정을 짓는 낭왕을 보며 혀를 찼다.

“유감이군요. 교주님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다니.”

“뭣도 모를 개소리를 진심이라고 하는 것부터가 글러먹은 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싶으면 좀 알아듣게 설명하든가.”

“말 그대로입니다. 본교는 이 땅에 지상낙원을 만들 겁니다. 복건성이 그 시작이지요.”

우문극에게 접근한 것도 그래서였다. 복건제일의 무가인 우문세가의 가주로 만들어 정파 세력의 저항을 줄이고 복건성을 광명마교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조만간 강동 일대가 본교의 손에 떨어질 겁니다. 낭인전으로선 유감이겠군요.”

“무슨 헛소리냐?”

“본교의 관할에선 장사를 못할 테니까요. 본교의 광휘가 미치는 곳에선 무림인들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치안은 본교가 책임을 집니다.”

“무림을 억압하겠다고 들린다만?”

“칼을 찬 무뢰배들이 설치면 고통받는 건 중생들입니다. 본교의 관할에 있는 모든 낭인전 분타를 철수하시는 걸 권고하겠습니다.”

“오만한 말을 잘도 지껄이는군.”

“아무래도 입장이 계속 평행선을 달리는군요.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리가 부러진 교도들을 돌아보는 팔사도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가 불편한 형제들을 수습해서 아래로....”

“잠깐.”

낭왕의 목소리가 말을 막았다.

팔사도가 의아해하며 돌아보자 그가 턱짓으로 다리를 후들거리는 우문극을 가리켰다.

“저놈은 놓고 가라.”

“전주님?”

“낭인전을 나간 건 그렇다 치자. 남기 싫다는데 무슨 수로 말리겠느냐? 하지만 깔끔하게 나가야지. 금패의 지위를 악용해서 내 집에 마교도들을 끌어들인 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뜻밖의 말에 우문극의 얼굴은 해쓱해졌고, 팔사도는 눈썹을 역팔자로 치켜떴다.

“그를 죽일 생각이십니까?”

낭왕이 살의를 품었다면 팔사도가 나서도 우문극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팔사도의 입장에선 교도가 된 우문극을 내줄 수 없다. 그건 위신의 문제였다.

“걱정 마라. 설마 내가 손을 쓸까. 요즘 쓸 만해서 키우는 놈이 있다. 신진 금패급이지.”

“저 위에 있는 자로군요.”

강엽은 기척을 숨겼지만 팔사도는 그가 숨은 곳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낭왕이 우문극을 돌아봤다.

“네 녀석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이기면 살 것이고, 지면 죽을 것이다.”

“팔사도님.”

우문극이 팔사도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팔사도는 예상 외로 매정했다.

“낭왕 본인도 아니고 신진 금패급이라면 우문 형제가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본교와 함께하시려면 이 정도 시련은 극복하셔야 합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우문극이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팔사도가 낭왕을 보았다.

“우문 형제는 전주님의 기세를 받아내느라 만전이 아닙니다. 이대로는 공평한 싸움이라고 볼 수 없겠지요? 시간을 좀 주셔야겠습니다.”

“좋아. 해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주마.”

낭왕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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