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낭왕 (1)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나?’
언제까지 가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마중을 나온 것만 봐도 확실하다.
낭왕은 강엽의 행선지를 손금처럼 보고 있었다.
노주를 떠난 이후부터인지 아니면 도중에 들른 의창에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연락망이 촘촘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
거주지를 주기적으로 옮긴다는 걸 보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살아가는 사람 같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산세가 워낙 험해서 밤눈이 밝아도 삐끗하면 추락할 수 있습니다.”
횃불을 든 연이 충고했다. 날랜 몸놀림을 자랑하는 무림 고수들도 발을 헛디디면 낙상을 입을 수 있었다.
“우린 걱정마시오.”
밤에 더 감각이 민감해지는 강엽은 말할 것도 없고, 백서희도 어둠은 익숙했다.
흑접에서 살수 수련을 받을 당시엔 눈과 귀를 막고 암기를 피하는 훈련을 수없이 했기 때문.
황산의 산세가 험하다고 해도 두 사람이 연에게 뒤쳐지거나 산비탈을 구를 일은 없었다.
연도 그걸 알기 때문에 무어라 한마디 보태는 대신 엷은 미소만 머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길이 엇갈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두 분이 어느 쪽으로 올지 몰랐거든요.”
“안 그래도 궁금했소. 우리가 오는 건 어찌 알았소?”
“하오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항간엔 알려지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하오문은 낭인전의 동맹입니다.”
“하오문과 낭인전이 손을 잡았다고?”
백서희도 놀라서 물었다.
하오문이 자신들을 감시했다는 것보다도 두 방파가 동맹이라는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아, 예. 근데 오해는 안 하셨으면 합니다. 낭왕께서 두 분... 정확히는 귀영의 동태를 감시해달라는 의뢰를 하신 건 아니니까요.”
“그럼 어떻게 된 거요?”
낭인전이 의뢰도 안 했는데 하오문이 자신들을 왜 감시한단 말인가.
“하오문주님께서 위에 계십니다.”
“엥?”
백서희의 눈이 둥그레졌다.
연의 입가에 짙은 쓴웃음이 떠올랐다.
“황산 주변 이십여 리에 걸쳐 하오문의 비선이 가동되었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빨리 하오문주님께 보고하기 위해서지요.”
비선이 가동되면 가히 천라지망 뺨치는 감시망과 연락망이 구축된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
이 안에서 요주의 인물을 발견하면 즉시 보고된다.
“.......”
상상을 초월한 규모의 철통 호위에 강엽과 백서희 모두 말문이 막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강엽이 물었다.
“하지만 우리가 얼굴을 보자마자 알 만큼 유명하진 않을 텐데?”
몇 가지 사건으로 이름을 알리긴 했어도 하오문의 눈에 들 만큼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백서희도 덩달아 의문의 눈길을 보내자 연이 겸연쩍게 뺨을 긁적였다.
“하하, 그게... 하오문주님께서 귀영께 관심을 가지신 모양입니다.”
“강 무사라고 부르시오.”
강엽이 호칭을 정정하자 연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강 무사님.”
“하오문주가 내게 관심을 가진 게 낭왕 때문인 것 같은데 맞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낭왕에게 자신에 대한 것을 듣고 관심을 가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러나 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하오문주님께서는 전부터 강 무사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하오문주님께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던 차에 강 무사님께서 조만간 올 거라는 전주님의 말씀을 듣고 비선에 언질을 주신 겁니다.”
“어떻게 된 거래?”
백서희가 뭔가 아느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강엽이라고 알 리가 없었다. 연을 돌아봤지만 그 역시 입을 다물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이상 말하는 것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듯이.
다만 강엽은 그가 말하지 않은 뒷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백서희를 슬쩍 돌아보자 그녀도 같은 생각인지 작게 고갯짓을 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묵은 아랫마을 객잔 중에 하오문의 분타가 있었던 모양인데....’
온갖 군상이 다 모이는 곳이 하오문이었다.
점소이, 기녀, 소매치기, 도박꾼, 노점상, 농꾼, 심지어 부잣집에서 일하는 하인까지.
세상 모든 군상을 아우르기에 하오문이 개방과 함께 강호 제일의 정보상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하오문주가 강엽의 용모파기를 구했고, 그걸 비선에 돌렸다면 인근의 하오문도들이 강엽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가 노주에서 출발했을 때부터 소식이 들어갔을지도.’
정보상인으로서 개방과 쌍벽을 이룬 하오문의 역량이라면 두 사람의 동선을 손금 보듯 들여다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어둠 속에 잠긴 황산의 전경을 보는 강엽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천하제일경이라 불리는 황산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 방문하는 명산이다. 산간 곳곳에 도관과 사찰이 있는 만큼 향화객들의 숫자도 많았다.
하지만 낭왕이 사는 곳은 향화객들의 발길이 닿는 곳에서 멀었다. 주봉인 연화봉이나 천도봉도 피하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에 집을 마련했다.
오목하게 들어간 골짜기 안에 숨겨진 작은 목옥.
얼핏 보면 약초꾼이나 사냥꾼이 살 법한 허름한 집에 천하팔존인 낭왕이 살고 있는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말씀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소.”
“예?”
강엽이 자세히 말하기도 전에 목옥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사람의 인영이 나왔다.
“무, 문주님?”
“어서 와요, 두 분.”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평범한 시골 아낙처럼 무명옷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인.
하지만 강엽은 그녀의 차림새가 아니라 정체 때문에 경악했다.
“사원루주?”
“...!”
여기서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지난날 흑접의 살수로서 사원루에 쳐들어갔던 백서희의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오랜만이에요, 강 무사님. 그리고....”
사원루주, 아니, 하오문주 손가향의 눈이 강엽의 옆에 있는 백서희에게 향했다.
“제 생각이 맞다면 그쪽 소저가 려아를 노렸던 살수 같군요.”
백서희를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강엽에게 사로잡힌 뒤에 그녀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쌍검을 쓰는 흑접의 칠호. 흑접이 멸문한 뒤에 당신이 사라진 건 알고 있었어요. 어차피 다 끝난 일이어서 굳이 당신을 찾으려고 하진 않았는데... 흑룡교의 분타에서 강 무사님과 동행했지요? 그때 활약으로 섬무검예라는 별호를 얻었고요.”
“아니, 미친. 내가 쳐들어갔던 곳이 하오문주가 있는 곳이었단 말이야?”
“그 말은 당신이 칠호임을 인정하는 건가요?”
“하,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서 뭐해요? 그래요. 당신 말대로 내가 칠호였어요.”
둘 다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하오문주를 만날 줄도 몰랐는데 그게 사원루주였을 거라고 어떻게 상상하겠나.
‘무공은 익혔지만 그렇게 강하진 않은데....’
하오문주의 축기량은 삼십 년 가량. 일문의 문주라기엔 터무니없이 적었다. 좋은 심법을 구하고 영약 좀 복용하면 쌓을 수 있는 수준.
물론 내공과 무공 실력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지만, 누가 그녀를 보고 하오문주라고 생각할까.
의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신이 하오문주라면 흑접의 경고장을 받았을 때 알아서 해결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본문의 힘을 동원하면 어쩌면요. 하나 그런 짓을 하면 다들 수상하게 여겼을 테죠.”
일개 기루에 흑접을 격퇴할 만한 힘이 있다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홍가려가 표적이 되는 바람에 세간의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낭왕이 공개적으로 나설 수도 없었어요. 이런 일에 천하팔존이 나선다면 미심쩍지 않겠어요?”
“우리가 실패했다면 홍가려가 죽었을 텐데.”
“사실 그래서 처음엔 그 아이를 여기로 보내는 것도 생각해봤어요. 낭왕이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그 아이를 지킬 순 있었을 테니까요.”
우연을 가장해서 두 사람이 만난다면 제아무리 흑접이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얼씬거리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 아이가 제 예상을 깨고 도망치는 사고를 쳤고, 강 무사님이 동료분들과 함께 흑접의 살수들을 격퇴하고 그 아이를 데려왔지요. 그이는 당신들에게 한번 맡겨보라고 하더군요.”
하오문주가 그이라고 칭한 사람이 누군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이가 맞았죠. 강 무사님이 려아를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흑접까지 멸문시켰으니까요.”
“그럼 성도 분타의 낭인들이 도와준 것도....”
“그이가 넌지시 언질을 주긴 했어요. 작전에 참여했던 낭인들은 모르지만요.”
다른 분타들과 달리 성도 분타만은 동천패인 강엽이 토벌 작전을 주도하는데도 선뜻 지원했다.
당시엔 성도 분타주나 금파검 능정각이 호의를 가져서 그런 줄 알았는데, 뒤에 낭왕이 있었던 것이다.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니 허탈해졌다.
“완전히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군.”
“아뇨, 강 무사님은 그이의 예상을 깼어요. 사실 그이가 주목한 건 강 무사님이 아니라 사자염도 하후진과 청수 도장이었거든요. 염왕의 제자와 무당제일검의 제자라면 흑접과 맞붙어서 이길 수 있다고 본 거죠.”
토벌 작전이야 강엽이 주도했지만 두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낭왕의 예상과 달리 흑접주는 강엽의 손에 쓰러졌다. 하후진과 청수는 보조하는 역할에 그쳤다.
“뿐만 아니라 강 무사님은 려아를 노렸던 흉수의 정체를 밝혀내고, 귀주성의 안개 사태를 해결하셨지요. 단혼마백을 죽이고 야차마곤과 무림인들을 구하셨고요.”
강엽의 활약은 낭왕에게도 예상 밖이었다.
차라리 원래부터 강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번번이 예상을 깨더니 혈교의 교성까지 덜컥 꺾어버렸다.
“그이가 강 무사님을 부른 것도 그래서예요.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려아를 노렸던 살수와 함께 오실 줄은 몰랐지만요.”
“.......”
속내를 꿰뚫듯 한광이 서린 눈빛에 백서희는 목덜미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오문주가 그녀보다 하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리한 칼날이 심장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던 것이다.
강엽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문주.”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제 와서 그녀를 어찌할 생각은 없답니다.”
하오문주가 목옥 안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지만 저 소저가 언젠가 려아를 찾아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했으면 좋겠군요.”
“....”
그 말에 백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엽이 물었다.
“낭왕은 어딨습니까?”
“아, 그이는 곧 올 거예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오문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엽은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를 포착했다.
저 멀리서 망태기를 짊어진 채 휘적휘적 걸어오는 반백의 사내. 터질 듯한 복근을 붕대로 감싸고, 그 위에 거친 장삼을 걸친 중년인이었다.
연이 가장 먼저 예를 갖추었다.
“전주님.”
“됐다. 매일 얼굴 맞대면서 인사는 무슨.”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적거린 낭왕이 어깨에 멘 망태기를 연의 손에 넘겨주었다.
“손님들이 온다길래 물고기 좀 잡았지. 운 좋게도 튼실한 녀석들이 잡혔지 뭐냐.”
천하팔존의 권위는 때려치우기로 했는지 체신머리없이 푸흐흣 웃은 낭왕이 하오문주의 가는 허리를 잡고 입맞춤을 했다.
면전에서 일어난 뜨거운 애정행각에 백서희가 입을 헤 벌리자 하오문주가 부끄러워했다.
“상공, 손님들이 보고 있잖아요.”
“뭐 어떻소? 우리가 이런 사이라는 걸 알아야 저 아이들도 오해하지 않을 것 아니오? 아니면 낭인전과 하오문이 왜 동맹인지 일일이 해명해야 하는데?”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하오문주의 말대로 낭왕을 그이라고 부르는 걸로 두 사람의 사이를 짐작하긴 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눈으로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얼굴이 붉어진 백서희가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어우, 무진장 뜨겁네.”
“으하하, 생각보단 순진하구나. 내 여자한테 애정을 표시하는 건데 왜 네가 부끄러워하느냐?”
한바탕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린 낭왕이 엷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강엽을 돌아보았다.
“내가 낭왕 혁세기다. 넌 귀영이지?”
“강엽입니다.”
“네 이름이야 잘 알지. 옆의 처자는 쌍검을 찬 걸로 봐서 흑룡교에서 함께 싸운 섬무검예일 테고. 귀양 분타주가 입이 닳토록 너흴 칭찬하더구나.”
낭왕은 하오문주의 입을 통해서만 아니라 조직망을 통해서도 강엽에 대해 보고받은 것이다.
“한데 안사람과 얘기를 잘 했는지 모르겠다. 먼저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피해줬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낭왕께서 흑접의 토벌에 도움을 주셨다고요.”
“별거 아니었다. 내가 한 건 성도 분타주에게 서찰 한 장 보낸 게 전부지.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내 여자를 위해서였고. 이 사람이 아끼는 아이라면 내게도 딸과 같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빚을 졌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예?”
“너는 흑접을 부쉈고, 장안대상회의 대공자를 실각시켰으며, 야차마곤을 살렸다. 귀주의 낭인들도 구했지. 이 몸이 네게 빚을 진 게야.”
“....”
“일단 식사부터 하자. 자세한 얘기는 그 뒤에 나누고 말이다.”
등을 돌린 낭왕이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