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광명 (1)
백서희는 하오문주와 여전히 서먹서먹했지만, 진솔한 대화를 나눴기 때문인지 처음보단 나아졌다.
강엽과 그녀가 황산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한 달.
처음엔 이토록 오래 머물 줄 몰랐다.
‘끽해야 며칠 있다 돌아갈 줄 알았는데.’
하지만 강엽과 낭왕의 싸움이, 정확히는 대련을 빙자한 가르침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 부분은 하오문주도 의외였다.
“그이가 재미 들린 모양이에요. 어제 대화를 나눴는데 강 무사가 마음에 든다고 하더군요.”
“그, 그래요?”
“네. 가끔 금패급 낭인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긴 하는데 이렇게 오래 머문 사람은 처음이거든요. 길어봤자 사나흘 정도인데....”
낭왕은 가르침에 인색한 사람이 아니다. 성명절기만 빼면, 그리고 배움을 갈구하는 사람이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면 얼마든지 가르침을 베푼다.
그 역시 젊은 시절엔 기인이사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가르침을 청한 과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경험 때문에 그는 낭인들이 얼마나 무공에 목마른지 잘 알고 있었다.
낭인패의 등급별로 무고를 열람할 기회를 준 것도 그 일환이었다.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감안해도 무공을 보급하는 게 낭인전의 전력에 보탬이 된다고 판단한 것.
거기까지 말한 하오문주의 입가에 문득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뭐... 그래도 강 무사는 좀 특별하지만요.”
워낙 이례적인 경우라서 그녀도 단 둘이 있을 때 낭왕에게 물어봤다.
낭왕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강 무사는 굴리는 맛이 일품이라고 하더라고요.”
백서희의 표정이 묘해졌다.
‘확실히....’
매일 수련을 끝내고 돌아오는 강엽의 얼굴이 산송장처럼 초췌했던 것이다.
재생력 덕분에 부상은 없었지만, 허옇게 질리다 못해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낯빛만 봐도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 만했다.
웬만한 고수들보다 강건한 강엽이 이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랴?
낭왕은 가르침에 인색하진 않을지언정 세상 친절한 스승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나저나 강 무사가 익힌 무공도 독특하군요. 밤에만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공이라니.”
하오문주는 강엽의 족쇄를 무공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강엽이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으니까.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한 백서희는 대답 대신 멋쩍은 미소만 머금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강 무사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가 낮에 활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무수한 추측이 나돌고 있어요. 강호에서 오래 살면 은원도 많이 쌓이니 그 부분은 보완해야 할 거예요.”
“아, 네. 강엽도 알고 있을 거예요.”
제한적이긴 하지만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수단도 마련하지 않았나.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쓸 수 없을 뿐이지.’
흑무암쇄진은 어디까지나 목격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때만 쓸 수 있는 비기.
군웅들 앞에서 쓰면 흑룡교의 잔당으로 몰리기 딱 좋았다.
‘다른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그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문주님,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죠?”
헐레벌떡 들어온 연이 인사도 없이 엄지손가락만한 전통을 건네자 하오문주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무슨 일이죠?”
“연이 한 말 그대로예요. 아래 있는 문도들이 급보를 보낸 거죠.”
“이 밤에요?”
“특별히 훈련받은 전서구들이 있거든요. 그 아이들은 밤에도 날아다닐 수 있어요.”
마개를 열자 작은 종이가 나왔다. 길쭉한 쪽지에 깨알같은 글씨로 뭔가가 적혀 있었다.
백서희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혹시 알아선 안 되는 거라면....”
사실 하오문의 암어로 적혀 있기에 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오문의 일이라면 외인은 자리를 피해주는 게 도리였다.
그러나 하오문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백 소저도 알아야 할 것 같군요. 조만간 손님이 올 거예요. 광명마교의 복장을 입은 자들이 아랫마을에 왔다고 해요.”
“광명마교요?!”
백서희도, 연도 전율했다.
물론 황산이 속한 휘주 일대가 광명마교가 세를 떨친 복건성과 가깝기는 하다. 그러나 천하팔존이 있는 곳에 마교가 온다니?
“우연은 아니겠죠?”
“황산의 경치를 보려고 온 게 아니라면요.”
황산이 천하제일경으로 손에 꼽히기는 하나, 마교도들이 한가하게 명승지나 구경할 리가 만무했다.
그때 연이 의문을 제기했다.
“하나 저들이 어떻게 알고 온단 말입니까? 낭인전에서도 전주님이 계신 곳을 아는 것은 금패급을 비롯해서 극소수의....”
거기까지 말한 연의 입이 갑작스레 다물렸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정답이 있음을 깨달은 그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맙소사, 설마...!”
“그 설마가 맞아요.”
하오문주의 얼굴도 깊은 시름에 잠겼다.
“복건성의 금패가 광명마교에 가세했어요. 그가 광명마교를 안내하고 있다는군요.”
“지금 당장 알리고 올게요.”
강엽과 낭왕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한창 치고받고 부딪치고 있었다.
“네, 부탁해요. 그들이 바로 황산에 오르진 않겠지만... 이르면 내일 아침엔 올 거예요.”
“일부러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올 수도 있습니다.”
연이 급하게 의견을 보탰다.
“광명마교는 양기가 극대화됐을 때 가장 강해지는 자들. 저들이 자신들이 유리할 때 온다면 강 무사님은 싸우기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광명마교의 이름은 익히 들어봤지만 그런 족속일 줄이야. 태양이 중천에 걸렸을 때 강해지는 놈들이라니.
하오문주가 진지하게 말했다.
“연의 말대로예요. 광명마교가 그런 무공을 익혔기 때문에 옛날엔 흑룡교와 앙숙이었어요. 빛을 싫어하는 흑룡교와 달리 광명마교는 빛을 추종해서 상극이었거든요.”
강엽의 무공은 흑룡교의 무공이 아니다. 그렇지만 낮에 힘을 쓰지 못하는 이상 광명마교의 무공은 천적이었다.
* * *
쿠구구구궁......!
지축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솟는다.
손도 까딱할 힘을 잃은 강엽은 대 자로 뻗은 채 남색으로 물드는 새벽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력은 물론이고 체력까지 떨어졌다. 입에선 단내가 풍기고 식은땀이 온몸을 절였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분이 이러할까?
차라리 부상을 입었다면 재생력으로 회복했을 것을, 몸은 멀쩡한데 기력을 한계까지 쥐어짜니 재생력이고 뭐고 쓸모없었다.
“에잉, 젊은 녀석이 그거 했다고 뻗는 게냐? 하여간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구나. 겨우 세 시진밖에 싸우지 않았건만. 그렇게 약해서 밤일은 할 수 있냐?”
“....”
어느새 머리맡까지 다가온 낭왕의 통렬한 일침에 강엽은 울컥했다.
천하의 낭왕이 한계까지 몰아붙이는데 세 시진을 싸우고도 멀쩡한 사람이 어딨단 말인가?
‘젠장, 낭왕만 아니었으면...!’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낭왕의 가르침이 효과적임을 부정할 순 없었다.
매일 겨루면서 한계를 넘나든 덕분에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으니까.
낭왕은 적수공권은 물론 각종 병장기를 십분 활용했고, 그 덕에 매일 새로운 상대와 맞상대를 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와중에 자성검법의 삼초식과 사초식을 연달아 깨우친 것은 그야말로 천우신조.
형(形)과 식(式)이야 진작에 꿰뚫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오의를 깨닫진 못했는데, 낭왕은 강엽을 요리조리 굴리면서 막힌 부분이 뚫릴 단초를 준 것이다.
이로써 자성검법 칠초식 중 전반 사초식을 손에 넣었다. 보름에 하나씩 한 초식을 깨달은 셈.
게다가 자성검법뿐만 아니라 다른 무공까지 덩달아 강해지고 있었다.
조법과 박투술, 경신에 이르기까지. 낭왕은 강엽이 익힌 무공의 허실을 꿰뚫어보고 조언을 해주었다.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준 것은 아니나, 화두를 던지거나 강엽과 겨루면서 깨달음을 유도했다.
덕분에 강엽은 자신도 몰랐던 허점을 메우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래서 사부가 필요한 건가?’
자성검호를 사부로 모시긴 했지만 얼마 안 있어 귀천했기 때문에 배움의 시간은 짧았다.
진조가 가르쳐준 것은 흡혈귀의 능력을 활용하는 법에 국한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강엽이 누군가에게 무공을 사사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숨을 고르는 강엽에게 문득 낭왕이 물었다.
“한데 네 녀석은 무공도 익히고 술법도 익혔잖나? 그걸 합치려는 시도는 안 해본 게냐?”
“글쎄요.”
강엽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술법과 무공을 혼용해서 쓰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낭왕의 말뜻은 그것과 달랐다.
무공과 술법을 따로 쓰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합쳐서 같이 구사하라는 것이었으니까.
낭왕이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흑룡교주를 비롯해서 과거 강호에 나타났던 마교주들은 술법과 무공을 같이 썼다. 구파 중 몇몇 고수들도 무맥과 도맥을 섭렵했지.”
이를테면 초식을 구사하며 술법을 일으키거나, 술법과 내공을 조화해서 개세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걸 추천하진 않지. 하지만 네 녀석은 이미 무공과 술법을 두루 익혔잖느냐?”
한 우물만 파도 대성하기 힘든데 두 개를 같이 파면 어찌 되겠나.
하나 진조의 영성을 지닌 강엽은 다른 무인들이 몇 달, 몇 년을 헤맸을 벽을 금세 넘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고 나서야 자신이 지나온 길에 벽이 있었음을 깨달았을 정도였다.
“뭐, 한번 생각은 해보거라. 정 안 되면 지금처럼 무공을 주로 쓰되 술법은 곁가지로 익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어떤 의미에선 그게 나을 수도 있다.”
“예, 한번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럼 다시 하.... 음?”
낭왕이 말하다 말고 어딘가를 바라보자 강엽도 시선을 돌렸다.
젊은 시절 온갖 음흉한 임기응변을 섭렵한 낭왕은 말하는 도중 갑자기 기습하거나, 싸움이 끝났다고 한 뒤에 방심한 틈을 노려 허를 찔렀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러 한눈을 파는 게 아니었다.
“잠깐만요!”
날랜 경공으로 가파른 기암절벽을 척척 올라온 백서희가 소리쳤다.
낭왕이 묻기도 전에 고개를 숙인 백서희가 냉큼 외쳤다.
“수련 방해해서 죄송한데, 아래에서 하오문이 급전을 보냈어요! 광명마교의 무리가 오고 있대요!”
“...!”
두 사람의 안색이 변했다.
* * *
“저기가 낭왕의 거처로군요.”
“그렇습니다, 사도님.”
“흐음.”
하얀 섬섬옥수가 미려한 턱선 위를 짚었다.
그녀, 광명마교의 팔사도(八使徒)는 기암괴석이 줄을 잇고 선 풍광을 보며 나직이 경탄했다.
“낭왕께선 참 산수가 빼어난 곳에서 사시는군요? 이런 곳에서 살면 마음도 평온해지겠어요.”
“하하, 사도께서 이리 황산을 마음에 두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음만 먹으시면 얼마든지 이런 곳에서 사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럴 수야 있나요. 사도는 신성한 복음을 전도하는 시종들. 무릉도원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험한 곳을 찾아야 하는 신분입니다.”
잡티 없이 깨끗한 하얀 도복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황금을 뽑아 만든 듯한 영롱한 금발과 함께.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걸린 태양을 슬쩍 올려다본 팔사도의 입술에 고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마침 날씨도 좋군요. 오늘은 일진이 좋을 것 같단 예감이 듭니다.”
“속하가 앞장서겠습니다, 팔사도님.”
짧은 수염을 기른 사내가 안내를 자처했다.
팔사도가 말갛게 웃었다.
“신무검(迅武劍) 형제가 있어 든든합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사내는 팔사도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도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신무검 우문극.
복건성 제일무가인 우문세가의 서자로 일찌감치 가문 내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낭인전에 투신하여 금패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사내였다.
가문을 나왔지만 사이는 나빠지 않았기에, 그가 금패까지 오르는 데는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낭인전의 금패가 아니라 광명마교의 일원이었다.
‘이 자리에 이들을 데리고 와도 괜찮은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낭왕이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여덟 명의 절대고수 중 한 명. 초절정의 벽을 넘어 그 이상에 오른 무림의 절대자.
낭인전을 나온 것도 모자라 광명마교의 인사들을 대동하면 사람 좋은 낭왕도 심기가 뒤틀릴 터.
비록 싸우러 온 게 아니라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절대고수의 진노를 사면 제 명에 죽지 못할 테니까.
하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광명마교에 투신한 것은 정답이었어.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다.’
낭인으로서의 삶에 환멸을 느낀 것은 아니다. 금패로서 벌어들이는 수입과 명예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우문극은 언제나 그 이상을 원했다. 그렇기에 광명마교가 손을 내밀었을 때 망설이지 않았다.
광명마교의 힘을 빌어 배다른 형님인 가주를 죽이고 가문을 집어삼켰다. 저항하는 조카들과 가신들을 광명마교의 뇌옥에 처박고 그들의 자리에 광명마교의 인사를 앉혀서 가문을 장악했다.
광명마교의 도움으로 가주가 되었으니 그들의 명령을 어길 순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젠 광명마교와 한 배를 탄 처지였다.
‘그래, 설령 낭왕이 분노해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 여자가 있으니까....’
우문극이 팔사도를 힐끔거렸다.
겉모습만 보면 고아한 색목인 미녀지만, 그 힘은 혈교의 교왕과 그 옛날 무림을 공포로 물들인 흑룡교의 구천호법과 맞먹는 존재.
삼화취정의 초고수가 교도들을 독려했다.
“자, 가봅시다. 형제들이여. 낭왕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