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34화 (134/450)

21화. 시비 (2)

“그것이....”

고섭풍의 설명은 간단했다.

청우방주의 아들이 객잔에서 부하들과 식사하던 중에 단목정을 모욕했는데, 하필 그 자리에 있던 숙정방도들이 그걸 들었던 것이다.

숙정방도들이 사과를 요구했으나 청우방주의 아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고, 오히려 부하들을 시켜 숙정방도들을 두들겨패려고 했다.

당연히 숙정방도들도 분노해서 맞서 싸웠고....

“청우방주의 아들이 구타를 당했습니다.”

청우방주는 아들이 맞고 돌아오자 분노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단목정의 사과를 요구했다.

“그래서?”

“방주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지요.”

오히려 청우방주의 아들이 입을 잘못 놀렸으니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받아쳤다.

이에 분노한 청우방주가 칼잡이들을 보내 무력시위를 한 것이다.

“놈들이 뭐라고 모욕했지?”

이제껏 청산유수처럼 설명한 고섭풍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강엽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라고 모욕했냐고.”

“방주님이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굽신거려서 방주 자리를 꿰찼다... 그렇게 모욕했습니다.”

사실 이것도 순화한 편이었다. 청우방주의 아들이 내뱉은 모욕은 훨씬 원색적이었으니까.

“그렇단 말이지....”

말끝을 흐리면서 청우방을 돌아보자 앞서 강엽을 막은 사내가 이를 악다물었다.

“할 말 있나?”

“공자님의 언행이 과했다는 것은 인정하겠소. 하지만 술김에 우발적으로....”

“술김에 속마음을 내뱉었을지 아니면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시비를 걸었는지는 모르지. 청우방의 행동을 보면 후자 같지만.”

“본방을 모함하지 마시오!”

청우방의 사내가 항변하든 말든 강엽은 개의치 않고 다시 고섭풍을 돌아봤다.

“방주는?”

“안쪽에 소식을 전했으니 곧 나오실 겁니다.”

과연 고섭풍의 말이 끝나자 수십의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대문이 열리면서 칼잡이들이 쏟아져나왔다.

붉은 경장을 걸친 단목정이 선두에서 오다 강엽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 주군?”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온다더니.”

강엽은 실소를 흘렸다.

“사정은 대강 들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됐어. 저놈들이 작정하고 시비를 걸었는데 별 수 있나.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가 문제지.”

“저자들을 잡고 청우방에 가겠습니다.”

“그 뒤엔?”

“청우방주와 담판을 지어야겠지요.”

“쓸어버리지는 않고?”

청우방을 피로 물들이겠다는 과격한 발언에 청우방의 사내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보, 본방을 건드리면 후회할 것이오!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그 말에 단목정의 얼굴에도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청우방 사내의 말마따나 청우방이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뒷배를 믿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강엽의 귀에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저 말은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청우방주가 태화문의 고위인사와 사돈을 맺었습니다.”

태화문이라.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강엽은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명분은 이쪽에 있어.”

자신까지 걸고 넘어졌는데 그냥 넘어가면 무골호인이라고 인정하는 꼴이었다. 뒷배 때문에 물러나면 청우방은 더욱 기세등등해질 게 뻔했다.

강엽이 몸을 돌리자 청우방의 사내가 흠칫 놀랐다가, 어쩔 거냐는 듯이 어깨를 쫙 폈다.

그때 여태껏 말없이 서 있던 백서희가 관짝을 짊어진 홍예칠위를 가리켰다.

“이 녀석들 쓰면 어때?”

“실전에선 안 쓰겠다면서?”

“하지만 실력을 보여줄 기회잖아. 여기 있는 놈들은 압도적으로 쓸어버릴걸.”

“그야 상대가 안 되겠지.”

강엽도, 백서희도 청우방의 칼잡이들을 송장 취급하고 있었다. 흑도 방파의 칼잡이들에게 절정고수인 홍예칠위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좋아. 대신 죽이지는 말고.”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면 세심하게 힘조절을 해야 하는데 과연 홍예칠위가 해낼 수 있을까.

씨익 웃은 백서희가 붉은 흉갑의 강시를 가리켰다.

“적검(赤劍), 너로 정했다!”

그러자 적검이라 불린 강시가 수정관을 내려놓으면서 허리춤의 검파를 잡았다.

“죽이지 말고 제압만 해.”

강엽도 팔짱을 끼고 관심 있게 지켜봤다. 홍예칠위가 정말 흑룡교의 무공을 후대에 전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면 힘조절은 할 수 있으리라.

검집째 꺼내든 적검이 중단세를 취하자 청우방의 칼잡이들이 반사적으로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청우방의 사내가 강엽을 향해 뿌득 이를 갈았다.

“진정 본방과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말이오!?”

“그쪽이 먼저 달려든 주제에 뻔뻔한걸.”

강엽이 코웃음을 쳤다.

“걱정 마라. 살려는 줄 테니까.”

백서희에게 눈짓을 보내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다시 적검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단목정을 비롯한 숙정방도들은 복날 개패듯 때려잡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청우방의 무리 사이에 뛰어든 적검은 가히 무적이었다.

청우방의 칼잡이들도 나름 악다구니를 내지르며 분전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아아아악!”

“내 팔! 사, 살려줘!”

백서희의 명령대로 적검은 살생을 삼갔지만, 그게 무탈하게 제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검집으로 후려치는데도 적들의 뼈를 부수고 근육을 짓뭉갠다. 마주치는 칼날도 산산조각냈다.

파리하게 질린 청우방의 사내가 몸을 돌렸다.

“이, 이런...!”

도망쳐서 방주에게 이 사실을 고해야 했다.

‘계획이 꼬였다!’

방주의 아들과 숙정방도들이 시비가 붙은 것은 우연이지만 그 뒤는 방주의 설계였다.

태화문의 고위인사를 뒷배로 뒀겠다, 이번 기회에 숙정방을 집어삼킬 작정이었던 것.

강엽이 분노해도 태화문의 이름을 내세우면 꼬랑지를 내릴 거라 생각했는데....

‘젠장, 저런 고수들을 데려오다니!’

하지만 그는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앞을 막은 인영에 질겁했다.

“이놈이 어딜 도망가?”

어느새 숙정방도들이 퇴로를 틀어막은 것이다.

사내가 단목정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켜!”

그의 손에 들린 비수가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그러자 고섭풍이 단목정의 앞을 막아섰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짐짓 노성을 지른 그가 비수를 든 손목을 낚아채면서 턱주가리에 정통으로 한 방 먹였다.

제법 충격이 큰지 부러진 앞니와 피화살이 허공을 수놓았다.

털썩!

사내가 쓰러진 것과 동시에 적검 역시 마지막 남은 칼잡이의 안면을 검집으로 후려쳐서 기절시켰다.

쓰러진 칼잡이들의 상태를 관찰한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걸.”

“당연하지. 누구 부하인데.”

백서희가 엣헴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적검은 명령을 완벽히 수행했다. 청우방의 칼잡이들을 병신으로 만들되 목숨을 거두진 않았다.

깔끔하게 기절시켰다면 더 좋았겠지만,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하라고 안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엔 정도와 범위를 세세하게 짚어줘야겠어.’

강엽은 새삼 깨닫게 된 점을 명심하며 단목정을 향해 말했다.

“방도들은 돌려보내.”

홍예칠위가 있는데 우르르 몰려갈 필요는 없으리라.

사실 강엽 혼자 가도 되지만, 이 기회에 홍예칠위의 활약을 단단히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무공 교관으로 삼아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수정관을 넘겨받은 숙정방도들은 그 안에 가득한 금은보화에 기겁했지만, 감히 욕심을 내지 못하고 장원 안쪽에 고이 보관했다.

* * *

청우방은 재난을 맞이했다.

갑자기 대문을 부수고 들어온 자들이 말도 없이 방도들을 때려눕히며 안쪽까지 밀고 들어온 것이다.

강엽과 백서희는 나서지도 않았다. 홍예칠위 중 가장 강한 자권(紫拳)도 마찬가지였다.

적검과 주월(朱鉞), 황곤(黃棍) 세 강시가 나선 것만으로 충분했다. 청우방의 칼잡이들을 쭉쭉 쓸어버리면서 길을 낸 덕분에 일행은 단숨에 본채까지 들어갔다.

강엽을 호종하는 단목정과 고섭풍은 얼떨떨하다 못해 혼백이 나갈 지경이었다.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여기까지 오는 데 일 각도 걸리지 않았다.’

홍예칠위가 강한 건 알았지만 절반도 나서지 않았는데 숙정방과 어깨를 견주는 청우방이 이토록 빨리 함락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죽은 사람도 거의 없었다. 백서희가 되도록 살려서 제압하라고 명한 것이다.

“이런 무도한 놈들을 봤나!”

소란을 듣고 간부들과 함께 나온 청우방주는 바깥의 참상에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단목정과 고섭풍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했다.

“숙정방의 젖비린내 나는 계집년과 애꾸놈! 네놈들이 어떻게 여기에?”

그가 보낸 칼잡이들이 숙정방을 압박하고 있을 텐데 어찌 여기로 왔단 말인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청우방주.”

“뭣이?”

“절 모욕한 것도 모자라서 본방을 협박했으니 대가를 받아내야겠습니다.”

“미천한 서출년 주제에 감히! 제 아비를 죽인 원수에게 가랑이를 벌려 방주 자리를 도둑질한 년이 감히 내게 훈계를 늘어놔!?”

면전에서 입에 담지도 못할 모욕을 당한 단목정의 표정이 썩어문드러졌다.

백서희도 기가 차서 한마디 내뱉었다.

“미친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물론 그녀도 단목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청우방주는 제 무덤을 파고 있었다.

그때 강엽이 말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군.”

그의 눈길은 청우방주가 아니라 그 옆에서 뒷짐을 선 초로인을 향해 있었다.

원단이나 침선에 대해 모르는 그가 봐도 굉장히 값비싼 비단 장삼을 입은 초로인은 청우방이 반쯤 무너진 상황에서도 여유만만했다.

초음으로 살펴본 내공은 구십 년. 심지어 중단전까지 개방한 고수였다.

“태화문에서 왔나?”

“허허.”

초로인이 뒷짐을 풀고 수염을 쓸었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힌 게 강엽이 일행에서 가장 강한 사람임을 알아본 눈초리였다.

“아무래도 숙정방주보다는 그쪽이 좌장 같구만. 숙정방주가 상전으로 모시는 인물이라... 혹시 자네가 그 귀영이라는 친구인가?”

강엽의 정체가 드러나자 청우방주를 비롯한 간부들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그들 옆에 있는 초로인을 믿고 어깨를 당당히 펴며 허세를 부렸다.

“그래봤자 일개 야인입니다, 사돈 어른. 조그만 명성으로 기고만장하는 놈이지요.”

사돈을 맺었다면 나름 대등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도 아랫사람처럼 눈치를 본다.

강엽의 입매가 조소하듯 비틀렸다.

“청우방이 태화문의 밑에 들어간 건가?”

“그보다는 전략적 동맹이라고 불러주게나. 혼인으로 맺어진 탄탄한 동맹이라네.”

“웃기고 자빠졌군. 태화문주도 아니고 그 아랫사람과 사돈을 맺었으면서 동맹?”

강엽이 대놓고 비웃자 청우방주의 낯빛이 터질 듯이 벌게졌다. 기껏해야 낭인으로 굴러먹던 놈이 자신을 능멸하다니...!

“사돈 어른, 놈을 죽이면 숙정방도 복속할 수 있습니다. 노주 흑도가의 삼분지 이가 우리 수중에 들어오는 셈이지요.”

숙정방과 청우방에 비견되는 양견회(楊堅會)라는 흑도 방파가 또 하나 있었지만 이쪽이 태화문을 등에 업고 있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강엽만 치워버리면 노주의 흑도 무림 전체가 자신의 손에 떨어지는 상황.

비록 강엽이 지적한 것처럼 태화문의 밑에 들어갔지만 무척이나 달콤한 대가였다.

초로인 또한 강엽이 만만치 않은 적수임을 직감했기에 직접 나서겠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부하가 칼자루가 용머리로 장식된 용두대도(龍頭大刀)를 바쳤다.

“노부의 이름은 비청동이라고 한다네.”

“혼섬잔도(魂殲殘刀)...!”

고섭풍의 안색이 거멓게 죽었다.

일찍이 그의 악명을 들어본 백서희와 단목정도 생각지도 못한 거물의 등장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게 혼섬잔도 비청동은 태화문의 상위 열 명에 포함되는 고수였다. 심지어 적들을 매우 잔인한 수법으로 죽이기로 정평이 난 악인.

혼섬잔도가 강엽의 뒤에 시립한 홍예칠위를 곁눈질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흠, 기척이 좀 이상한데...?”

홍예칠위는 호흡을 하지 않으니 타인의 내공 호흡에 민감한 고수들은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다만 강호에서 마지막으로 강시가 목격된 것은 흑룡교가 무림맹과 정마대전을 벌였던 시기였기에 보자마자 강시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좀 더 있다면 알아챘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가 있나?”

강엽이 주의를 돌렸다.

혼섬잔도가 자신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혈공진기를 끌어올려 사위를 옥죄인다.

피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헛숨을 삼키는 압박감에도 혼섬잔도는 느긋했다.

“허허, 실례했구만. 그래, 자네가 한 일은 노부도 익히 들었네. 이공녀와도 친분이 있다지?”

“조영옥의 사람인가?”

“그게 상관이 있나?”

“딱히.”

혼섬잔도가 누구의 사람이든 자신의 영역을 넘본 이상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봐줄 만한 사람도 아니고.

“걱정 말게나. 노부는 이공녀와 친한 사이는 아니니.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대공자의 세력이었다. 조영옥과는 차기 문주위를 두고 대립하는 정적(政敵) 같은 존재.

서로를 직시하는 눈빛이 강렬하게 부딪치는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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