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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146화 (146/450)
  • 23화. 수색 (6)

    산중의 응달을 이용해서 관제묘로 돌아온 강엽은 뒤편에서 기다리는 하후진을 발견했다.

    “해가 떴는데 괜찮은 거냐?”

    “버틸 만해.”

    직전까지는 흑무암쇄진을 둘러서 버텼기에 화상을 입는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교위 그 새끼는?”

    강엽은 대답 대신 검지를 땅밑으로 향했다.

    죽어서 묻었다는 의미.

    원래는 당우경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지만, 죽어서도 꿈틀거리는 진기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진기가 시기(屍氣)로 변하지 않다니....’

    무림 고수가 죽으면 단전에 남은 기운은 시기로 변한다.

    하지만 교위의 단전에 남은 진기는 성질이 변하기는커녕 끈덕기게 생존하고 있었다.

    ‘마치 숙주의 몸을 차지한 기생충처럼.’

    숙주가 죽었는데도 살아있는 진기. 비약으로 변질된 진기가 얼마나 이질적인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처음 각성했을 당시 강엽의 의지와 상관없이 경맥을 일주천했던 혈공진기처럼 말이다.

    ‘물론 완전히 같진 않지만....’

    교위의 몸에 남은 진기와는 다르게 혈공진기는 햇볕에 노출되면 돌처럼 경직된다.

    그렇기에 햇볕에 노출되는 동안엔 재생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반면 교위의 진기는 혈공진기처럼 가공할 힘을 발휘하진 못할지언정 햇볕 아래에서도 무사했다.

    만약 혈공진기의 특성을 따서 혈교가 비약을 만든 것이라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혈공진기와 비슷한 효능이 있는 비약을 만들 수 있었을까.

    ‘모산혈조의 작품일 수도 있겠어.’

    진조와 알고 지냈던 모산혈조. 그라면 혈공진기의 특성을 알고 그 힘을 모방해보려고 시도했을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비약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잡아다 인신공양의 제물로 삼았을지도 모를 일.

    “.......”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약을 제조하는 현장을 직접 본다면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실정이다.

    뭐라도 건지기 위해선 아쉬운 대로 교위의 시체라도 검시해봐야 할 듯싶었다.

    [교위가 죽은 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삼화취정의 고수가 지닌 기감은 방원 수십 장을 아우르는 만큼 육성으로 내뱉어서 좋을 게 없었다.

    하후진도 눈치 빠르게 알아듣곤 전음으로 답했다.

    [흠, 당문엔 숨기려고?]

    [그보단 내가 먼저 연구하고 싶어서. 당우경에게 넘기면 그럴 기회가 없겠지.]

    [뭐... 네가 알아서 해라. 나야 그쪽은 쥐뿔도 모르니 뭐라고 해줄 말이 없구만. 근데 어떻게 하려고?]

    [술법 쪽을 파보려고.]

    비약의 탄생에 모산혈조가 관계했다면 술법이 쓰였을 테니 그쪽을 조사하면 뭔가 알지도 몰랐다.

    흑접주의 비고를 얻고, 흑룡교주의 기억을 일부 물려받은 덕에 술법에 대한 영감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향상된 것이다.

    그때 백서희가 기지개를 켜며 나타났다.

    “어휴, 밤에 한숨도 못 잤네.”

    “밤새 간호했나?”

    “응. 당묘정이 다 했지만 나도 거들었거든. 다 벗기고 치료했는데, 아무리 애가 어려도 외간 남자를 들이는 건 그렇잖아?”

    “표정이 좋은걸. 차도가 있는 모양이지?”

    “당묘정 말로는 몇 시진만 늦었어도 손을 쓰지 못했을 거라더라.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백서희가 말갛게 웃었다. 피로한 기색이 남아있긴 해도 구김살 없는 환한 미소였다.

    그러다 뒤늦게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애초에 그런 일을 겪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어쩔 수 없지. 넌 할 만큼 했다. 네가 찾은 덕에 아이를 구할 수 있었던 거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운걸.”

    피식 웃은 백서희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당문은 여기 약초 구하러 왔나 봐. 이쪽에만 나는 귀한 약초가 있다던데.”

    “높으신 분들이 그런 일을 하나?”

    당우경이나 당묘정이나 약초나 캘 신분은 아니다. 약초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텐데?

    “나도 궁금해서 슬쩍 물어봤는데 가르침이라고 하더라. 활수명의가 당묘정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어디에서 어느 약초가 나는지 가르쳐줬대. 강호에 나왔을 때 약초를 캐야 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하긴 당문의 약당이라면 모를까 바깥에서 급히 약재가 필요할 경우엔 현지 조달을 해야 했다.

    근처에 약방이 없거나, 있어도 약방에 필요한 약재가 없다면 다른 방법이 없을 테니까.

    “근데 혈귀 새끼들이 사람들을 잡아가뒀다면서? 새벽에 잠깐 밖에 나왔을 때 들었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동굴에서 사람들을 발견한 이야기에 사견을 섞어 설명하자 백서희와 하후진의 안색이 굳어졌다.

    하후진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신공양이라니....”

    “완전 미친 새끼들 아냐?”

    백서희도 인상을 썼다.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서 겪은 게 있다 보니 남일 같지 않았다.

    “확실한 건 아니야. 비약을 제조하는 현장을 보거나 증거를 찾지 못한 이상은 다 추측이지.”

    “그러고도 남을 새끼들이잖아.”

    “...찾을 방법은 있냐?”

    하후진이 물었다. 비약을 어디서 만드는지는 몰라도 방비가 허술할 리가 없었다.

    분명히 사람들이 찾기 힘든 곳에 숨겨뒀을 것이다.

    “그 새끼들 본거지에서 만들었으면 답이 없는데.”

    “내 생각에 총단은 아닌 것 같다.”

    “어째서?”

    “나랑 백서희는 불과 며칠 전에 단혼마백 일당과 싸웠지. 하지만 그땐 이런 비약을 못 봤어.”

    “그렇네. 위기에 몰렸어도 이상한 약을 처먹진 않았어.”

    물론 부작용 때문에 망설일 수도 있지만, 당장 목숨이 날아갈 판인데 한사코 거부하는 것도 이상했다.

    “단혼마백이 싫어했을 수도 있지만... 그놈 성격이라면 자기는 안 먹어도 부하들이 먹는 것까지 막진 않았겠지. 총단에서 만들었다면 받아왔을 거다.”

    아마 다른 데서 만들어서 먼저 이쪽에 지급했을 공산이 컸다.

    ‘어쩌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수도....’

    상식적으로 대륙을 가로질러 제물을 운반할 리는 없으니, 비약을 제조하는 현장은 가까운 사천이나 운남, 귀주 등지에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리라.

    그렇게 일행이 각자 생각에 잠겨있는데, 문득 시뻘건 불꽃이 푸른 창공을 가로질러 펑 터졌다.

    암야대의 신호탄이었다.

    * * *

    “당문이 여긴 어쩐 일이지?”

    한 손에 섭선을 살랑거리는 청년.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풍류공자라고 생각했을 청년이 짜증난 말투로 중얼거렸다.

    피투성이가 된 당문의 무인을 내려다보는 눈을 얼음장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청년을 호종하는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홍성표국(鴻聲鏢局)이라는 위장 신분을 걸쳤으나, 기실 그들의 정체는 혈교였다.

    관제묘의 교도들이 관리하는 제물들을 원활히 인수인계받기 위해 표국으로 위장한 것.

    문제는 관제묘로 가는 길을 당문의 무인들이 떡하니 가로막고 이 앞으로는 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무언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청년은 얌전히 물러나는 대신 공격하는 것을 택했다.

    상대가 당문일지라도 물러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뿐더러, 그들을 보는 당문 무인들의 눈빛에도 한 줄기 짙은 의혹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의심을 산 마당이니 당문 무인들을 잡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볼 셈.

    굳이 청년이 나설 것도 없이, 청년이 이끌고 온 교위들과 평교도들이 당문 무인들을 제압했다.

    “쿨럭! 죽...여라!”

    “죽기를 바라나?”

    내가중수법에 치명상을 입고 각혈하는 암야대 무인의 뒤통수에 청년의 차가운 눈빛이 작렬했다.

    퍼억!

    청년이 소매를 휘두르자 두개골이 터진 무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당문호!”

    “육시를 할 혈귀 새끼들! 기필코 죽여버리겠다!”

    암야대의 무인들이 원독에 사로잡혀 악담을 퍼부었지만 청년은 태연자약했다.

    “죽여달라고 하니 죽여줬는데 문제 있나?”

    “후회할 것이다!”

    암야대의 무인들은 살기를 토해내면서도 절대 산 위에 당우경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당문을 대표하는 고수의 등장에 혈교도들이 겁을 먹고 줄행랑을 칠까 염려했기 때문.

    “후후, 믿는 구석이 있나 보구나. 하기사, 신호탄까지 쐈는데 네놈들만 오진 않았겠지?”

    당문 무인들의 생각과 달리 청년은 방심하지 않았다. 어쩌면 생각지도 못할 고수가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부 죽여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무릎 꿇은 암야대 무인들의 목에 칼날이 떨어졌다.

    굴러다니는 머리를 발로 걷어찬 청년이 이어 말했다.

    “전원, 여차하면 ‘혈라분(血羅粉)’을 복용할 준비를 하도록. 그리고 너.”

    지목받은 자는 표사로 위장한 교위였다.

    “네, 교령님.”

    “넌 마을로 돌아가라. 우리가 반나절 내로 도착하지 않으면 교성께 우리가 전멸했음을 말씀드려.”

    “제게도 이교의 죄인들과 싸울 기회를 주십시오!”

    “아둔한 놈, 누군가는 소식을 전해야 할 것 아니냐? 네가 우리 중에 가장 기마술이 출중하니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이다.”

    “...알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가라.”

    말 위에서 혈교의 예법을 취한 교위는 즉시 말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구름처럼 피어오른 흙먼지 너머로 질주하는 인마를 흘긋한 청년이 돌연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호탄을 보고 지원하러 온 암야대의 무인들이 목이 떨어진 동료들의 참상에 눈을 부릅떴다.

    “이놈들이 감히 본가의 무인들을 해쳐!?”

    “곱게 죽을 생각은 말아라!”

    각종 암기를 든 암야대 무인들이 혈교도들의 머리 위로 손에 쥔 것을 뿌렸다.

    가히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암기 세례에도 청년은 느긋하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기파가 출렁이더니 공력이 깃든 암기 다발들이 힘을 잃고 우수수 떨어졌다.

    “아니!?”

    “관제묘에서 온 걸 보니 그쪽 교도들은 이미 순교했겠구나.”

    이교의 죄인들과 맞서 싸우다 죽는 것은 순교이며, 그렇게 죽은 교도들의 이름은 혈교의 진혼비(鎭魂碑)에 새겨져 세세토록 전해진다.

    그렇기에 혈교도들은 싸우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 그것이 형제들의 죽음에 분개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청년의 비탄에 다들 짙은 살기를 토하는 찰나였다.

    암야대의 무인들과는 달리 하늘색 장삼을 나부끼는 청수한 중년인이 암야대의 뒤로 조용히 착지했다.

    “홍성표국... 사천에선 본 적이 없는 표국이군. 위표(僞鏢)인가?”

    강호 세력이 편의를 위해 표국으로 위장하는 것을 표사들은 위표라고들 부른다.

    하나 청년은 대답하는 대신 눈매를 얇게 떴다.

    중년인은 아무런 기세도 내뿜지 않았음에도 본능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누구냐?”

    “당우경이라 하오.”

    “활수명의...!”

    “관도가 나 있지도 않은 깊숙한 산자락에 짐마차들을 끌고 왔군. 하물며 본가의 무인들을 해쳤다면, 관제묘의 혈교도들과 한 패라고 봐도 무방할 터.”

    말을 조곤조곤하지만 청년을 내려다보는 당우경의 목소리엔 슬픔과 분노가 묻어났다.

    스스로를 의원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싸움을 즐기지 않으나 그 역시 당문의 일원이었다.

    은수분명(恩讎分明). 은혜와 원한을 분명히 하여 철저히 갚으라는 당문의 오랜 가훈이다.

    당문의 활수는 사람을 살리지만, 당문이 공격받았을 때는 살수가 된다.

    하지만 이번엔 그 대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의원 나리, 설마 약속을 잊진 않았겠지?”

    천하의 활수명의에게 무례하게 굴면서 칼등으로 어깨를 툭툭 치는 사자머리 청년.

    어지간한 기둥보다 도면이 넓은 대도를 한 손으로 움켜쥔 하후진이 당우경의 옆에 섰다.

    “저 기생오래비 새끼는 내 먹이니까 건들지 마쇼.”

    그 무례한 태도에 암야대의 무인들이 적을 앞에 두고도 눈총을 주었지만, 하후진과 눈이 마주치자 일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죽 올린 얼굴이 살기와 희열로 점철됐던 것이다.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이글거리는 투기를 발산한 하후진이 육십 근이 족히 넘는 대도를 한 손으로 훙훙 돌리며 당우경을 돌아봤다.

    자신의 싸움을 방해하면 당문이든 뭐든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적인 눈빛.

    “사람 살리는 손으로 싸울 생각은 마쇼. 저런 놈들 쳐죽이는 건 나 같은 인간 백정의 일이니까. 애초에 윗대가리는 내가 맡기로 했잖수?”

    “하나 저들은 본가의 무인들을 해쳤소이다. 인솔자로서 마땅히 내가 징치해야지.”

    “아, 몰라, 몰라! 아무튼 저놈들은 내 먹잇감이야. 내 먹잇감 빼앗으면 나랑 사생결단하겠다는 걸로 알 테니까 알아서 하쇼!”

    “고집불통에 막무가내로군.”

    “의원 나리는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게 뭔지 아쇼?”

    “...?”

    “암기를 맞고 고슴도치가 되는 것? 중독당해서 오장육부가 꼬이는 것? 둘 다 아니올시다. 불에 타죽는 게 가장 고통스럽지!”

    “...!”

    화르륵!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대도로 옮겨붙은 시리도록 푸른 창염.

    하후진은 당우경의 대답도 듣지 않고 냅다 뛰어내리며 창염에 휩싸인 도격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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