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여행 (2)
‘순조롭군.’
강엽은 초음으로 백서희의 진기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관찰했다.
깨끗이 씻은 백년하수오를 잔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삼킨 이후 무영환살공의 진기가 백년하수오의 기운을 잡아먹으면서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한나절이 지났을 땐 내공이 십 년 가량 불어난 구십오 년에 육박했다.
‘얼마나 흡수할지 모르겠는데....’
백년하수오를 복용했다고 내공이 정말 백 년분이나 더해지는 건 아니었다. 순수한 자연지기 외에도 여러 가지 기운이 뒤섞였기 때문이다.
내가기공으로 자연지기만 걸러내는 과정에서 많은 기운이 유실된다.
같은 영약을 복용해도 얼마나 많은 기운을 건질지는 복용자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무영환살공은 상승의 무학이고, 백서희 역시 어린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기재.
강엽은 그녀가 이십 년쯤 건지지 않을까 추측했다. 사실 이것도 많이 쳐준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보다 훨씬 못 미쳤을 테니까.
하지만 결론만 말해서 강엽의 예상은 어긋났다.
“.......”
하루, 이틀을 넘어 사흘.
백서희는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는다.
이미 그녀의 하단전은 흘러넘칠 듯이 가득찬 상태였다. 미처 흡수하지 못한 기운이 전신의 세맥과 낙맥 등에 흩어진 상태.
그럼에도 백서희가 운기조식을 그만두지 못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조만간 오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백년하수오의 기운을 단전에 녹여내는 과정에서 기감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
중단전이 개방되고 있었다.
‘이런 식이었군.’
강엽도 중단전을 열긴 했지만 당시엔 무아지경에 빠져서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타자(他者)의 시선으로 관찰하니 중단전의 개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 개방됐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는걸.’
중단전이 개방됐다는 게 이전까지 막혔다는 뜻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발달하지 않은 것이다.
미처 흡수하지 못한 영약의 기운이 몰리면서 백서희의 중단전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하단전의 정과 중단전의 기가 활발히 이어지는 경지.
화아아아악......!
한껏 너울졌던 기파가 다시 백서희의 몸 안으로 갈무리된다.
안색이 편하고 호흡도 고르다.
“성공했군.”
그제서야 강엽이 목소리를 냈다.
혹시나 육성을 내뱉으면 백서희의 무아지경을 깨트릴 수 있기에 어떤 소리도 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던 것이다.
“으음....”
서서히 눈을 반개한 눈 위로 새하얀 기광이 스치듯 번뜩인다. 흑백이 뚜렷한 영롱한 눈동자에 놀람의 감정이 번졌다.
강엽이 작게 웃었다.
“축하한다. 기분이 어때?”
“그, 글쎄. 좀 얼떨떨하네. 뿌듯하고 기쁘긴 한데... 아직은 실감이 안 나.”
소위 절정에 오른 고수들이 모두 중단전을 개방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사실 이렇게 빨리 이 경지에 오를 줄은 몰랐어. 평생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영약의 도움이 크긴 했다. 막대한 기운을 소화하느라 기감이 극도로 예민해지지 않았다면 중단전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무공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지 사소한 계기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
백서희가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고마워.”
아무리 재능과 노력이 뒷받침되었어도 백년하수오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중단전을 개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개방했더라도 먼 훗날의 일이 되었겠지.
“음, 이런 걸 받았는데 맨입으로 넘어가긴 좀 그렇네. 이쪽으로 와봐.”
“음?”
“얼른.”
재촉받은 강엽은 영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그녀의 앞에 섰다.
사흘 내내 씻지 못해서 냄새가 나야 하는데도 코끝에 스치는 향은 청아했다. 긴장한 듯 경직된 들숨에 백년하수오의 향이 섞여 있었다.
은어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이 얼굴로 다가온다.
고된 수련 탓에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
천천히 끌어당긴 얼굴 위로, 까치발을 든 백서희의 입술이 닿았다.
“.......”
꽤나 오랫동안 이어진 접촉.
강엽이 돌처럼 굳어지고, 한참 뒤에야 떨어진 백서희의 얼굴도 능금처럼 붉어졌다.
볼에다 했다지만 어쨌든 외간 사내에게 먼저 입을 맞춘 것이다. 충동적으로 저지르긴 했는데 하고 나니 부끄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래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싫었기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떨었다.
“이런 미인이 입맞춤을 해주는데 왜 그런 표정이야? 입에 해주지 않아서 아쉬워?”
“아니, 그게....”
살짝 얼떨떨하긴 했다. 백서희의 손이 다가왔을 때만 해도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백서희가 짐짓 헛기침을 하는 시늉을 했다.
“흠흠, 입은 좀 그렇잖아. 나 양치 안 했단 말이야. 그리고 우리가 사귀는 건 아니니까....”
“그, 그렇지.”
강엽이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당황하는 모습에 백서희는 살짝 신선함을 느꼈지만, 기실 그녀도 눈 둘 곳을 못 찾고 귀밑머리를 꼬았다.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된 이상 부끄러움은 더 큰 부끄러움으로 덮겠다!
잠자리에서 이불을 차는 것은 내일의 자신에게 미뤄두고, 그녀는 짐짓 깔깔 웃으며 허세를 떨었다.
“뭐, 그래도 나 정도면 꽤 예쁜 거거든? 내가 안 꾸미고 다녀서 그렇지 힘 팍 주고 꾸미면 사천삼미도 무릎 꿇릴 수 있어. 그러니까....”
“영광으로 알라고?”
“어흠!”
어색한 태도로 다시 한번 허세 넘치는 헛기침을 뱉은 그녀가 시선을 돌리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부끄러움을 상쇄시킬 만큼 장대한 울림이 뱃속에서 일어났다.
꼬로로록......!
“....”
“....”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다.
방금 전의 어색함은 덮고도 남을 부끄러움에 백서희는 얼굴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절망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운기하고 얼마나 지났어?”
“...사흘하고 한나절쯤.”
“그렇게나?”
창밖의 사위가 어두컴컴한 것을 보고 시간이 오래 지났을 거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설마 사흘이나 지났을 줄이야.
그제야 강엽도 어색한 기분에서 약간 벗어나서 바뀐 화제에 편승했다.
“사흘을 내리 굶었는데 배고픈 게 당연하지.”
“안가에 뭐 없어?”
“벽곡단은 있는데 그거라도 주랴?”
“그거 허기만 달래는 거잖아. 배는 채울 수 있는데 포만감은 좀....”
“싫으면 바깥에서 사먹어야지.”
“잠깐, 그전에 좀 씻을래.”
냄새가 안 나도 찝찝한 건 찝찝한 거다. 백서희가 살수 출신이라 인내심이 깊어도 일부러 더럽게 하고 다니진 않았다.
강엽이 창밖의 어둠을 힐끔 돌아보았다.
“요 근처에 유명한 맛집이 있다. 근데 손님이 많아서 술시쯤엔 재료가 떨어져서 문을 닫아.”
“응?”
“좀 전에 해가 졌으니 유시 중엽쯤 됐겠지. 슬슬 반 시진 뒤면 술시가 될 것 같은데.”
“...! 빨리 씻고 올게!”
옷 챙겨서 부리나케 달려가는 백서희의 모습에 강엽이 쓰게 웃었다.
‘포장도 된다는 건 말 안 해줘도 되려나?’
맛집이라는 말에 서두르는 걸 보니 씻는 동안 음식이 식을 염려는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 * *
날렵한 비조선이 장강의 물살을 가로지르자 바람결에 긴 머리가 나부낀다.
머리를 누른 백서희가 투덜거렸다.
“머리를 묶든가 해야지 원.”
흐린 날씨에도 장강의 절경을 보겠다고 선실 밖으로 나왔는데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밖에 나온 강엽이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며 물었다.
“지금 묶어줘?”
“됐어. 이미 엉망인데.”
“가만히 있어봐.”
“어?”
삼단같은 머리가 바람과 상관없이 강엽의 손에 잡혔다. 그녀는 강엽이 뭘 했는지 깨달았다.
“태극반... 그렇게도 써먹을 수 있었어?”
강엽이 흡자결을 약하게 건 태극반의 공력 파동으로 긴 머리카락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여러 가지로 알뜰살뜰 써먹고 있지. 예전엔 집에서 청소할 때 알차게 써먹었고.”
숙정방에 머무를 때야 시비들이 매일 청소하지만 혼자 살았을 땐 알아서 청소해야 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커다란 집을 일일이 손으로 쓸고 닦으면 하루 웬종일 걸렸기 때문에 태극반의 경파를 얇게 둘러 먼지와 쓰레기를 한데 모았다.
일상이 수련이었기 때문에 태극반의 경지 역시 상승했다.
“그렇구나. 그런데....”
문득 백서희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자식, 여자 머리 만지는 게 왜 이리 능숙해?’
단순히 묶고 끝내는 게 아니라 머리 끄트머리만 땋고 있었다. 세 번 정도 댕기를 땋고는 가지고 있는 여분의 천으로 매듭을 묶었다.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는데.”
“응. 마음엔 들어. 의외로 잘 묶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자기 머리를 이렇게 땋았을 리는 없으니 분명 여자한테 해준 게 틀림없는데....
약간 퉁명스러운 물음에도 강엽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옛날에 사매한테 많이 해줬지.”
“사매가 있었어?”
“서원에서 공부했을 때.”
“아....”
그러고 보니 강엽은 원래 유생이었으니 서원에서 학문을 익혔을 것이다.
“서원주님의 손녀가 타고난 왈가닥이었거든. 천방지축도 그런 천방지축이 없었지. 유학자 가문의 딸인데도 행동거지는 동네 골목대장이었어.”
기껏 예쁘게 단장해도 놀다 보면 엉망이 되기 일쑤였다. 같이 놀던 사내아이들도 손재주가 없었기에 강엽이 대신 머리를 땋아주곤 했었다.
강엽의 목소리에 친근한 감정을 느낀 백서희는 저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혹시 둘이 사귀었어?”
“뭐?”
“아, 아니야. 나도 모르게 말이 헛나왔네.”
“그런 사이는 아니었어.”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매는 태중약혼을 해서 정해진 상대가 있었으니까. 애초에 그런 감정 자체가 없었어.”
남녀보다는 오누이에 가까웠다. 말 그대로 동문에서 같은 학문을 익힌 사형제 관계.
“그립지는 않아?”
“안 그러면 거짓말이겠지.”
사매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친인들의 얼굴이 또렷이 떠오른다.
“근데 왜 안 만나? 지금은 여유도 있잖아.”
“글쎄.”
멀어서 여의치 않다는 것은 핑계였다.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짬을 내면 잠시나마 다녀올 수 있었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햇수로 따지면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들을 다시 만나면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이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땐 돌아갈 수 있겠지.”
“....”
백서희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렇구나. 이 녀석은....’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옛 시절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이다. 흡혈귀가 된 자기 자신이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
“난 고향이 없어.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성도의 시궁창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있어 고향은 지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나눈 어미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넌 아직 돌아갈 곳이 있잖아. 그 사람들이 널 반겨줄지는 몰라도 희망은 있어. 오히려 너무 늦으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이번 일이 끝나면....”
그렇게 말할 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두 방울씩 뱃전을 적신 빗방울은 이내 굵직한 장대비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강의 풍광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롱이를 찾거나 선실로 들어갔다.
“아앗, 좀 있으면 서릉협(西陵峽)인데...!”
백서희가 탄식했다.
장강삼협 중 가장 길고 험한 서릉협은 빼어난 풍광으로도 유명한데 비 때문에 못 보니 아쉬웠다.
“일 끝나고 돌아갈 때 다시 보면 되지. 들어가자. 여기 있으면 홀딱 젖겠어.”
“쓰읍, 어쩔 수 없지.”
“대신 악양루나 가보자고.”
서릉협이 있는 의창을 넘으면 과거 삼국지의 유비가 육손에게 패한 형주가 나오고,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중원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인 동정호가 나온다.
그리고 동정호엔 중원삼대누각 중 하나로 불리는 악양루가 있었다.
“좋아. 약속한 거다.”
그렇게 선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선수 쪽으로 돌렸다.
굵직한 빗줄기를 뚫고 이쪽으로 질주하는 비조선.
돛에 새겨진 비악(飛惡)이라는 글자를 읽은 누군가가 목구멍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수적들이다!”
장강수로채 중 하나인 비악채.
강엽은 미간을 찌푸리고, 백서희는 어이없어하며 폭소했다.
“실화야? 이 날씨에 약탈질을 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