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시비 (4)
혼섬잔도는 물론 청우방주와 그의 식솔들까지 굴비 엮듯 묶인 채 끌려왔다.
굴욕감에 떨었지만 그들은 항변도 하지 못했다. 강엽이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아혈을 짚었기 때문이다.
“헛짓거리하면 재미없을 거다.”
비단 강엽이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아도 혼섬잔도를 십초 만에 제압한 고수의 심기를 건드릴 간 큰 인간은 없었다.
그저 강엽이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태화문과의 협상이 잘 끝나기를 바랄 수밖에.
물론 청우방주나 혼섬잔도의 부하들은 태화문이 강엽을 징치할 거라 믿으면서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강엽과 시선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코웃음을 친 강엽은 그들의 마혈까지 짚은 다음 포승줄에 묶어서 창고 안에 가두었다.
“이제부터 방주의 역할이 중요해.”
“제 역할이 말입니까?”
단목정은 의구심을 품었다.
기실 청우방과의 싸움에서 그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우리라는 말은 강엽과 숙정방이 운명공동체라는 뜻이었다.
강엽이 숙정방을 귀찮게 여기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그녀는 안색이 밝아졌지만, 곧 곰곰이 머리를 굴리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태화문의 이공녀가 온다고 하셨지요.”
“그녀가 직접 올지는 모르겠군. 워낙 바쁜 사람이라서. 만약 직접 오지 못하면 측근을 보낼 거다.”
강엽은 태화문이 아니라 조영옥에게 사람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녀가 어떤 입장을 취할지는 모르나 호의를 얻어내려면 대화의 여지를 열어둬야겠지.
“아무리 정적이라고 해도 태화문의 무인을 건드린 이상 함부로 본방을 비호할 순 없을 겁니다.”
“명분이 있어야겠지?”
“예, 청우방이 먼저 본방을 집어삼키려고 했지만 그쪽이 납득할지는 의문이고... 납득한다고 해도 이 일을 그냥 덮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방주의 생각은?”
“태화문과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걸 명확히 해야 하겠지요.”
“그게 방주가 해야 할 일이야.”
“네...?”
“일이 있어서 나랑 백서희는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다. 며칠 다녀올 데가 있어.”
그 말에 놀란 것은 단목정이 아니라 백서희였다.
“뭐어!?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강엽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한데 자리를 비우겠다니?
“약속은 약속이니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시간이 날지 몰라. 또 내가 자리를 비워야 방주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기도 하고....”
“그게 뭔 소리야?”
“내가 혼섬잔도에게 손을 내밀어봤자 어색하기만 하겠지.”
혼섬잔도의 자존심을 짓이긴 것도 모자라 사지를 박살내버렸으니 억하심정이 쌓였을 것이다.
“뭐, 그쯤 되는 고수를 제압하려면 점혈만으로는 부족하니 좀 거칠게 대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 와서 잘 대해줘봤자 어색할 거다.”
“하긴 이제 와서 친해지긴 글렀네. 안 싸우면 다행이지.”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러니 역할을 나눠야 해.”
“무슨 역할?”
“...‘착한 포쾌, 나쁜 포쾌’ 일화라는 게 있어. 쉽게 말하면 죄인을 구슬릴 때 포쾌 두 명 중 한 명은 협박하는 나쁜 포쾌 역할을 맡고, 다른 한 명은 어르고 달래는 착한 포쾌 역할을 맡는 거지.”
“음, 그렇게 하면 구슬릴 수 있나?”
“뻔한 수작이긴 하지만... 의외로 잘 먹힐 거다. 사람 마음이라는 건 그만큼 간사하니까.”
두 여인도 대강은 알아들었다.
즉, 강엽의 말은 자신이 자리를 비울 동안 단목정더러 혼섬잔도를 잘 구슬려보라는 소리였다.
단목정이 자신없어했다.
“주군,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믿어. 이건 방주만 할 수 있는 일이야.”
물론 강엽도 무턱대고 시킬 생각은 없었다. 깊이 심호흡을 하는 단목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정치질부터 시작하지.”
“저, 정치질이요?”
“정치질의 기본은 선동과 날조지만 그전에 갈라치기가 우선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적들의 세력을 쪼개야 해. 차별이 가장 쉬운 방법이야.”
“......?”
“내가 자릴 비우면 내일이나 이틀날에 혼섬잔도와 태화문 놈들을 꺼내. 부상자는 치료해주고, 삼시세끼 융숭하게 대접하고. 하지만 놈들끼리 접촉은 하지 못하도록 독방에 가둬놔.”
“어음... 도망치진 않을까요?”
“자기 목숨이 안전하다고 판단하면 도망치진 않을 거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서 홍예칠위로 하여금 혼섬잔도를 집중 감시해야겠지만....”
팔만 부러진 게 아니라 허벅지뼈까지 으스러진 혼섬잔도였다.
아무리 경지에 오른 고수의 운신이 표홀해도 그런 부상을 입고 도망칠 순 없었다.
“태화문은 융숭하게 대접하고, 청우방은 하루에 한 끼만, 그것도 꿀꿀이죽만 먹여. 그리고 적당히 때가 무르익으면 태화문 놈들 모아서 연회를 열고 책임을 청우방에 덮어씌워. 이 모든 발단이 청우방주의 아들놈이 입을 잘못 놀려서 그렇게 된 거라고.”
“.......”
말문이 막힌 두 여인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순식간에 이런 계책을 짜내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 * *
단목정에게 일을 맡긴 뒤에 강엽과 백서희는 숙정방을 나와서 북쪽으로 향했다.
장강의 뱃길을 이용해서 중경에 들른 다음 다시 가릉강을 통해 검각 남쪽의 낭중까지 가는 길.
같은 길을 수백 번 지난 백서희라면 기시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하지만 무언가를 예감했는지 그녀는 가릉강을 지날 무렵부터 입을 꾹 다물고 따라오기만 했다.
강엽도 말없이 발을 맞추며 그녀를 인도했다.
폐허가 된 흑접의 부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천장단애의 절벽.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를 면한 절벽은 웬만한 사람들은 오를 엄두도 못 낼 만큼 가팔랐지만, 두 사람은 웬만한 축에 속하지 않았다.
일전에 강엽이 강변에 둔 뗏목을 타고 절벽 아래로 이동해서 단숨에 뛰어오른다.
중간중간 튀어나온 암석이나 나무가 있었기에 벽호공을 쓰지 않아도 오를 만했다.
그렇게 중간쯤 올랐을 때 나무에 가려진 좁은 틈새를 발견한 백서희가 눈을 빛냈다.
“여기야?”
“그래. 저 안에 있다.”
그녀가 알고 싶어하는 진실.
먼저 입구로 들어간 강엽이 말문을 뗐다.
“정말 들어갈 거냐?”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후회할 수도 있다는 거지.”
꼭 진실을 알아야 할까.
백서희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강엽은 흑접주의 일기로 대강 알고 있었다.
글을 통해 피상적으로 접했을 뿐인데도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진실이 언제나 아름답지는 않으니까. 만약 모르는 게 행복하다면 돌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어.”
“하,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짝다리를 짚은 그녀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네 말대로 후회할 수도 있지. 근데 그걸 판단하는 건 나잖아? 남이 판단하는 문제가 아니라.”
강엽의 말마따나 괜히 알았다고 후회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고 후회가 안 남을까.
“지금 두려워서 돌아가면 미련만 남을 거야. 몰라서 미련 남기느니 알고 후회하는 게 나아.”
“그러냐?”
강엽도 그녀를 따라 가느다란 웃음소리를 냈다.
당연하지만 정말 백서희를 막고자 물은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가자고. 네가 안 가면 나도 못 가잖아.”
두 사람이 나란히 서지도 못할 만큼 좁았기 때문에 강엽이 먼저 가야 그녀가 뒤따를 수 있었다.
고개를 주억인 강엽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초음을 쓰지 않아도 그녀의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만큼 빨리 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묵묵히 길을 앞서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일 각쯤 걸었을 무렵.
“맙소사, 이런 데가 있었어?”
마침내 다다른 흑접주의 비고.
백서희의 눈이 토끼눈처럼 둥그레졌다.
흑접에 십수 년을 몸담았는데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운 좋게 발견했지.”
혼백이 된 자성검호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겠지.
입을 헤 벌린 백서희를 일별한 강엽이 서가에서 책을 꺼냈다.
“이건...?”
“읽어봐.”
직감적으로 이 안에 진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걸까.
조금 전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역시 진실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는지 책을 받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정 힘들면 다음에 다시 와서....”
“...아니야.”
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손에 쥐어진 책을 결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표지를 넘기고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
* * *
백서희가 일기를 넘기는 동안 강엽은 비고를 떠나서 절벽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출생의 비밀을 어찌 받아들일지는 몰랐다. 진실을 알고 절망할 수도 있고, 거짓부렁이라면서 부정할 수도 있었다. 하나 그녀가 말한 대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본인의 몫이었다.
돌부리에 걸터앉아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뭐야, 여기 있었네?”
투덜거린 백서희가 옆에 철푸덕 주저앉더니 무릎을 끌어모으고 얼굴을 파묻었다. 강엽은 그녀의 수중에 들린 흑접주의 일기를 힐끔 곁눈질했다.
“용케 찢어버리지 않았는걸.”
“솔직한 마음으로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러고 싶었는데....”
만약 느닷없이 진실을 맞닥뜨렸다면 일기를 찢어버리는 걸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큰 충격을 받고 시름에 잠겼겠지.
물론 지금도 기분이 좋지 않지만, 흑룡교주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생각보단 침착하게 충격을 소화할 수 있었다.
“어쩌면...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
자신이 흑룡교주의 후손이라면 어미 쪽의 핏줄일까, 아님 누군지도 모르는 아비 쪽의 핏줄일까.
귀주성에서의 일이 끝나고 나서도 줄곧 고민했었기에 온갖 경우의 수를 상상했었다.
“하하, 근데 가장 믿고 싶지 않았던 최악이 걸렸네.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는다더니.”
“네 잘못이 아니야.”
“알아. 그 빌어먹을 흑접주... 나랑 엄마를 지옥에 빠트린 놈의 잘못이지. 사람 같지도 않은, 아니 짐승만도 못한 새끼가 아버지라니.”
그녀는 부친이 누군지도 모르고 흑접에 들어왔다.
사실 어렸을 적에 흑접에 들어온 살수들 중 많은 이들이 부모가 누군지 몰랐다.
그들 모두가 흑접주의 자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흑접주의 자식도 있었으리라.
“흑접의 살수가 되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해. 그중 하나가 함께 수련한 동료들을 죽이는 거야.”
살기 위해 동료를 죽이고 살수가 되었다.
지금 와서 그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랄맞네. 내가 죽인 애들 중에서 내 형제자매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아니, 수련생 시절만이 아니었다.
흑접이 함락됐을 때 적들에게서 도망친 이호를 그녀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던가.
그녀의 손에 죽은 사람들이 어쩌면 배다른 형제자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랬을지는 확인할 수 없겠지. 죽은 사람들 족보를 따져볼 수도 없고.”
실의에 빠진 백서희의 얼굴을 들여다본 강엽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사람들 살리자고 네가 죽진 않을 거 아니냐?”
“그야 그렇지만....”
“그럼 살아야지.”
“너무 뻔뻔한 거 아냐?”
무릎 위에 턱을 괸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 안고 갈 수밖에.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날 이렇게 만든 놈에게 복수하는 거지.”
“...뭐, 나도 죄책감을 가진 건 아니야. 그냥 인생이 엿 같아서 한탄하는 거지.”
물론 그녀에겐 복수할 대상이 남아있지 않았다.
흑접주는 죽었고, 흑접은 망했고, 원흉이었던 흑룡교 역시 세월의 풍토 속에 묻혔으니까.
“이젠 어쩔 거냐?”
진실을 알았으니 그녀가 강엽과 동행할 이유는 사라졌다.
백서희가 쓴웃음을 지었다.
“잘 모르겠네. 예전엔 먼 곳으로 가서 새출발하고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니야.”
“천천히 고민해봐라.”
“뭐야, 왜 안 붙잡는데? 나 필요하지 않아?”
당장 태화문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판국이다.
백서희가 떠나면 홍예칠위도 떠날 테니 숙정방도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겠다는 계획도 틀어진다.
강엽도 부정하지 않았다.
“필요해.”
“근데 왜....”
“내 사정 때문에 떠나겠다는 사람 억지로 붙잡는 건 이기적인 것 같아서.”
“원래 그런 성격이었어?”
백서희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뜨악하자 강엽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휙 돌렸다.
“대체 날 어떻게 본 거냐?”
“으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냉정한 놈?”
“그건 적들 한정이고.”
“난 같은 편이라는 거야?”
백서희가 가까이 다가오자 강엽은 저도 모르게 움찔 물러나면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처음에야 적으로 만났지만 말이다.
백서희가 배시시 웃었다.
“그렇구나. 그럼 됐어.”
“그 애매한 대답은 뭔데.”
“도와주겠다고. 감사하게 여겨도 좋아.”
“...나참, 엎드려 절 받는 심정이구만.”
구시렁거리는 강엽을 두고 백서희가 벌떡 일어나서는 으라차차 기지개를 쭉 폈다.
“태화문이 올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달주에 있으니 우리보단 가깝겠지. 하지만 의논을 해야 할 테니 바로 사람을 보내진 못할 거다. 하루 이틀은 더 걸릴 것 같은데....”
“그럼 약간은 시간이 있겠네.”
“시간?”
“술 마시고 싶어.”
섬섬옥수가 멀리 있는 불빛을 향해 뻗어졌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포구 마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