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여행 (3)
“날씨 한번 우라지게 끝내주는구먼.”
비악채주는 구멍이 뚫린 듯 빗줄기를 뿌리는 회색 하늘을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아직 서릉협엔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쪽 구간 역시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서 실수하면 그대로 좌초된다. 근데 비라는 변수가 추가된 것이다.
사실 관천망기를 보지 않아도 비가 오리란 것쯤은 알 만한 궂은 날씨였다. 맞은편의 배도 무리해서 서릉협을 통과하기보다는 근처 포구에 정박할 가능성이 컸다.
“새끼들아! 빨리 빨리 노 젓지 못하겠냐!?”
“하지만 채주님! 물살이 너무 세서...!”
수십 년을 장강에서 일한 뱃꾼들도 장강삼협에선 객기를 부리지 않는다.
하지만 비악채주는 봐주지 않았다.
“닥쳐! 내 손이 무서우냐? 아니면 물에 빠져 죽는 게 무서우냐?”
비악채주의 병장기는 손등 위쪽으로 세 개의 칼날이 달린 쌍비조(雙飛爪)였다. 흔히 장갑처럼 손에 착용해서 휘두르는 병장기.
비악채주가 시퍼런 살기가 발하자 수적들은 화들짝 놀라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망할 새끼.’
‘우리가 바람을 타고 있으니 싫어도 만날 텐데.’
속에서 욕할지언정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수틀리면 자기 부하도 죽일 수 있는 작자였다.
그럼에도 몇 명의 얼굴에 불만이 서리자 비악채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빌어먹을....’
장강수로채에 속한 열여덟 개의 수적들은 서로 따로 놀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존중했다.
한데 이인자인 비갑채주가 수로맹주에게 반기를 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비갑채주를 지지하는 쪽과 수로맹주를 지지하는 쪽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기 시작한 것.
‘한심한 새끼들아, 좀 있으면 전쟁이 터질 거다. 살아남으려면 미리 쟁여놔야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란 말이다.’
궂은 날씨에도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이유였다.
약탈로 먹고 산다지만 식량이나 화살 같은 소모품은 그들도 돈 주고 사는 것이다.
비악채에게 걸린 것을 아는지 저 멀리 있는 배가 방향을 바꾸려고 했다.
“잡아! 놈들이 도망치게 두지 마라!”
채근하지 않아도 놓칠 염려는 없었다.
빠른 물살과 사방에 깔린 암초 때문에 함부로 방향을 바꾸면 좌초될 게 뻔했으니까.
“몸이 날랜 놈들만 날 따라와라! 단숨에 뛰어넘어 갑판을 점령한다!”
가만히만 있어도 배가 움직일 만큼 물살이 빨랐기에 갈고리를 걸진 않았다.
충돌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스치는 찰나, 비악채주를 비롯한 무공 수적들이 날랜 경신술로 뱃전을 박차고 뛰었다.
비악채의 배는 저편으로 빠졌다가 안전한 구간에서 배를 돌릴 것이다.
터엉!
나무 판자가 삐그덕거릴 정도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착지한 비악채주가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수적들의 출현에 선객들은 선실로 대피한 지 오래.
갑판엔 선장을 위시로 한 선원들이 손도끼나 박도 등을 꼬나쥔 채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여어, 조 선장. 신수가 훤하시군.”
“설마 이리 만날 줄은 몰랐소. 날이 궂어서 오늘은 못 뵐 거라 생각했소만.”
“으하하! 친애하는 조 선장이 지나가는데 주인된 도리로 어찌 손님을 그냥 보내겠소이까?”
“저런. 비가 차가운데 고뿔에 걸리면 어쩌려고.... 따뜻한 차를 준비했으니 들고 가시오.”
“허어, 조 선장의 배려에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근데 내가 차를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
“잘됐구려. 얼마 전에 지인에게 좋은 분주(汾酒)를 선물받아서 배에 뒀는데. 길손께 명주를 대접하라는 하늘의 뜻인가 보오.”
“오, 분주라면 산서의 명물 아니오? 장강에선 구하기 힘든 건데 운이 좋군.”
비악채주의 두꺼운 입술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으나 눈은 살기로 번들거렸다.
선장의 노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채주.”
“이거 미안하게 됐소이다, 조 선장. 선장도 알겠지만 요즘 우리네 사정이 말이 아니라서. 조 선장이 나를 좀 배려해줬으면 좋겠는데....”
“얼마를 원하시오?”
산적들이 지나는 곳을 통과하려면 통행세를 내듯 장강의 수적들을 만나도 통행세를 내야 했다.
함부로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면 선원들도 죽기 살기로 싸우고, 최소한의 수입이 없으면 수적들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어진다.
싸우지 않은 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나 지금까진 원만하게 유지했던 관례.
그 관례를 빼앗는 쪽에서 먼저 깼다.
“전부 내놓으시오.”
“...뭐요?”
상식을 벗어난 대답에 선장은 귀를 의심했다.
다른 선원들도 멈칫했다가 한 박자 늦게 채주의 말뜻을 알아듣곤 분통을 터뜨렸다.
“저, 저 미친 인간 같으니...!”
“수적 새끼들아, 그렇게 다 가져야 후련하냐!”
여기저기서 욕설과 아우성이 터지자 수적들도 똑같이 욕설로 대응하며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명령만 떨어지면 죽고 죽이는 혈전이 벌어질 일촉즉발의 상황.
“그만!”
선장의 외침에 선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은은한 노기를 띠운 선장이 비악채주를 도끼눈으로 노려보며 힐난을 퍼부었다.
“정녕 끝장을 보자는 거요?”
“흐흐, 원래 물가라는 게 그렇지 않소? 흉년엔 쌀값이 오르지. 이쪽 바닥도 마찬가지요.”
“그건 비겁한 변명이외다!”
“선택하시오, 조 선장. 전부 내놓고 목숨만은 건질 건지, 아니면 죄다 잃을 건지....”
“....”
애초 뱃삯엔 수적들을 만났을 때를 대비한 통행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적들에게 굴복해서 가진 것을 내준다면 선객들의 원성이 누구에게 향하겠나.
뭣보다 배엔 양민들 외에도 상인들과 무림인들이 타고 있었다. 수적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내줘야 한다고 말하면 그들이 납득할 리가 없었다.
필시 싸움이 일어날 텐데, 그러면 선객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선원들 역시 싸워야 했다.
“채주, 우리 배엔 무림인들도 있소. 피 보기 싫으면 통행세만 받고 돌아가시오.”
“얘들아, 아무래도 우리 조 선장이 늙어서 그런지 말귀가 어두운 모양이다. 기껏 자비를 베풀어줬는데 저 늙은이가 그냥 차버리는구나!”
익살스러운 농에도 웃음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몇몇 수적들이 입꼬리를 비릿하게 당기며 각자 병장기를 꼿꼿이 세울 뿐.
“조 선장, 나 장난하는 거 아니오! 내 코가 석 자야. 예전처럼 봐줄 수 없다고!
“기어이 피를 보겠다는 말이군.”
침통한 심정을 숨기지 않은 선장의 중얼거림에 선원들이 달려들 기세로 함성을 질렀다.
비악채주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흥, 배까지 빼앗아주지. 얘들아, 쳐...!”
고함을 치는 순간 뭔가 시야 한쪽에 아른거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비악채주는 반사적으로 상반신을 최대한 비틀었다.
“컥!”
그러자 뒤편에 있던 수적이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넘어갔다.
목에 박힌 수리검을 발견한 비악채주의 신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 * *
“씨발, 어떤 개잡놈의 새끼가!”
활화산처럼 들끓는 분노를 표출한 그는 선장을 노려봤으나 선장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그때 옆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이 새끼야.”
“...!?”
비악채주는 경악하면서도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는 대신 손에 장착한 쌍비조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채주님, 뒤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리를 돌리면서 쌍비조를 찔러넣었으나 이번에도 허탕에 그쳤다.
오히려 상대의 검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간다.
“이런 썩을!”
위기를 직감한 비악채주가 전신의 근육을 불끈거리면서 힘을 줬다.
카아앙!
“뭐야?”
“철포삼(鐵布衫)이다, 쌍년아!”
이제 비악채주도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내려뜨린 회색 피풍의의 여인. 긴 머리카락은 끝부분만 하얀 천으로 묶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머리고 옷이고 죄다 젖은 여인의 자태를 비악채주가 음흉하게 훑어봤다.
피풍의로 가리지 못한 하얀 경장이 빗물에 착 달라붙는 바람에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냈던 것이다.
“푸흐, 이게 웬 횡재인지 모르겠군. 이런 미녀가 타고 있을 줄이야...!”
“글쎄, 횡재인지 횡액인지는 두고 봐야 알지 않을까?”
“걱정 마라. 내가 패할 일 따윈 없으니까. 계집 너는 특별히 살려주마!”
“눈물 나게 고마워라.”
어깨를 으쓱인 백서희가 비악채주를 무시하고 선원들이 있는 곳을 흘깃 돌아보았다.
어느새 선원들의 앞에 오연하게 선 강엽이 수적들을 슥 둘러보고 있었다.
“이놈은 내가 상대해도 되지?”
“마음대로. 대신 잡졸들은 내 거다.”
“그건 뭐....”
아무래도 선원들의 안전이 걸렸기에 그것까지 하지 말라고 할 순 없었다.
양손에 쥔 쌍검으로 기수식을 취한 백서희가 검지만 까딱여서 비악채주를 도발했다.
“안 덤비고 뭐해? 비 그칠 때까지 그러고 있게?”
“원하는 대로 해주마!”
자신을 다 잡은 물고기 취급하는 처사에 격분한 비악채주가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장강수로채에 속한 열여덟 개 수채의 한 주인답게 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였다.
구파니 팔가니 하는 대방파의 기준으로 견주어봐도 고수에 속하는 것이다.
한데 자신을 이토록 무시하다니...!
투앙!
쌍비조가 발출한 막강한 경파가 나무 판자를 산산조각 쪼개버리면서 파편을 뿌렸다.
선장이 사색이 돼서 소리쳤다.
“날뛰게 두면 안 되오!”
장강의 거센 물살을 버티기 위해 단단한 소나무로 만들었지만 무림 고수에겐 소용없었다.
백서희도 속으로 혀를 찼다.
‘속전속결만이 답이겠네.’
자칫 돛대가 경파를 맞고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배가 침몰할 수 있었다.
강엽과 백서희는 살아남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물귀신 신세를 면치 못할 터.
쉬아아악!
배가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녀는 경파를 내뿜지 않고 쌍검 안에 가두었다.
좌검과 우검이 서로 다른 박자와 속도로 짓쳐들어오자 비악채주는 정신이 없었다.
감각이 검초를 따라가지 못한다.
“흥, 그래도 상관없다!”
외공을 익혀 단단해진 피부는 검기조차 능히 견뎌낸다. 붉은 자국이 남는 게 전부.
물론 계속 맞으면 언젠가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겠지만 그전에 결판을 낼 자신이 있었다.
“그 얄상한 검을 부서주마!”
수차례 부딪친 끝에 쌍비조의 칼날로 백서희의 쌍검 중 하나를 얽는 데 성공했다.
비악채주의 입가에 흉악한 미소가 감돌았다.
“좋아. 이대로...!”
쌍비조를 비틀면서 힘을 가하면 얇은 협봉검 따위는 수수깡마냥 부러뜨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비악채주에게도 있었다.
“이익!”
비악채주의 얼굴이 벌게졌다.
생각대로 검을 얽었는데도 부러지기는커녕 이도 안 나가는 게 아닌가?
“어떻게...!”
“신검이거든.”
지난날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서 얻은 전리품.
비악채주의 쌍비조가 얽은 협봉검은 강엽의 자성검 못지않은 신병이기였다.
“그리고 너무 생각이 뻔해.”
흑접에서도 쌍비조를 다룬 살수들은 몇 명이나 있었고, 백서희는 그들과 대련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비악채주가 협봉검으로 무장한 자신을 어떻게 상대할지 예측할 수 있었다.
촤아악!
빛살 같은 검세가 어깻죽지를 훑고 지나갔다. 원래는 눈을 노렸는데 비악채주가 상체를 틀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몇 방울의 피가 흩날리자 비악채주의 눈동자에 경악이 번졌다.
“이런 니미럴!”
“슬슬 감이 잡히는걸.”
어느 정도의 공력을 담아야 비악채주의 철포삼을 깨고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
백년하수오의 기운을 모두 흡수한 작금에 그녀의 축기량은 백십 년을 헤아렸다.
이십 년을 얻을 거라는 강엽의 예상을 깨고 오 년의 내공을 더 쌓은 것이다. 중단전을 개방했기 때문에 양만 많아진 게 아니라 질도 높아졌다.
전력을 다한다면 한 번의 검격으로 금강석을 절단할 수도 있으리라. 비악채주도 백서희의 검격에 깃든 웅혼한 기운을 느끼고 당황했다.
촤아아악!
상반신의 근육이 갈라지며 피가 뿜어진다.
비악채주가 역정을 냈다.
“젠장, 너희들! 당장 돕지 못하...!”
채주가 위기에 처했는데 부하라는 것들이 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백서희와 위치를 바꾸면서 공방을 나눈 비악채주는 뜻밖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그를 따라온 수적들이 사지가 박살나고 허리가 접힌 채 쓰러져 있는 참상.
잠시 비악채주를 곁눈으로 바라본 강엽이 굴러다니는 창대를 주워서 역수로 쥐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수적들의 배를 향해서.
“설마?”
투아아아앙...!
빗줄기를 뚫고 하늘 높이 솟아오른 투창.
포물선을 그린 투창은 돛대 밑둥을 부수고, 그것도 모자라 배 밑창까지 연달아 박살낸다.
침몰하는 배에 탄 수적들의 비명이 빗소리를 뚫고 아련하게 고막을 두들겼다.
그리고 백서희는 상대의 집중력이 느슨해진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서걱!
막대한 경력을 머금은 신병이기가 단단한 근육을 베고 심맥을 끊어냈다.
“커걱....”
“그러게 통행세만 받지 그랬어? 괜한 욕심 부리니까 이 꼬라지 나는 거지.”
객관적으로 비악채주의 무공은 강했다.
그렇지만 상대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전력을 발휘할 새도 없이 맥없이 패한 것이다.
“뭐, 당신에겐 고맙다고 해야겠네. 덕분에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실하게 체감했거든.”
외공을 익힌 데다 쌍비조를 애병으로 쓰는 비악채주는 백서희와 상극이었다.
중단전을 개방하지 못한 시절이었다면 꽤나 고생하면서 잡아야 했으리라.
“장강수로채의 채주라면 목에 현상금이 걸려 있겠지?”
백서희가 빙긋 웃은 것과 동시에 은색의 검날이 비악채주의 목을 훑고 지나간다.
후회와 분노에 휩싸인 비악채주의 수급은 선원들이 있는 곳까지 굴러가서 선장의 발치에서 멈췄다.
“채주놈 시체는 우리 거예요.”
“여, 여부가 있겠소.”
선장과 선원들은 한바탕 폭풍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사나운 수적들을 어린애처럼 갖고 노는 고수들이 그들의 배에 탔을 줄이야.
강엽은 백서희가 죽은 비악채주를 가리키며 한쪽 눈을 찡긋하자 헛웃음을 흘렸다.
‘피는 내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