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44화 (144/450)

23화. 수색 (4)

혈교의 교위가 흡입한 비약.

강엽은 약효가 어떤지 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대신 찬찬히 압박을 가했다.

“이게 전부냐? 실망인데?”

“우오오오오오!”

“전에 싸웠던 교위들만 못해. 이래서야 장원은커녕 과락만 받겠는데... 교위는 노름으로 땄나?”

“닥쳐라-!”

“무공보단 입냄새가 더 치명적인걸. 기뻐해라. 낙제점에서 십점은 올라갔어. 네 입냄새라면 삼화취정의 고수들도 도망갈 거다.”

“카아아아악!”

괴성을 토한 교위가 팔다리를 휘젓자 두꺼운 나무들이 부서지고 바위가 쩍쩍 갈라졌다.

궁술을 성명절기로 쌓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괴력.

투과앙!

장풍을 맞은 계곡 위로 하얀 포말이 삼 장 높이까지 치솟는다.

직전에 어둠 속에 녹아들어 피한 강엽이 계곡의 수면을 곁눈질하며 안색을 굳혔다.

‘위세만 보면 절정고수라고 해도 믿겠어.’

통상적으로 검기나 도기 등으로 사람을 해할 수 있으면 절정고수라고 부르는데, 경력의 발출만 놓고 보면 교위는 절정고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도망치지 마라, 놈!”

터엉!

강엽과 박투를 벌일 수 있는 강건한 육신까지.

‘약으로 이렇게 변하는 게 말이 되나?’

지금 이 순간에도 강엽은 딱 맞상대를 할 정도만 공력에 제한을 두고 있었다.

정확히는 교위의 내공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춘 채 공방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교위가 이 정도로 싸우는 게 놀라웠다. 호신기를 쓰는 것도 아닌데 전혀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내가기공과 외공을 함께 익힌 고수를 상대하는 듯한 기분.

“흡혈귀는 아닌 것 같은데... 육신의 강건함은 흡혈귀에 필적하는 수준인가?”

“뭐라고?”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교위가 눈썹을 치떴지만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엇박자로 교위의 공격을 유도하고, 잘린 팔목에서 돋아난 뼈칼이 머리로 짓쳐드는 순간 급격히 가속했다.

“어엇!”

완벽히 허점을 찔린 교위는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경악했다.

그러나 대응할 틈새도 없었다. 짧게 끊어친 발경 권격이 옆구리를 후려쳤기에.

투앙!

“끄어...!”

맹장이 진탕되는 충격.

새우등처럼 굽힌 교위가 핏물을 울컥 쏟아내는 찰나, 묵직한 발길질이 명치를 관통했다.

그나마 팔을 교차해서 막았으나, 강엽의 족격은 팔 너머 교위의 몸통에 바로 꽂혔다.

투아앙......!

물수제비를 뜨듯 수면을 몇 번이나 튕긴 교위의 몸뚱이가 큼지막한 바위에 처박혔다.

“쿨럭! 우웩!”

내장 조각이 섞인 핏물이 흘러내린다.

교위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

“부, 분명 막았는데...?”

차라리 팔이 부러졌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비약의 공능을 빌어 분에 넘치는 육신과 공력을 손에 넣었다 하나, 강엽의 권격은 그 이상이었으니까.

하지만 팔은 멀쩡하게 두고 그 너머에 충격을 입혔다. 그 때문에 온전한 공력을 감당해야 했다.

“격산타우(隔山打牛)는 처음 보나?”

“...!”

산을 격해서 소를 친다는 의미.

호신기나 외공으로 인한 단단한 외피를 건너뛰고 충격을 전달한다는 초고수들의 기예였다.

‘사실 이런 놈한테 쓰기는 아깝지만....’

단혼마백의 격공을 몸소 겪었을 때의 감각을 수없이 참오한 끝에 터득한 수법.

삼화취정에 오르지 못했기에 단혼마백처럼 능란하게 쓰진 못했지만, 강엽은 이미 격공의 초입에 발끝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

교위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전설의 영수처럼 여겨지던 기예가 적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동안 강엽은 초음으로 교위의 내상을 살폈다.

‘조금씩 회복하는 건가....’

그처럼 급속도로 아물지는 않았지만 요상약을 복용한 것처럼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흡혈귀와 완전히 같진 않아도, 흉내 정도는 냈다고 볼 만한 약효.

이쯤 되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햇볕에도 약한지 볼까?”

“무슨... 크아악!”

교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섬전처럼 뽑힌 자색 검날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지를 자른 것이다.

비명을 지르는 교위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간 강엽은 놈을 큼지막한 너럭바위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계곡 옆쪽의 대나무숲에 가서 적당한 길이의 대나무를 잘라서 죽창을 만들었다.

“괴물이 됐으니 사지가 잘려도 당장 죽진 않겠지? 동이 터도 버틸 수 있나 보자고.”

콰직!

“끄으아아악!”

공력이 깃든 죽창은 강철 못지않게 단단해진 붉은 피부를 뚫고 바위 깊숙이 박혔다.

사지를 잘랐음에도 그에 만족하지 않고 바위에 단단히 고정한 것.

이제는 흡혈하는 것도 무의미한 하수를 상대한 것은 놈이 햇볕에도 버티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하후진에게 맡긴다면 아예 실험도 하지 못할 만큼 홀라당 태워먹을 테니까.

만약 놈이 햇볕에도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러던 순간이었다.

“...!”

강엽의 눈매가 갑자기 꿈틀거렸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거리는 상당히 멀다.

하나 기감으로 상대의 존재를 알아차린 강엽은 초음의 파동으로 상대의 위치를 특정했다.

“나와.”

북해의 바다처럼 싸늘한 목소리.

밤벌레들은 물론이고 고통 속에서 울부짖던 교위마저 목소리에 실린 살기를 느끼고 끅끅거렸다.

계곡 너머 울창한 수림을 꿰뚫어본 강엽의 눈길은 그 안에 숨은 상대를 찾아냈다.

공력이 실린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 너머로 뻗어간다.

“두 명이군. 한 놈은 암기를 다수 무장했고, 다른 한 놈은 검을 들고 있나.”

“...!”

“근데 약초 냄새가 살짝 나는 것 같은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상대가 헛숨을 삼켰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뭐, 좋아. 이렇게 말했는데도 나오지 않는다면....”

검을 휘둘러 교위를 관통한 죽창을 반으로 잘라내고, 남은 절반을 역수로 쥐었다.

애초에 죽창의 길이가 일 장에 달했기에 절반으로 잘랐어도 던질 만한 길이가 확보되었다.

“이 혈교놈과 한 패로 간주하겠다.”

“자, 잠까...!”

그들이 다급함에 무어라 외치려는 순간, 강엽의 손을 떠난 죽창이 포물선을 그리며 부유했다.

“저, 저 미친 작자가!”

“튀어!”

허겁지겁 풀숲을 빠져나온 그들은 앞에 계곡물이 있는 것도 잊고 풍덩 빠졌다.

그리고 그들이 방금까지 있었던 곳에 죽창이 꽂히면서 땅거죽과 수풀을 헤집었다.

그대로 있었다면 꼬챙이가 됐을 거라는 생각에 두 사람이 바르르 떨었을 때였다.

“어디서 온 누구지?”

저승사자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

어느새 그들 앞의 바위에 올라온 강엽이 자성검을 늘어뜨린 채 두 사람을 굽어보고 있었다.

한광을 줄줄이 흘리는 검은 동굴과 얽히는 순간 그들은 등줄기가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사천을 대표하는 명문 정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무공에 큰 자부심을 지닌 그들이지만, 강엽과 마주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대적 불가의 고수임을 직감했다.

그래도 상대에게 기죽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애써 어깨를 펴고 소속을 밝히려는 찰나.

강엽이 한발 앞서 그들이 입은 녹색무복에서 은색으로 수놓인 글자를 발견했다.

“...당(唐)?”

사천 무림에 수백의 무림 문파가 있으나 당이라는 글자로 소속을 드러내는 곳은 하나밖에 없다.

강엽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사천당문이 여긴 왜 온 거냐?”

사천삼패의 일좌이자 팔대세가의 일익.

그들은 독과 암기의 대종사 사천당문의 혈족들이었다.

* * *

강엽이 사천당문의 무인들을 끌고 관제묘로 돌아왔을 땐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천당문의 청년들과 같은 무복을 입은 자들이 일행과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선두에 있는 중년인과 묘령의 여인이 강엽과 함께 온 청년들을 발견하고 께름칙한 표정이 됐다.

강엽과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오는데 둘 다 썩은 웃음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자네들... 왜 그러고 있나?”

“그 사람은 누구예요?”

중년인과 여인이 연달아 물었다.

일행도 입 다물고 있진 않았다.

“어딜 갔다 이제 와?”

“그 혈귀 새끼는 어딨냐? 뒈졌어?”

동시에 질문을 퍼부은 양측이 서로를 응시했다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의 여인이 물었다.

“그쪽 일행인가요?”

“...뭐, 그렇수다. 대체 왜 저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엽, 걔네들은 뭐냐?”

“오다가 주웠다.”

“주워...?”

“교위놈을 때려눕히는데 훔쳐보고 있더군. 누군지 몰라서 일단 제압했는데 사천당문 혈족이었어.”

그의 손에 잡힌 사천당문의 청년들은 강엽의 손이 느슨해지자 안도하며 자기 진영에 합류했다.

어쨌든 상해를 입힌 것도 아니기에 사천당문의 무인들로선 강엽을 추궁할 명분이 없었다.

대신 선두에 있는 중년인이 미간을 좁혔다.

“...공자께선 뉘시오?”

무인보다는 학사나 의원이 어울리는 맑고 선량한 인상이었다. 근육이 거의 붙지 않아 호리호리한 데다 병장기까지 패용하지 않았기에 얼핏 보면 무인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초음으로 중년인의 단전을 살핀 강엽은 그가 가공할 무력의 소유자임을 알아보았다.

‘삼화취정에 오른 무인이라....’

전강, 단혼마백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삼화취정의 초고수다. 사천당문이 대방파임을 감안해도 이만한 초고수가 흔치는 않을 터.

반면 여인은 중년인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축기량이 꽤 많은 게, 다른 무인들과는 격이 달랐다.

뭣보다 인중봉황이라 부를 만큼 빼어난 용모를 자랑했기에 중년인보다도 눈에 띄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강엽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활수명의(活手名醫) 당우경과 독묘화 당묘정.’

당문주의 아우이자 당문 제일의 의원이라는 활수명의.

조영옥, 홍가려와 함께 사천삼미로 꼽히는 절세미인 독묘화.

독묘화는 그렇다 쳐도 활수명의의 존재만으로도 경계해야 마땅했다. 상대는 단혼마백과 동급의 고수. 지금이 밤이라도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었다.

문제는 당문의 사람들이 왜 여기에 있는가였다.

아직 상대의 목적이 뭔지 모르기에 강엽은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해보였다.

“당문의 활수명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와 제 일행은 낭인전의 낭인들로, 양견회라는 방회의 의뢰를 받아 혈귀들을 토벌하러 왔습니다.”

“낭인전의 낭인들이라....”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듣기에 따라선 불쾌할 수도 있는 질문. 실제로 몇몇 당문 무인들이 발끈해서 나서려고 했다.

다만 그전에 독묘화 당묘정이 막아섰다.

“자중하세요.”

“공녀님, 하지만...!”

당묘정이 고개를 저었다.

부드럽지만 완강한 거절에 다들 마지못해 따랐지만, 강엽을 향해선 아니꼬운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정작 질문을 받은 당우경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대들과 같은 것 같구려. 우린 산 아래 마을을 들렀다가 혈교도들을 발견했소. 세 놈 중 두 놈을 잡고 한 놈을 놓아줬는데, 놈이 이쪽으로 도망쳤소.”

하후진을 돌아보자 맞다는 듯이 입맛을 쩝 다셨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한 놈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더라. 보자마자 냉큼 죽여버렸지만.”

교의 형제들이 잡혔다는 급보를 전하러 온 혈교도는 풍파를 맞은 분타의 참상에 격분했다.

그리고 하후진은 목숨 내놓고 덤벼드는 혈교도를 양단해서 그 모진 인생을 끊어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강엽이 백서희를 향해 물었다.

“아이는 어때?”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어. 근데... 의원한테 보여야 할 것 같아. 상태가 많이 안 좋아.”

하후진과 백서희가 쫓아오지 않은 것은 관제묘에서 발견한 소녀를 돌보느라 몸을 뺄 수 없어서였다.

한데 당묘정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다친 사람이 있나요?”

백서희가 주저하자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저와 숙부님은 무인이기 전에 의원이에요.”

“데려다 줘.”

강엽의 말에 백서희가 끄덕이고는 당묘정을 향해 이쪽으로 오라고 눈짓했다. 당묘정이 움직이려고 하자 함께 있는 당문의 무인들이 호종하고자 했다.

당묘정이 거절했다.

“여러분은 대기해주세요.”

“하오나 공녀님...!”

무인들이 당우경을 향해 말려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당우경은 한술 더 떴다.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거라.”

“네, 숙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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