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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145화 (145/450)
  • 23화. 수색 (5)

    시간이 지나면서 사방으로 당문 무인들이 속속들이 합류했다.

    강엽에게 제압당한 두 명을 제하고도 많은 당문 무인들이 주변을 수색하기 위해 흩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집합한 당문 무인들은 도합 서른 명에 이르렀다.

    숫자는 적지만 숙정방이나 양견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렬한 기도를 흘리는 고수들.

    일전에 조영옥이 숙정방을 방문했을 당시 그녀를 호종한 태화문의 고수들과 맞먹는 수준이다.

    암야대(暗夜隊), 가문의 영내 밖으로 출타하는 직계 혈족들을 호종하는 호위대였다.

    “송구합니다, 원주님.”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강엽에게 붙잡힌 청년들이 무릎을 꿇었다. 상대의 무위를 떠나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사실에 자책감을 느낀 것이다.

    당우경이 쓰게 웃었다.

    “일어나게. 상대가 자네들보다 훨씬 고수였어. 무사히 돌아온 걸로 족해야지.”

    “그래도....”

    “상대는 아미의 난풍혜검이 인정한 사내였네.”

    조금 전에 통성명을 했기 때문에 당우경은 강엽 일행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특히 강엽의 이름을 들었을 땐 상당히 놀랐다.

    “분하고 억울하면 힘을 기르게. 그리고 다시 도전하게.”

    “.......”

    고개를 떨군 청년들을 뒤로한 당우경은 관제묘의 문가에 기대고 선 강엽을 돌아봤다.

    안쪽에서 당묘정과 백서희가 소녀를 돌보는 동안 하후진과 함께 호법을 서고 있는 모습.

    당묘정이 소녀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과 별개로, 당문을 신뢰하는 기색은 없다.

    얼핏 보면 팔짱을 낀 채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 같았지만, 당우경은 강엽의 눈길이 간간이 당문 무인들의 움직임을 훑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반대편에 선 하후진도 마찬가지라서, 지루한 듯 귓가를 후비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귀영과 사자염도라고 했었나....’

    강엽은 말할 것도 없고 하후진 또한 사천 무림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얻었다. 조천방의 승리와 흑접의 멸문에 일조했다는 사실과 함께 섬서 무림에서 공훈을 세운 은천패의 낭인임이 알려지면서.

    그렇지 않아도 아미의 혜정 사태로부터 두 사람의 활약을 들은 당우경은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낭인전에 인재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화수분처럼 계속 튀어나오는구나.’

    출신과 과거를 묻지 않고 인재를 받아들이는 낭인전의 기조. 구파나 팔가에 비하면 그 역사는 짧지만, 지닌 바 힘은 그들을 뛰어넘었다는 강호의 중론이었다.

    천하 곳곳에 흩어진 낭인전의 전력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일성의 패권을 쥐는 것은 일도 아닌 바.

    그들이 돈벌이 외에 관심이 없다는 게 기존 대방파들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양측이 대화도 하지 않고, 적의도 보이지 않은 채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원주님!”

    암야대의 무인들 몇 명이 달려와서 강엽과 하후진을 힐끔거리고는 전음을 보냈다.

    암야대 무인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눈매를 좁힐 때 당우경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겁게 한숨을 내쉰 그가 두 사람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두 사람도 알아야 할 것 같구려. 본가의 무인들이 혈교도들이 숨겨놓은 것을 찾았소.”

    “그게 뭡니까?”

    “사람들.”

    “...?”

    “혈교도들이 사람들을 잡아다 동굴에 가둔 모양이오. 그 수가 수십이나 된다고 하오.”

    “...!”

    강엽과 하후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하후진에게 호법을 맡긴 강엽은 당우경과 함께 동굴로 들어갔다.

    관제묘에서 멀지 않았지만 절묘한 곳에 숨겨져 있던 탓에 이제서야 찾은 것이다.

    다행히 동굴 내부가 가파르진 않았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으음!”

    당우경이 침음했다.

    짐승이나 들어갈 법한 창살 우리에 사람들이 쭈그려 있었다.

    긴 시간 서지도, 눕지도 못한 채 학대받은 것이다.

    불안한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에 암야대의 무인들도 깊은 충격을 받은 듯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뒤늦게 한두 명이 당우경의 눈치를 보며 짧게 욕설을 주워섬길 따름.

    그러나 당우경도 말리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 탓에 경망되이 입을 놀리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암야대의 무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원주님, 어찌해야....”

    어렵사리 지시를 구하려는데, 강엽이 개중 가장 상태가 양호한 사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뉘, 뉘십니까?”

    “내가 물어야 할 말 같소만. 뉘신데 여기 갇혀 있소?”

    “우, 우린 끌려왔습니다! 전 관도를 걷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납치당했습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요! 야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자들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한번 말문이 트이자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려왔다.

    당우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양민들을 납치한 게로군. 풀어주게.”

    “존명.”

    열쇠가 없기 때문에 힘으로 부숴야 했다.

    암야대의 무인들이 공력을 싣은 병장기로 자물쇠를 부수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엉거주춤 나왔다.

    강엽 역시 자물쇠를 강제로 뜯어내서 문을 열었다. 강철로 만든 자물쇠가 수수깡마냥 부러지자 안에 있던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뭔...!?”

    “진정하시오. 난 혈교를 잡으러 온 사람이오. 저들은 사천당문의 무인들이고.”

    “사천당문!”

    곳곳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꼭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사천 제일의 대가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강호에선 독과 암기의 종가로 불리지만, 민간에선 의술로 유명했던 것이다.

    당우경이 원주로 있는 활명원(活命院)이 사천 전역에 의술을 베풀었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살렸기에 청성과 아미 못지않은 명예를 누렸다.

    두 구파가 각각 도가와 불가의 성지로서 추앙받는다면, 당문은 오직 의술로 존경받고 있었다.

    풀려난 사람들이 앞다투어 고개를 숙이며 감사했다.

    당우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한 일은 없소이다. 저 젊은이가 혈교도들을 징치했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강엽도 난처해졌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움직일 힘이 남아 있다는 데 주목했다.

    여기에 갇힌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뜻.

    “가장 오래 갇힌 분이 누구시오?”

    “접니다...!”

    젊은 사내가 힘겹게 손을 들었다.

    가장 오래 갇힌 게 빈말은 아닌 듯 볼이 홀쭉했지만, 말할 기력은 남아 있었다.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소?”

    “어두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보름이 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혈교도들이 가두기만 했소?”

    “그, 그렇습니다. 말을 안 듣거나 욕을 하면 몰매를 맞았지만요. 그리고....”

    사내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처럼 젊은 장정들은 맞는 걸로 끝났지만, 젊은 여인들은 욕을 봤던 것이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추레한 옷을 입은 여인들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숨죽여 우는 모습에 당문의 무인들이 이를 갈았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죽일 놈들 같으니....”

    강엽도 동감했다. 평교도들에겐 관심 없어서 일수에 쳐죽였는데 너무 쉽게 죽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을 핍박한 자들은 모두 죽었소.”

    “그,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오. 아, 한 명만 빼고.”

    정체불명의 비약을 먹은 교위만 사지가 잘리고 몸통이 꿰뚫린 채 죽지도 살지도 못했다.

    “도망친 건 아니니 염려하지 마시오. 뭣 좀 알아내려고 잠깐 살려둔 거니까.”

    “으음, 쉬이 입을 열진 않을 텐데... 마교도들의 광신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오. 어지간한 고문으로는 굴복하지 않을 거요.”

    당우경이 염려했다.

    “놈이 입을 여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흡혈귀와 일부 비슷한 특징을 지닌 놈이 햇볕에도 약한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비약의 출처나 제조법도 알면 좋겠지만, 놈이 알고 있다 해도 순순히 실토하진 않을 터.

    “혹시 혈교가 왜 여러분을 납치했는지 아시오?”

    “...그, 검은 옷을 입은 놈이 아까 낮에 무시무시한 말을 지껄이긴 했습니다. 저희가 제물이라고....”

    “제물?”

    영문 모를 말에 암야대의 무인들이 의아해할 때 강엽만 답을 알고 혀를 찼다.

    ‘인신공양....’

    상리를 거스르는 역천의 대법. 흑룡교가 그랬듯이 혈교도 비슷한 짓거리를 벌인 것이리라.

    짐작이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비약, 피냄새, 흡혈귀....’

    교위가 흡입했던 비약. 그게 사람들을 희생시켜 제조한 것이라면, 제물이라는 게 어떤 뜻인지도 대강 짐작은 되었다.

    암야대의 무인들이 사람들을 밖으로 데려나가는 동안 당우경의 뒤로 다가가서 작게 속삭였다.

    “당 대협.”

    “대협은 당치도 않소. 당 원주라고 불러주시오.”

    “그럼 당 원주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혹시 이 가루가 뭔지 아십니까?”

    교위에게서 빼앗은 가죽주머니.

    그 안에 들어있는 붉은 가루를 본 당우경의 눈에 깊은 의구심이 떠올랐다.

    “희미하게 피냄새가 나는구려. 주머니에 피가 묻은 것 같진 않고. 가루에서 나는 것 같은데...?”

    “교위한테서 빼앗은 겁니다. 놈이 이걸 먹고 괴물로 변했습니다.”

    “괴물로 변하다니?”

    “몸이 붉어지더니 절정고수에 육박하는 무위를 뽐내더군요. 여러모로 손색은 있지만요.”

    싸우면서 보고 겪은 것을 설명하자 당우경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암야대의 아이들이 공자가 교위를 잔혹하게 처단하다는 것을 봤다고 하더구려. 이 가루와 관련이 있소?”

    “이걸 흡입한 뒤에 놈의 생명력이 끈질겨지더군요. 어지간해선 죽지 않을 것 같아서 강수를 뒀습니다.”

    점혈을 짚는 방법도 있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사지를 자른 것이다.

    “그 교위라는 자, 내가 봐도 되겠소?”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습니까?”

    일단 놈이 동이 터도 살 수 있나 봐야 했다. 재수 없으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겠지만....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흡혈귀의 질긴 생명력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면 내일 동이 틀 때까지는 살아남을 터.

    만약 놈이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해도 시체가 남아있는 한 문제될 건 없었다.

    * * *

    교위를 꽂아둔 바위로 왔을 때 강엽은 자신이 오판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죽창을 꽂아둔 바위 위엔 아무도 없었다.

    “어마어마한 근성이군.”

    사지가 잘리고 구멍이 뚫린 몸으로 도망칠 줄이야?

    바위에서 이어진 핏줄기는 계곡물 쪽으로 이어지다 물과 만나면서 끊어졌다.

    ‘물살을 이용할 셈인가?’

    평범한 사람이 그런 부상을 입은 채 급류에 휘말리면 십중팔구 죽겠지만, 이만큼 강인한 생명력이라면 살아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강엽의 얼굴에 근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귀찮은 일을 맞닥뜨렸다는 표정.

    놈이 도망칠 줄은 몰랐지만, 쫓을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위에 고인 피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를 섞어 양피지에 떨어트리고 진언을 외운다.

    혈종술이 놈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가깝군.’

    물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자 수풀 사이로 보이는 널버르진 몸뚱이.

    흉하게 피딱지가 진 사지엔 뼈가 갈퀴처럼 날카롭게 돋아 있었는데, 땅바닥에 난 자국을 보면 그걸로 긁고 올라온 것 같았다.

    몸뚱이가 깔리는 바람에 바짝 누운 수풀 위로 피와 물기가 번진다.

    “.......”

    발끝으로 몸을 뒤집었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

    죽은 생선처럼 흐리멍텅한 눈빛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필사적인 의지로 몸통을 꿰뚫은 죽창을 빼고 여기까지 헤엄을 쳤지만, 끝내 살아남지는 못한 것이다.

    “역시 이렇게 되나....”

    놈을 동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계곡 위쪽 볕이 잘 들 만한 곳에 놈의 시체를 걸어둘 뿐.

    그렇게 시간이 흘러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교위의 시체를 면밀히 관찰한 강엽이 눈썹을 치떴다.

    ‘...아무 변화도 없나?’

    불에 타진 않아도 뭔가 변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음으로 다시 한번 내부를 살펴봤고,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다.

    비약으로 혈공진기와 비슷한 성질을 지닌 진기가, 힘겹게 살아남아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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