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여행 (4)
가까운 포구에 정박한 배는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음 날 아침쯤에야 출발했다.
다행히(?) 비가 그친 뒤엔 날이 개서 서릉협의 풍광을 감상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장관이네. 절경이고. 완전 하늘이 주신 선물이야!”
서릉협을 구경한 백서희는 만족했다.
강엽은 절경이고 뭐고 선실문 몽땅 걸어닫고 흡혈귀생 최대의 강적을 피하느라 끙끙댔지만 말이다.
아무튼 두 사람을 태운 배는 의창에서 멈추었고, 염장한 비악채주의 수급을 낭인전 분타에 가져다주었다.
당연히 낭인전 분타는 뒤집어졌지만, 강엽이 신분을 밝히자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버선발로 달려나온 분타주가 은근하게 물었다.
“조천방과 거룡방의 전쟁에서 귀영 당신이 세운 전공은 우리 분타도 잘 알고 있소.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나랑 일해보지 않겠소?”
“제안은 고맙지만 우리가 갈 길이 바빠서.”
“아니, 그러지 말고....”
“낭왕을 뵈러 가는 것이오. 그분이 불러서.”
“...!”
낭왕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분타주는 얌전히 찌그러졌다. 거짓말이라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핑계를 대지, 낭왕을 만나러 간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빨리 처리해줬으면 싶은데....”
“아, 알겠소. 내 최대한 빨리 처리하리다.”
원래 현상금은 용모파기를 확인하고 전후사정을 알아보는 등 절차가 복잡하지만, 낭왕의 이름은 그 모든 과정을 획기적으로 줄여버렸다.
그렇게 낭왕의 이름을 팔아서 빠르게 현상금을 챙긴 뒤엔 다른 배를 타고 형주를 거쳐 동정호가 있는 악양으로 갔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는 동정호.
얼핏 보면 바다로 착각할 만큼 드넓었다. 중원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답게 웬만한 현에 필적하는 면적을 자랑했다.
그렇게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객잔을 빠져나온 강엽과 백서희는 동정호를 한눈에 굽어살필 수 있다는 악양루에 향했다.
“이게 악양루? 생각보다 크진 않네.”
“처음엔 군루(軍樓)였으니까.”
삼국지 오나라의 장수 노숙이 수군 훈련을 시찰하기 위해 지어진 망루가 악양루의 시초였다.
그 뒤로 시간이 흘러 이백이나 두보 같은 유명한 시인들이 악양루에 대한 시를 지으면서 중원삼대명루 중 하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크기만 따지면 무창의 황학루가 더 웅장할걸.”
“흐음, 황학루라....”
“가볼 만해.”
“가봤어?”
“옛날에 스승님 모시고 잠깐.”
당연히 서원에서 유학을 사사한 스승을 말함이었다.
백서희가 귀밑머리를 배배 꼬았다.
“흐응, 황학루라....”
“마침 무창도 경유하니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낭왕이 언제까지 오라고 명시한 것도 아니었다.
하후진이 숙정방을 지켜주고 있으니 서두를 것도 없고 말이다.
백서희는 물론이고 강엽도 낭왕을 만나기 전까지는 반쯤 유람이라 생각하고 즐기고 있었다.
“어때?”
“당연히 찬성이지!”
백서희의 입가에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 * *
두 사람이 장강을 따라 유람을 하는 동안.
사자머리를 한 청년은 대청에서 굴러다니면서 애벌레처럼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아, 시바. 겁나게 부럽다. 걔네들은 지금쯤 맛난 거 먹으면서 돌아다니고 있겠지?”
어쩌다 보니 숙정방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덜컥 해버렸는데 약간 후회가 들었다.
누구는 일하는데 누구는 놀고 있다니!
물론 두 사람이 놀러 간 건 아니지만, 낭왕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맛난 것도 먹고 명승지도 둘러보고 할 게 아닌가?
“그 연놈들 하는 짓을 보면 수상한데... 이러다 정분 나는 거 아닌지 몰라.”
강엽과 백서희 둘 다 부정하고 있지만 하후진은 두 사람 사이가 심상찮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깔이 달렸다면 모를 수가 없지.’
흑접을 토벌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흑룡교의 비밀 분타란 곳에서 뭔가 있었던 모양.
그게 뭔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혼자 심심하게 뒹굴거리고 있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대청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어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기척이 다가왔다.
“...하후 공자님?”
시비들을 대동한 단목정이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하후진을 보고 눈을 끔뻑거렸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
“아무것도.”
“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팔자 좋게 드러누워 개소리를 시전하는 하후진이었다.
단목정과 그녀를 따르는 시비들조차 잠시 할 말을 잊고 한심하단 시선을 보냈다.
“...으음,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그래도 일어나시는 게 좋겠군요. 매일 청소하지만 그렇게 깨끗하진 않거든요.”
“귀찮은데....”
구시렁거리면서 일어난 하후진은 그제야 단목정이 입은 노란 도복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방주는 수련하러 가쇼?”
“중요한 업무가 끝났거든요.”
귀찮고 힘든 업무를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긴 전대 방주와 달리 그녀는 어지간하면 자신이 직접 챙겼다.
청우방을 합병하면서 업무량이 폭등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수련하고 있었다.
“참 열심히 사는구만.”
“열심히 살아야죠. 한 번뿐인 인생인데.”
“그래도 쉴 땐 제대로 쉬어야 하우. 일중독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니까?”
“걱정 마세요. 쉴 땐 쉰답니다.”
단목정도 휴식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일전에 과로로 쓰러질 뻔했던 것이다.
하후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단목 방주가 어떻게 일하는지 모르고,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지만 너무 빡세게 일하는 것 같수. 눈밑에 그늘진 거 아쇼?”
“...화장을 지워서 그런 겁니다.”
“나참, 화장으로 가리면 뭐하나? 정말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제때 쉬지 못하고 무공 수련하면 몸이 망가질 거요. 그건 보약을 먹어도 소용없수다.”
“주군은 저보다 더 일을 많이 하시는데요.”
지금은 낭왕을 만나러 떠났지만 강엽의 일과는 단목정보다 더 빡빡했다.
교위의 시체를 연구하고, 흑룡교의 비급을 분석하고, 그걸 방도들이 익힐 수 있게끔 주석을 달고, 가끔 홍예칠위를 대신해서 무공을 가르치고, 숙정방과 청우방의 합병에도 관여하고....
무공 수련에 술법 연구까지 합치면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단목정도 강엽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처리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놈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그놈 체력하고 방주 체력이 같나?”
“...안 그래도 주군께서 문사들을 고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관 출신의 서기들만 고용해도 방이 훨씬 매끄럽게 굴러갈 거라면서요.”
고섭풍 등 간부들이 도와주고 있지만 다들 칼잡이 출신이라 그런지 조직 업무는 영 젬병이었다.
몇 명은 안 하느니만 못할 정도로 업무 실력이 형편없었고 말이다.
“일단 관 출신 서기들을 고용하고, 차차 사람을 늘려갈 방침입니다.”
방의 규모가 커질수록 업무량은 더욱 늘어날 테니 사람을 들이는 것은 필수였다.
단목정은 이 사안에 대해서 강엽과 얘길 나누었고, 방의 업무들을 각 부분별로 나누기로 했다.
“그때까진 제가 좀 고생해야겠지만요.”
“힘들진 않수?”
“힘들죠. 하지만 보람찹니다.”
그건 진심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단목정은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옛날의 그녀는 도구였다. 아비와 방의 이익을 위해 권력자의 첩으로 들어갈 도구.
그런 운명을 피하기 위해 남들 몰래 학문을 익혔지만, 그녀의 발악은 한계가 있었다.
“주군이 아니었다면 전 지금쯤 어느 상인이나 관리의 첩이 되었을 겁니다. 눈칫밥이나 먹으며 살았을 테고, 제 자식에게도 같은 운명을 물려주었겠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기적처럼 찾아온 운명에 감사한다. 방주로 일하면서 비로소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거기까지 말한 단목정의 얼굴에 겸연쩍은 기색이 떠올랐다.
“음, 어쩌다 보니 별로 쓸데없는 말까지 늘어놨네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
하후진의 목소리가 발걸음을 막았다.
의아함에 찬 단목정의 눈길에 하후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입맛을 쩌업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같이 갑시다.”
“예? 쉬고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쉴 만큼 쉬었수다. 그리고 혼자 수련하는 것보단 봐주는 사람이 있는 게 나을 거요.”
백서희가 온 뒤로는 그녀가 단목정의 수련을 봐주었지만 지금은 그녀도 자리를 비운 상황.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관절을 푼 하후진은 단목정을 지나치며 피식 웃었다.
‘마침 할 일도 없었는데 잘됐지 뭐.’
저번에 강엽도 시간 나면 방도들의 무공을 봐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단목정 역시 숙정방도였다.
그렇게 월동문을 통과했을 때였다.
“자, 잠깐만요, 하후 공자님!”
당황한 단목정이 급하게 따라나왔다.
“내가 못 미더워서 그러시나? 전적으로 날 믿어주쇼. 내가 이래봬도 북방에서 일했을 때 다른 낭인들이랑 병사들 지도해준 적도 있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거긴 연무장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엥? 방도들은 저쪽에서 수련하지 않나?”
“거긴 방도들이 쓰는 외원 연무장이죠. 방주 전용의 연무장은 반대쪽에 있습니다.”
“....”
“....”
“저와 같이 가시는 게 좋겠네요.”
기세 좋게 앞장섰던 하후진이 돌처럼 굳어지자 단목정은 웃음을 참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하후진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인내심을 발휘하며 고개를 숙였다.
“모쪼록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그, 그럽시다.”
결국 하후진은 멋쩍게 웃었다.
* * *
장강의 뱃길은 무창을 찍고, 거기서 더 동쪽으로 나아가 남직례성의 도시 지주에서 끝났다.
지주에서 황산까지는 사백여 리.
서두른다면 사흘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황산이 가까워질수록 백서희의 얼굴엔 긴장감이 배어나왔다.
“내가 낭왕을 만난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팔존이다.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대고수.
“흑접 시절의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줬으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을 거야.”
“진조와 흑룡교주도 봤으면서?”
“이거랑 그거랑 같나.”
솔직히 진조나 흑룡교주는 실감이 안 났다. 현실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신화나 전설에서 튀어나온 괴력난신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낭왕은 다르다. 흑접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익히 들어왔던 천하팔존. 무림인이라면 동경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넌 긴장하지 않는 것 같다?”
“설마.”
낭왕은 예측불허의 존재였다.
절대고수의 안법이라면 자신이 평범한 인간과 동떨어졌다는 것을 꿰뚫어볼지도 모르는 일.
‘삼화취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절대고수를 완벽하게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억지로 숨겨봤자 막상 앞에 서면 들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낭왕이 이를 꼬투리로 잡아 살수를 쓸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백서희가 입을 쩍 벌렸다.
“그럼 위험하지 않아?”
“위험하지. 하지만 날 죽이려고 부르진 않았을 거다.”
낭왕은 백도니 흑도니 하는 사상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게 세간의 평가였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나 강엽은 세간의 평가가 완전히 틀렸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낭인전에서 활동하는 낭인들 중엔 정체를 숨긴 사마외도도 은근히 많았기 때문이다.
만약 낭왕이 그들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내쫓았을 터.
‘돈만 벌어다주면 상관없다는 뜻이겠지.’
물론 방심은 금물이다.
낭왕이 그냥 봐주더라도, 어떤 일을 맡길지는 미지수였으니까.
“당사자를 만나보면 알 수 있겠지.”
강엽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거대한 용이 배를 깔고 누운 것처럼 굽이치는 고산.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들과 험준한 봉우리들이 하얀 운해에 휩싸여 찬탄을 자아냈지만, 황산을 보는 강엽의 얼굴에 그런 기색 따윈 없다.
다 말라버린 우물처럼 한 점의 감정도 담지 않은 검은 눈동자가 산 어귀 입구를 응시한다.
“마침 그쪽에서 마중을 나온 것 같은데.”
언뜻 보면 심마니처럼 보이는 남루한 청년.
병장기는 패용하지 않았으나 강엽은 그가 상당한 수준의 고수임을 알아봤다.
청년 역시 걸어오는 강엽과 백서희를 보고 자신이 기다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봤는지 씩 웃었다.
“귀영이십니까?”
“그러는 그쪽은?”
“떠돌이들의 궁궐 주인(浪人殿主)을 섬기는 가복입니다. 연이라 불러주십시오.”
“강엽이오.”
“함께 오신 소저는?”
“내 일행이오.”
“백서희예요.”
백서희가 죽립을 벗고 이름을 밝히자 스스로를 연이라 소개한 청년의 눈이 커졌다.
“혹시 섬무검예(閃舞劍藝)...?”
“그게 누군데요?”
“귀주성의 안개 사태에 휘말린 무림인들 사이에서 퍼진 별호입니다. 귀영과 함께 싸운 아름다운 쌍검의 여고수. 개방 후개를 비롯한 몇 명이 붙여준 별호지요.”
“그 거지 녀석이 그런 별호를 생각했다고요?”
“처음 들으시나 봅니다.”
“뭐, 그 일이 끝난 뒤에 빨리 떠났으니.”
백서희가 씩 웃었다. 섬무검예라는 별호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연이 강엽에게 시선을 돌렸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릴까요?”
강엽에 대해 조사했다면 밤에만 활동하는 것도 알고 있을 터. 밤에 산길을 타는 것은 무림 고수에게도 위험천만한 짓이지만, 연은 아무런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강엽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는 게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