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51화 (151/450)
  • 25화. 여행 (1)

    능정각이 떠나고 엿새가 지났을 무렵, 강엽은 꼭두새벽부터 숙정방을 떠날 준비를 했다.

    “젠장, 정말 난 안 데려가냐?”

    하후진은 부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능정각의 앞에선 낭왕이 부르면 와야 하냐고 뻗댔지만, 막상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던 걸까.

    아침부터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배웅을 나온 때까지도 시무룩한 티를 지우지 못했다.

    “씁, 나도 그 양반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만나면 뭘 하려고?”

    “당연히 덤벼야지!”

    “그래서 안 데려가는 거다.”

    “...그럼 쟤는?”

    하후진의 손가락 끝엔 강엽처럼 행낭을 짊어진 백서희가 있었다.

    강엽이 낮엔 약해지는 만큼 호위로 따라가는 건데 하후진은 자신을 데려가지 않는 것에 섭섭함을 느끼는지 엉뚱한 시비를 걸었다.

    “솔직히 말하시지! 내가 낭왕한테 시비 걸까 봐 안 데려가는 게 아니라 둘이 오붓하게 여행...!”

    하후진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멀리 있던 백서희가 어느새 등 뒤에 홀연히 나타나서 목 위쪽에 쌍검을 들이댔던 것이다.

    “여행이 어쨌다고?”

    “...아, 안전하게 잘 갔다 오라고.”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 말에 등골이 오싹해진 하후진이 앗 뜨거라 하며 꽁무니를 빼자 백서희가 흥 소리를 내며 검을 내렸다.

    하후진은 하후진대로 뒤를 잡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뭐, 백서희도 그동안 놀고 있지 않았으니까.’

    강엽이나 하후진처럼 급격하게 성장한 건 아니나 백서희 역시 꾸준히 기량을 갈고 닦아왔다.

    아직 중단전을 개방하진 못했지만,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영약을 복용하면 그 과정을 좀 더 줄일 수 있을 테고.’

    강엽이 하후진을 돌아봤다.

    “숙정방을 잘 부탁한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자리를 비운 동안 엉뚱한 놈들이 숙정방을 노릴 수도 있는 일.

    하후진이 뚱하게 되물었다.

    “의뢰 받으면 나도 떠나야 하는데?”

    “가면 낭왕한테 다음엔 널 부르라고 말하지.”

    “후,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나만 믿어라. 숙정방은 이 사자염도 하후진이 목숨 걸고 지킬 테니!”

    가슴을 쿵쿵 두들기면서 큰소리치는 모습에 배웅을 나온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참으로 빤히 보이는 속내가 아닌가?

    ‘참 알기 쉬운 양반일세.’

    ‘저럴 거면 허세는 왜 부린 건지 원.’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까맣게 모르면서 하후진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그때 강엽이 목소리를 낮췄다.

    “시간 나면 방도들 무공도 봐주고 그래.”

    홍예칠위가 무공 사범으로 합류한 이래 숙정방도들은 매일매일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열심히 수련한 것은 아니다. 흑도 건달패 출신이 많아서 그런지 무도(武道)를 추구하는 자들이 드물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고된 수련을 견디지 못한 낙오자들이 속출했다. 강엽은 그런 이들을 가차없이 내쫓으며 기강을 잡았다.

    숙정방이 진정한 무림 문파로 거듭나려면 방도들이 배고픈 늑대처럼 힘을 갈망해야 했다.

    “나더러 무공을 가르치라고?”

    “각 잡고 가르치라는 건 아니야. 그냥 호흡이나 자세 같은 걸 조언해달라는 거지.”

    “그... 녀석들이 잘하고 있잖냐?”

    하후진은 홍예칠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숙정방에 머무른 지 상당한 시일이 지났으니 알 수밖에.

    처음엔 그들이 강시라는 사실에, 그리고 흑룡교의 무공을 가르친다는 사실에 기겁했다. 강엽이 그들의 무해함을 보장하고 마공을 가르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 뒤에야 간신히 진정했을 지경.

    “홍예칠위는 무공 사범은 될 수 있어도 좋은 스승은 못 돼. 말할 줄도 생각할 줄도 모르니까. 목각인형이나 다름없어.”

    “하긴 그놈들은 시범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더라.”

    “그리고 우리가 없는 동안 당문에서 사람이 올 수 있어. 내 몫의 불침단은 단목 방주에게 내줘.”

    “엉? 네가 먹지 않고?”

    “난 필요 없거든.”

    처음 불침단에 대해서 알았을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의문이 들었다.

    과연 흡혈귀인 자신에게 불침단이 필요할까?

    ‘독이라는 것도 결국 몸을 훼손시키는 거니 재생력으로 해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단목정을 통해 그리 강하지 않은 독을 몇 개 구해서 조금씩 복용해봤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해독 시간은 약간 달랐지만 가장 강력한 독도 재생력을 넘지 못했다.

    ‘당문의 절독이라면 다를 수도 있겠지만....’

    한 방울로도 코끼리를 절명시킨다는 당문의 절독이라면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도 있으리라.

    하나 그만한 독은 불침단 정도의 비약을 먹는다고 내성을 기를 수 없었다. 설령 그런 비약이 존재한들 당문이 외인에게 줄 리 만무했다.

    “일단 네가 먼저 복용하고, 단목 방주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당문 사람들이 잘 설명하겠지만....”

    “끄응, 알겠다. 대신 낭왕한테 내 얘기 하는 거 잊지 말고. 금파검 그 양반이 왔을 땐 말하지 않았지만 낭왕이랑 싸워보는 게 내 꿈이었어.”

    하후진이 강해졌어도 낭왕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래도 승패를 떠나서 낭왕과 칼을 맞대보는 것은 모든 낭인들이 한 번쯤 꿈꿔본 웅대한 목표였다.

    무릇 진정한 무인이라면 도전을 두려워해선 안 되는 법.

    순수하게 싸움을 즐기는 면에서는 하후진이야말로 참된 무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하후진에게 당부를 한 뒤엔 단목정과도 얘기를 나누었다.

    “가급적 빨리 돌아오겠지만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큰일이 나면 하후진과 상의하고, 여차하면 낭인전 노주 분타나 중경 분타에 사람을 보내. 외면하진 않을 테니까. 그래도 안 되면 여기로 사람을 보내고.”

    일전에 능정각이 내어준 양피지.

    단목정이 다짐하듯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다.

    “절대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실수해도 돼.”

    “....”

    “사람인데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실수하지 않는 것보다, 실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훨씬 중요한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방을 굴리는 것보다 방주가 강해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명심하고. 다행히 지금까진 잘해주고 있어. 계속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주군. 부디 건승하십시오.”

    “방주도.”

    그렇게 강엽은 백서희와 함께 숙정방을 떠났다.

    * * *

    황산이 있는 휘주는 남직례성에 있고, 남직례성에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장강을 통한 뱃길이었다.

    노주의 선착장에서 배에 오른 강엽과 백서희는 중경에 잠시 들러 청송객잔으로 향했다.

    안개의 도시라 불리는 중경답게 하늘이 흐릿했기 때문에 흑무암쇄진 없이도 돌아다닐 만했다.

    “전강이 돌아왔을까?”

    “글쎄, 가봐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주렴을 헤치고 들어갔을 땐 장경도, 전강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객잔을 보고 있었다.

    “객잔은 쉬고 있다. 의뢰도 받지 않으니 다른 데서 알아보... 어라?”

    두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습관적으로 말한 청년은 강엽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다 뭔가 깨달았는지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귀영? 그때보다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전엔 빼빼 말랐는데 말이야. 지금도 좀 마르긴 했지만 그때보단 훨씬 좋아 보이는걸.”

    “누구지?”

    “뭐야. 같이 일했었는데 못 알아보네.”

    “그랬나? 하지만 한두 번 스쳐지나간 걸 일일이 기억하지는....”

    그때 과거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낭인전에 들어오고 얼마 안 되었던 시절, 먼저 다가와서 일거리를 제안했던 은패급 낭인의 의형제들.

    눈앞의 청년은 그들 중 막내였다.

    “...흑풍사우?”

    “이제 기억했구나.”

    “미안한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

    “하긴 겨우 한번 같이 일했는데 거기까지 기억하는 건 좀 힘든가? 문경우다.”

    그 말을 듣고서야 흑풍사우 전원의 이름을 떠올린 강엽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흑풍사우는 은퇴한 걸로 아는데?”

    “대형하고 누님은 은퇴하셨지. 두 분은 그 동네에 살고 계셔. 아, 누님은 임신하셨다.”

    그러고 보니 흑풍사우의 대형인 흑수양과 셋째인 막도희가 성혼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게 벌써 여덟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러는 너는?”

    “나야... 다시 도시로 왔지. 땅 파먹고 사는 일은 나랑 너무 안 맞아서. 지금은 장경을 대신해서 잠시 객잔일을 맡아주는 중이야. 장경이 휴가를 갔거든.”

    객잔은 개점 휴무나 다름없고 새로운 의뢰도 수주하지 않는다. 다만 기존에 맡은 일거리들이 끝나면 완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낭인들에게 의뢰비를 주고 있었다.

    강엽의 표정이 살짝 떫어졌다.

    “휴가 갈 거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와야 하나?”

    “의뢰 때문에 그래?”

    “맡겨놓은 게 있어서.”

    “아, 그거.”

    뭔가 아는지 문경우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돌아왔을 땐 손에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안 그래도 장경이 네가 오면 이걸 주라고 하더라고. 네 물건이 안가에 있다고 하던데.”

    일전에 흑접의 습격으로 집이 박살난 강엽을 위해 장경이 마련해준 낭인전의 안전가옥.

    강엽은 문경우가 준 열쇠가 안가의 금고 열쇠임을 깨달았다.

    “고맙다.”

    “근데 같이 오신 소저는...?”

    문경우가 백서희를 곁눈질했다.

    눈에 띄는 용모를 가리기 위해 회색 피풍의 위로 죽립을 걸친 차림새.

    그러나 문경우는 죽립 아래로 살짝 드러난 유려한 턱선만으로 그녀가 보기 드문 미인임을 알아봤다.

    강엽이 문경우와 얘기하는 동안 백서희는 오랜만에 방문한 청송객잔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경우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살짝 죽립을 들어올리며 씨익 웃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절세미녀의 미소에 문경우가 넋이 나갔을 때 강엽이 말했다.

    “내 일행이다. 낭인은 아니야.”

    “아, 그, 그래. 근데 이런 말하긴 좀 그런데 낭인이 아니면 같이 안가로 가는 건 좀....”

    아무래도 비상시를 대비한 은신처이다 보니 외부인을 들이기는 망설여졌던 것일까.

    하지만 강엽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도 안가가 어딨는지 알고 있어.”

    안가로 피신했을 때 백서희도 함께 묵었으니 굳이 혼자서만 갈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안가에서 묵지.”

    “중경에 아예 돌아온 거냐?”

    “아니, 다시 떠날 거다.”

    막 객잔을 나서려던 강엽이 뭔가 떠올리고는 걸음을 멈추고 문경우를 돌아봤다.

    “참, 저번에 흑수양이 팔았던 집 말이야. 얼마 전에 무너졌다. 추억이 많은 집일 텐데 유감이야.”

    “으음, 장경에게 들었어. 흑접의 살수들이랑 싸우다가 무너졌다면서?”

    그 흑접의 소속이었던 백서희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지만 문경우는 미처 보지 못했다.

    입 안에 감도는 쓴맛을 삼키면서 말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나보단 집주인 마음이 더 쓰릴 거 아냐?”

    강엽이 공짜로 들어와서 살던 것도 아니고 당당히 돈을 내고 산 집이었다. 그런 집이 몇 년도 아니고 몇 달 만에 폭삭 무너졌는데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집을 몇 채는 살 만큼 돈을 벌어놔서 망정이지, 전 재산이었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문경우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얼굴 봐서 반가웠다.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만나자고.”

    * * *

    딸깍!

    문이 열리면서 안에 있던 물건들이 드러나자 방 안에 청아한 향기가 한가득 퍼졌다.

    코 끝에 들어오는 향을 맡은 백서희가 코를 킁킁거렸다.

    “무슨 약냄새가 나는데... 안에 뭐가 든 거야?”

    “영약.”

    “어?”

    “전에 장경에게 부탁했거든. 시중에 풀린 영약이 있으면 종류 불문하고 구해달라고.”

    고수의 피를 마시면 축기량이 늘어났기에 영약이 절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모아두면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되팔지 않았다.

    ‘백서희의 축기량은 대략 팔십오년 가량.’

    그녀의 나이를 감안하면 상당한 축기량이었다.

    하나 앞으로 싸워야 맞닥뜨릴 적들을 생각하면 부족한 게 사실.

    이름과 등급이 적혀있는 목함을 일일이 살핀 강엽은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꺼냈다.

    “최상품의 백년하수오다.”

    백 년 동안 땅밑에 묻혀 있던 하수오였다. 한 뿌리에 십만 냥을 헤아리는 값비싼 영약.

    생각지도 못한 기연을 금고에서 맞닥뜨린 백서희는 입을 헤 벌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 잠깐. 그걸 나한테 주겠다고? 네가 먹는 게 이득 아니야?”

    “어차피 난 못 먹는다.”

    그나마 혈공진기와 가까운 음한지기라면 쓸모가 있겠지만 열양지기는 그리 큰 효용이 없었다. 양생의 기운은 혈공진기와 상극이라서 독이나 다름없다. 혈공진기를 고찰하고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강엽은 그 사실을 깨우쳤다.

    이유를 들은 백서희는 납득하면서도, 백년하수오를 받는 것에 못내 부담을 느끼는 눈초리였다.

    “...솔직히 네가 뭘 믿고 나한테 이런 걸 주는지 모르겠어. 내가 훌쩍 떠나면 어쩌려고?”

    “그래서 떠날 거냐?”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상관없지.”

    설령 그녀가 떠나더라도 지금까지 도움받은 걸 생각하면 아깝지 않았다.

    만약 그녀를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서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자신 역시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터.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하는 세상이야.”

    당장 낭왕의 일만 해도 그렇다.

    그가 위해를 가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을 맡길지는 모르는 일. 강엽 혼자서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다 떠나서 난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그러려면 힘을 길러야지.”

    “....”

    “음, 내 말이 이상한가?”

    “...아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 백서희가 무언가 결심하듯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빙긋 웃었다.

    “좋아! 이거 먹고 팍팍 강해질 테니까 나중에 내가 너보다 강해졌다고 후회하지나 말라고.”

    “그런 건 일단 강해지고 나서 얘기해라.”

    작게 실소한 강엽이 백년하수오를 통째로 건넸다. 호법을 설 테니 운기하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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