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재회 (4)
두 사람이 치열하게 부딪친다.
기파가 마찰하고 충격파가 겹치듯이 터지면서 주변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아주 그냥 개판이네.”
한편에서 비무를 관전하는 백서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공방을 나누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 옆에 오도카니 선 단목정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이전에 봤던 강엽과 혼섬잔도의 싸움도 놀라웠지만, 지금의 비무는 그때와 다른 의미로 격이 달랐다.
놀랍게도 하후진은 강엽과 막상막하로 겨루고 있었던 것이다.
은천패의 낭인이라고 듣긴 했지만 강엽과 대등하게 싸우다니?
“언니, 저 사람이 혼섬잔도보다 더 강한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야.”
혼섬잔도와 싸웠을 땐 흡혈귀의 능력까지 십분 활용하며 싸운 반면, 지금은 흡혈귀의 능력과 술법을 봉인한 채 무공만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래도 전에 봤을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긴 한데....”
일전에 하후진이 흑접의 총단에서 싸우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흑접주와도 싸워볼 만하겠는걸.”
이전과는 달리 창염을 수족처럼 다루는 하후진이었다.
뿐만 아니라 창룡갑이 한층 안정되면서 공력을 탄력적으로 수발하고 있다.
강엽 역시 실감하고 있었다.
‘확실히... 공력 운용이 훨씬 효율적으로 변했어.’
이전엔 쏟아내기 급급해서 낭비되는 공력이 많았다.
비유하자면 팔(八)의 효과를 얻기 위해 십(十)의 공력을 쏟아붓는 식이었다.
물론 그게 아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격을 휘두를 때마다 필살의 위력을 발휘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발휘되는 도격은 공력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실려 낭비가 심했다. 경맥에도 부담을 주기 때문에 장기전은 무리였다.
그랬던 하후진이 중단전을 개방한 뒤부터는 공력을 탄력적으로 수발하고 있다.
심지어 창룡갑의 형태도 조금씩 바뀌었다. 이전엔 상반신만 덮었던 흉갑이 팔뚝과 허벅지 일부를 감쌌던 것이다.
하후진의 움직임이 변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채찍처럼 휘어진 대도가 마치 분절한 것처럼 분신을 남기면서 여덟 개의 투로를 그린다.
염왕도법 이초식 흑승도의 현현.
“하아아아압!”
칼날의 궤적을 따라 열풍이 휘몰아친다.
‘이건?’
강엽은 진심으로 놀랐다.
열기가 부는 것은 예전과 같았지만, 이전과는 달리 한 점에 수렴하고 있었던 것이다.
‘흡자결이군. 초식을 전개하면서도 전신 발경으로 따로 공력을 운용하고 있어.’
한 손으로는 붓글씨를 쓰면서 다른 손으로는 산수화를 그리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기예.
중단전의 개방으로 공력을 수발하는 능력이 향상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거냐! 예전과 달리 이 정도로는 이제 지치지 않는다고!”
하후진의 일갈에 강엽이 입가를 씩 들어올렸다.
“그럼 따라잡아 보든가?”
사실 강엽이 피하느라 급급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 끗 차로 회피하면서도 간간이 반격을 넣고 있었으니까.
지금처럼 말이다.
투아앙!
대도를 피해서 전완근을 내려찍는 유려한 곡선 족격.
하후진은 숨이 턱 막혔다.
‘무슨 놈의 위력이...!’
창룡갑으로 막았는데도 묵직한 게 일반적인 호신기였다면 버티지 못했을 듯싶었다.
암경이 침투해서 뼈와 근육을 망가뜨렸겠지.
‘아니,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창룡갑은 공방일체의 호신강기. 공력으로 보호했다지만 오히려 강엽이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잠깐, 그건 뭐냐?”
강엽의 다리를 감싼 불그스름한 막.
얇고 불투명한 막이 창룡갑의 열기를 일소했다.
“내 호신강기다.”
“뭐?”
얼빠진 표정을 짓는 하후진을 향해 강엽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자성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한순간에 다가온 검격에 하후진의 눈이 경악을 띠었다.
“......!”
급하게 도면을 세워 검격을 막았다. 창염의 칼날을 뚫지 못한 검격이 미끄러지듯 위로 튕겨진다.
자성검법 일초식 뇌령의 약점.
한순간에 요혈을 노리고 짓쳐들지만 일격에 모든 것을 쏟는 까닭에 중간에 막히면 뒤가 없었다. 일격필살의 절초로 썼던 덴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초식 뇌익이 중요했다. 뇌령이 막혔을 경우를 염두에 둔 초식.
신법 발경에 이화접목의 이치가 실렸다.
대도에 실린 경파를 역이용해서 태극을 그리듯 회전.
직후 궤도에서 이탈한 자성검을 회수하며 검초를 날렸다.
짧게 끊어치는 검초와 길쭉하게 휘어지는 검초가 난상으로 얽혔다.
뇌익은 내공 호흡이 중요한 초식이었다. 호흡의 길이와 굵기에 따라 검세의 위력이 달라지는 까닭에.
벼락을 두른 뇌조(雷鳥)가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검격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들이쳤다.
카카카카카캉......!
“이런 씹...!”
꾹 다물린 하후진의 입매가 당혹감으로 구겨졌다.
변초와 허초를 구분하기도 전에 검세가 연쇄적으로 창룡갑을 두들기고 지나간다.
고수들의 싸움에서 자세가 무너지면 승부의 추가 기울기 마련.
수세를 강요당하자 하체를 떠받친 무게중심이 헐거워졌다.
하나 하후진 역시 숨겨둔 수가 있었다.
터어어어엉!
지금까지 모아둔 창룡갑의 열기를 한순간에 폭사, 소나기처럼 이어지던 연격을 부숴버렸다.
그럼에도 하후진은 기뻐하지 못했다. 강엽이 일부러 창룡갑을 두들겼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건 생사결이었다면 창룡갑이 가리지 못한 부위를 베였을 터.
콰아아아아앙......!
검격과 도격이 충돌하며 발생한 투명한 충격파가 너울지듯 퍼져나갔다. 지면이 뒤집어지고 멀리 떨어진 장강의 물결도 거세게 흔들린다.
반탄력에 떠밀린 두 사람이 암경을 해소하며 서로를 노려봤다.
“방금 그게 자성검법이냐.”
“그래.”
일전에 겨룰 땐 자성검법을 쓰지 않았기에 하후진은 자성검법을 처음 보는 셈이었다.
입맛이 쓴지 하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번엔 이길 자신 있었는데.”
“그때의 나였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빈말이 아니다. 막 중단전을 개방했을 때였다면 술법이나 흡혈귀의 능력을 쓰지 않고선 감당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거든.”
지난 며칠의 경험이 몇 달간의 경험보다 훨씬 농밀했다.
우우우우웅......!
다섯 개의 용환이 공명하며 바깥으로 기파를 쏟아낸다.
하후진은 벙쪘다. 중단전을 개방했기에, 강엽이 어떤 경지에 오른 건지 대략적으로 가늠이 된 것이다.
“대체 어디서 뭔 짓을 한 거냐?”
“음, 꽤 많은 일들을 겪었지.”
“뭔데.”
“일단 혈교의 교성을 죽였다.”
“...뭐?”
“교령들도 세 명쯤 죽였고, 동정귀옹인지 황충팔객인지 하는 놈들도 죽였지. 아, 며칠 전엔 태화문의 혼섬잔도라는 양반을 쓰러트렸다.”
“...!?”
상상을 뛰어넘는 말에 하후진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 * *
사정을 들은 하후진이 내뱉었다.
“미친놈.”
다시 장원에 돌아와 술을 마시면서 강엽과 백서희가 겪은 일을 들었던 것이다.
흑룡교주의 혼백이나 진조와의 만남 등 민감한 사안은 숨겼지만, 그 외의 일만 듣고도 하후진은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꽤 싸우긴 했는데 어째 너랑은 비교가 안 되는구만.”
“넌 누구랑 싸웠는데?”
“맹월림이라고 들어봤냐?”
“음?”
예상치 못한 이름에 강엽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하후진이 씩 웃었다.
“반응 보니 아는 보다?”
“이름은 몇 번 들어봤지. 이번에 혼섬잔도의 일도 따지고 보면 맹월림과 연관되었고....”
태화문의 대공자가 맹월림과 손을 잡았다는 말에 하후진이 입맛을 다셨다.
“쩝, 그런 일이 있었구만. 보통 놈들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태화문과 손을 잡았다니....”
“넌 어떻게 그놈들과 싸운 거냐?”
“우연히 만났어.”
량산에 간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그저 바람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그쪽으로 흘러들어갔다.
“그쪽엔 이족(彛族)이 많이 살아. 나도 가서 알았는데 그치들도 나름대로 무공을 익혔더라고.”
맹수들 혹은 이웃 부족들과 싸우기 위해 조상 대대로 발전시킨 무맥이 존재했다.
다만 강호인들과는 달리 문파나 방파를 만들지 않고 마을 단위로 무공을 계승하고 보전했다.
“너도 알겠지만 내 무공은 좀만 잘못되면 주변을 죄다 태워버리잖냐. 그래서 처음엔 좀 떨어진 곳에서 수련했지.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만 들렀어.”
그런데 하후진이 강호인이라는 것을 안 호기 넘치는 부족 전사들이 시비를 걸었다.
하후진도 도발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 성격이라 시원하게 부딪쳤고 말이다.
“강한가?”
“낭인전으로 치면 그래도 동패급? 마을에서 경험 많은 무인은 은패급은 되더라. 은천패급은 아니고 은인패급이지만.”
그래도 일개 마을에 그만한 무인들이 있다면 든든했다. 은패급에 동패급 몇 명만 있으면 맹수에게 시달릴 일은 없었으니까.
“생각해 봐. 그런 마을이 량산 전체에 수십 개는 된다고. 마을에 전부 은패급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다 합치면 어지간한 문파는 상대도 안 될걸.”
“대단하긴 한데 그게 맹월림과 무슨 상관인데?”
술을 들이킨 백서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독촉하자 하후진이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였다.
“쯧쯧, 성격 참 급하구만. 좀 인내심을 갖고 들어보라고. 안 그래도 그 말 하려고 했으니까.”
“.......”
깊은 빡침을 느낀 백서희의 이마에 핏줄이 삐죽 올라왔지만 하후진은 미처 못 보고 거드름을 피웠다.
“아무튼 그렇게 수련도 하고 시비 걸어오는 놈들을 때려눕히는데 못 보던 놈들이 튀어나온 거야.”
처음엔 평범한 이족 전사인 줄 알았지만, 그들은 량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운남에서 온 놈들이었지.”
스스로를 맹월림이라고 칭한 그들은 충성과 복종을 요구했다. 한족에게 핍박받는 모든 부족들을 통일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반역을 모의했다는 겁니까?”
어쩌다 보니 술자리에 함께한 단목정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강엽과 백서희도 침음했다.
“뭐,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수. 그래도 나라를 뒤엎자는 말은 안 하던데.”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진짜 반역이 되니까.”
관무불가침이니 뭐니 하면서 황실이 어느 정도 지방의 무림 세력들을 용인하고 있다지만 역모를 운운하는 순간 수십만 황군을 동원할 명분이 생긴다.
“어쩌면 진짜로 역심을 품었는지도 모르지. 세력을 넓히면 언젠가는 군벌이 될 거다.”
사실 이미 반쯤은 군벌이었다. 머릿수만 따지면 구파나 팔가 같은 대방파도 초월하리라.
“근데 그쪽은 산맥에 막혀서 군세는 못 보낼 텐데...?”
“온 놈들은 얼마 안 돼. 한 백 명쯤?”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많은 숫자도 아니었다. 량산 전체를 정복하기는 무리처럼 여겨졌다.
“근데 그놈들 중에 절정고수들이 있었단 말이야. 그놈들이 각 마을을 돌며 전사들을 굴복시키고 억지로 충성 맹세를 받아내더라고.”
물론 모두가 충성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면서 장렬히 싸운 이들도 존재했으니까.
“덤빈 자들은 모두 죽었어. 본보기였던 거지. 그리고 내가 신세진 마을로 놈들이 찾아온 거야.”
다른 마을들이 큰 피해를 봤다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하나 절정고수가 다수 포함된 무리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하후진과 친해진 마을 소년이 필사적으로 도망쳐서 마을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뒤는 대충 짐작하지? 그 녀석을 따라가서 맹월림 놈들을 죄다 박살내버렸지.”
“절정고수가 많았다면 어려웠을 텐데 용케 이겼군.”
“운이 따랐거든.”
경시할 수 없는 적들을,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마터면 염라대왕이랑 면담할 뻔했지. 다행히 늦기 전에 다른 마을에서 지원군이 와서 살았지만.”
하후진의 활약과 다른 마을에서 온 전사들의 합류로 용기백배한 마을은 맹월림의 고수들을 쫓아내버렸다.
“그리고 나는 량산의 영웅이 되었지. 내가 거기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상상도 못할 거다. 떠난다고 하니 마을 처녀들이 내가 가는 길에 눈물을 뿌렸었지....”
“...?”
뭔가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샐 조짐이 보이자 백서희가 강엽의 옆구리를 툭 치면서 전음을 보냈다.
[쟤 하는 말 계속 들어줘야 해?]
[아니, 취하면 했던 말 계속 하는 놈이다. 지금보다 더 많이 먹여서 재워야 조용해져.]
[좋아. 귀찮으니 빨리 해치워버리자.]
두 사람이 어떤 작당모의를 하는지 모르는 채 하후진은 주제에서 벗어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량산에 갓 들어갔을 때 말인데...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사부 밑에서 한창 수련하고 있을 때 만난 회족들도 참 순박한 사람들이었지. 하루는 쌀 구하러 산에서 내려가는데 마적들이 마을을 덮치는 바람에 내가...”
“.......”
슬프게도 이미 누구도 하후진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 * *
약속 장소에 찾아간 것은 다음날 초경 무렵이었다.
“노주 분타주 막이심이오.”
“강엽이오.”
노부 분타주 막이심은 터질 것 같은 근육의 소유자였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떡 벌어진 어깨 덕분에 왜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한데 그쪽은....”
“내 일행이오. 한 명은 낭인전의 낭인이고.”
백서희와 하후진이 강엽을 따라왔다.
하후진이 불퉁한 얼굴로 낭인패를 내밀자 노주 부나주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은천패...!”
“사자염도 하후진이우.”
“아, 중경 분타에 계셨던 은천패 낭인이군. 노주엔 언제 오셨소?”
“어제 도착했수다.”
노주 분타주는 난감해졌다.
은천패쯤 되면 분타의 얼굴 간판으로 통하는 만큼 누굴 좌장으로 봐야 할지 헷갈렸던 것이다.
“난 이 친구를 따라왔을 뿐이우.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쇼.”
사실 하후진은 이번 의뢰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어제 비무를 치렀을 때 내기를 걸었던 것이다.
만약 이번 의뢰가 강엽 혼자서 하기엔 어렵다면 ‘공짜’로 도와주기로 말이다.
‘썅, 왜 그런 내기를 해가지고....’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의 멱살을 잡고 그딴 내기 따윈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하후진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노주 분타주는 어깨를 추어보이고는 일행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의뢰인은 좀 전에 도착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