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35화 (135/450)

21화. 시비 (3)

고수들의 싸움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위에 여파가 미친다.

묵직한 충격파가 일대를 강타한 뒤 묵언의 합의를 본 두 사람은 공중으로 솟구쳤다.

아래에서는 충격파에 휘말린 청우방주와 간부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반면 강엽 일행은 홍예칠위가 붙잡아준 덕분에 머리와 옷이 나부낄지언정 체면을 구기지는 않았다.

아래를 슬쩍 내려다본 혼섬잔도는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것만 봐도 누가 더 우세한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지만 그의 얼굴에 낭패감 따위는 어리지 않았다. 강엽을 처치한 뒤에 내려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강엽 일행이 청우방주와 그의 부하들을 공격한다면 여유를 부리지 못하겠지만, 다행히 먼저 공격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좌장들의 결전임을 알고 한 발짝 물러나서 강엽의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노부가 내려갈 때까지 망동하지 말게.]

전음을 받은 청우방주가 어깨를 움찔 떨고는 고개를 올렸지만 혼섬잔도는 볼 수는 없었다.

혼섬잔도가 전각 위쪽에 자리를 잡은 채 맞은편의 강엽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부끄럽구만. 이 나이 먹고 자네 같은 젊은이와 드잡이질을 벌여야 하다니....”

“그래서 불만인가?”

“암, 불만이고 말고. 예전 같았으면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을 걸세. 오랫동안 자중해서 그런지 노부의 흉명이 흐려진 모양이야.”

“글쎄,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 실실 쪼개는 것 아닌가?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면서 그딴 소릴 해봤자 설득력이 없는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피를 보는 것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게 어찌 같겠나?”

혼섬잔도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갔다. 눈알은 유리처럼 번들거린다. 강엽의 몸통을 찢고 내장과 피를 뿌릴 생각만 해도 즐거워졌던 것이다.

하나 그와 별개로 한낱 애송이가 자신에게 도전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

혼섬잔도는 그렇게 말하면서 용두대도를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무게중심을 한껏 낮추었다.

“본격적으로 손을 섞기 전에 한 가지만 말해주지. 본문에도 자네 소문이 무성하다네. 오죽하면 문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셨을까.”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번천광야 조광해. 청성, 아미, 당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태화문의 주인이었다.

사천 무림에 퍼진 풍문으로는 구파 장문인, 팔가주와 견줄 만한 절세고수라고 하던가.

“허허, 당연히 영광이고 말고. 문주님은 아무에게나 관심을 주지 않으신다네.”

조천방과 거룡방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걸로 끝났다면 강엽의 이름이 태화문주의 귀에 닿는 일 따위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흑접을 토벌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태화문주도 관심을 가졌다.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본문에 들어올 의향은 없나?”

그것은 진심이었다. 강엽 정도의 고수가 대공자의 세력에 합류하면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수락하면 숙정방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함세. 아니, 자네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도움도 주지. 노부 바깥에서 새롭게 시작해야겠지만 숙정방과 함께 멸문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별로 끌리진 않는걸.”

“그걸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

“일전에 조영옥에게도 비슷한 제안을 받았었지. 이인자의 자리를 주겠다고 하던데.”

“....”

“당신이 그 이상을 약속할 수 있나? 약속할 수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고.”

아무리 혼섬잔도가 태화문의 높으신 분이라도 그런 약속을 할 순 없었다.

하물며 이인자보다 높은 자리라니?

“그래, 협상은 결렬이구만.”

협상할 건덕지조차 없었다.

그 사실을 이해한 혼섬잔도가 시퍼런 살기를 발하며 한껏 흉성을 폭발시키려는 순간.

문득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쿠구구궁...!

몸을 솟구칠 때 전각의 기왓장을 뚫고 올라온 무언가가 발목을 노리고 짓쳐들었던 것.

강엽이 은밀히 불러낸 혈목의 현신이었다.

“사술? 언제부터...!”

“처음부터.”

청우방에 쳐들어왔을 때부터 혈목은 땅밑 깊숙한 곳에 뿌리를 박고는 강엽의 부름만을 기다렸다.

‘원래는 도망치는 놈들을 잡기 위해서였지만.’

혼섬잔도의 용두대도가 혈목을 잘라냈지만 소용없었다.

사방에서 붉은 줄기들이 이미 우후죽순 솟아나고 있었으니까!

콰직! 빠득! 우지지직!

넝쿨처럼 옥죄는 혈목의 힘에 기둥과 대들보가 터져나간다.

청우방에서 가장 중요한 내원 본채가 무너지자 청우방주가 나라 잃은 사람처럼 절규했다.

“안 돼애애애애!”

“....”

다른 전각으로 옮긴 혼섬잔도도 한순간에 전각이 무너지는 참상에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강엽은 한눈 파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혈목을 발판 삼아 몸을 던진다.

투앙!

“크윽, 이놈...!”

도신을 눕혀 발길질을 막았지만 묵직한 암경이 도파를 넘어 완맥까지 치달았다.

공력을 싣어 밀어내면서 도격을 전개하려는 순간, 강엽은 한 박자 빨리 탄자결의 내공으로 도신을 튕겨내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 뒤엔 허공밖에 없지만, 저들끼리 뭉친 혈목이 지지대를 만들어 강엽의 몸을 떠받쳤다.

강엽이 삐두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하나만 묻지. 당신은 태화문에서 얼마나 강하지? 풍도마장보다 강한가?”

조천방과 거룡방의 싸움이 끝난 뒤 등장했던 태화문의 노강호.

조영옥도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던 초고수는 그의 기억 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푸, 풍도마장?”

혼섬잔도의 주름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잔뼈가 굵은 고수라고 하나 어찌 태화문주의 최측근이었던 풍도마장에 비하겠는가?

당황하는 혼섬잔도의 얼굴에서 속내를 짐작한 강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삼화취정인가?’

풍도마장을 만났을 때는 초음을 각성하기 전이라서 그가 정확히 어떤 경지에 올랐는지 몰랐다.

하지만 중단전을 개방한 혼섬잔도가 저리 당황하는 것을 보면 삼화취정일 공산이 컸다.

그때였다.

“흐아아압!”

기합과 함께 휘두른 도격.

혼섬잔도의 도격 경파가 강엽이 딛고 선 혈목 다발을 수십 조각으로 쪼개버렸다.

본래는 강엽까지 노린 도초였으나 초음으로 혼섬잔도의 진기 운용을 관찰하고 있던 강엽은 사전에 징조를 읽고 공중으로 회피.

아예 어기충소의 한 수로 하늘 높이 뛰어오르더니 천근추의 내력 운용으로 무게중심을 낮춘 채 급강하했다.

“그딴 빈틈투성이 발길질로 어딜!”

일성을 터뜨린 혼섬잔도가 자신을 향해 각법을 날리는 강엽을 향해 도기를 내쏘았다.

성긴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도기의 폭풍이 강엽을 사방에서 가두려고 든다.

그 순간, 강엽의 중단전을 감싼 다섯 고리의 용환이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고,

우우우웅......!

중단전과 하단전의 공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공력 파동이 둥그스럼한 막을 자아낸다.

도기가 허망하게 튕겨나는 광경에 혼섬잔도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니!?”

콰아아아아앙!

장대한 굉음과 함께 전각이 진동했다.

충격을 버티지 못한 전각이 반쯤 주저앉으면서 처마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는 기왓장들.

파편이 튀고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광경에 청우방은 물론 강엽 일행도 경악했다.

“세상에나....”

그나마 강엽의 무공을 상세히 파악한 백서희도 놀랄 판인데 단목정과 고섭풍은 어떻겠나.

일 각 만에 청우방을 쓸어버린 홍예칠위의 무공도 충격적이었지만 강엽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괴력난신의 현현이나 다름없는 신위.

하지만 그들의 경악도 강엽을 직접 상대하는 혼섬잔도의 충격에는 못 미쳤다.

카앙!

흙먼지가 갈리며 병장기가 부딪친다.

웅혼한 경력을 품은 용두대도를 반쯤 뽑은 자성검으로 막은 강엽이 빈정거렸다.

“꼴이 근사하구려, 노인장.”

“죽일 놈!”

봉두난발이 된 채 흙먼지를 뒤집어쓴 혼섬잔도가 분노를 곱씹었다.

하지만 감정을 숨기지 못한 그의 눈빛엔 충격과 공포가 여실했다.

호신강기를 쓰는 모습에서 강엽이 삼화취정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한 것일까.

“살려두면 위험한 놈이구나!”

“얼마 전에 다른 늙은이가 그렇게 말했었지. 내 손에 세상 하직했지만.”

별안간 반쯤 주저앉은 기왓장을 뚫고 나온 혈목이 대가리를 꼿꼿이 세웠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사실을 파악한 혼섬잔도는 전신으로 경파를 발하며 혈목을 튕겨냈다.

하지만 아주 순간적으로 기파가 흐트러지는 틈새를 포착한 강엽은 용환의 공력을 끌어올려 도격을 밀어내고는 손등으로 혼섬잔도의 턱을 후려쳤다.

호신기로 막았음에도 골이 흔들리는 괴력에 혼섬잔도가 살짝 비틀거린다.

바로 그때 대포알같은 족격이 그의 명치를 후려치며 족히 오 장 너머로 날려버렸다.

“크학...!”

“청우방주와 사돈을 맺었다고 했던가? 당신 자식이 딸인지 아들인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군.”

손짓에 맞춰 뱀처럼 기어간 혈목이 혼섬잔도의 늙은 노구를 옴짝달싹못하도록 묶었다.

“혼인한 지 얼마 안 돼서 아비 장례를 치르게 됐으니 말이야.”

“끄으윽!”

본능적으로 경파를 발산시켜 혈목을 터뜨리려고 했으나, 시도는 처참하게 무산되었다.

혈목이 허벅지를 뚫고 깊숙이 박으면서 진기 운용을 방해했기 때문.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용두대도를 휘둘러 혈목을 베어내려고 했지만, 암신을 펼치며 면전에 쇄도한 강엽이 도파를 든 손목을 잡았다.

진기가 가닥가닥 끊긴 혼섬잔도는 호신기를 쓰지도 못하고 손목을 내주었다.

우드득!

“...!”

강엽이 아예 손목을 부러뜨려 용두대도를 빼앗자 혼섬잔도가 하얗게 눈을 치켜떴다.

평생을 함께한 애병이 적의 손에 들어가서 주인의 목을 겨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전엔 혼섬잔도를 죽이겠다고 공갈쳤지만, 정말로 목숨을 거둘 생각은 없었다.

그를 죽이면 태화문과 전면전이다. 안 그래도 혈교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는데 태화문 같은 대방파와 척을 지면 답이 없었다.

손가락을 딱 튕기자 혼섬잔도를 압박하는 혈목의 힘이 조금 느슨하게 풀려났다.

거칠게 숨을 말아쉬는 혼섬잔도을 지긋이 내려다본 강엽이 칼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당신에게 물어보지. 태화문과 싸우지 않고 이 사태를 무사히 넘어갈 방법을 말해봐.”

“미, 미친놈...!”

혼섬잔도가 치를 떨었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 태화문과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웃기지 마라! 말할 성싶으냐-!”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해도?”

“...차라리 죽여라!”

그렇게 윽박지르면서도 혼섬잔도는 강엽이 자신을 절대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강엽이 자신을 꺾을 만큼 강하다지만 태화문엔 자신에 버금가는 고수들이 몇 명은 더 있었다.

기라성 같은 고수들과 천 명이 넘는 무인들이 있는 태화문을 제놈이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큭큭, 모르지. 지금이라도 대공자께 네놈이 가진 것을 모두 바치고 충성을 맹세한다면...! 그렇지 않는다면 대공자께서 네놈이 가진 것을 모두 박살내실 것이야!”

“그럴 바엔 당신 목을 들고 조영옥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게 낫지.”

태화문이 하나로 똘똘 뭉쳤다면 모를까, 후계 경쟁으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면 얘기가 다르다.

“난 누가 태화문주가 되든 관심 없어. 하지만 조영옥에게 가면 그녀가 문주가 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할 거다.”

“너, 너...!”

“협박은 당신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야.”

심드렁하게 받아친 강엽이 칼날을 거두면서 손을 당기자 혈목이 혼섬잔도를 묶은 채 따라붙는다.

애병마저 빼앗긴 채 운신의 자유를 빼앗긴 혼섬잔도는 혀를 물고 죽고 싶었지만, 강엽은 혹시나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혈목으로 재갈을 물렸다.

“당신은 살려두지. 태화문과 협상할 패로 써먹어야 하니까.”

이도 저도 못하는 혼섬잔도를 돌아본 강엽이 악마처럼 사악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협상 당사자는 조영옥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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