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33화 (133/450)

21화. 시비 (1)

무림맹과 귀주성의 무림인들은 바로 떠나지 못했다.

그러기엔 피해가 너무 컸다.

“젠장, 들것 가져와!”

“여기에 깔린 사람들이 있소! 잔해 좀 치워봅시다!”

“상처 막아! 내장 나온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술법진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구출하고....

물론 안쪽에서 싸운 사람들은 쓰러질 만큼 지쳤기에 대부분은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몫이었다.

낭인전 귀양 분타주가 안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바깥의 전력을 이끌고 들어온 것이다.

무림맹을 지휘해야 할 팽관후는 야차마곤과 함께 초주검이 되었기에 그와 후개가 뒷수습을 맡았다.

“강엽이라고 했소?”

“엥? 아시는 이름입니까?”

“들어보긴 했지. 동명이인일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그자의 움직임이 어땠소?”

“말도 마십쇼.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귀신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럼 본인이 맞을 것 같군.”

“아신다면 시원하게 좀 말씀해주십쇼. 본인은 도통 말하지 않습니다. 이름도 간신히 알았다고요.”

“귀영이라는 자일 것이오.”

“귀영?”

“나도 이름만 들어봤소. 중경 분타에서 활동하는 신진고수인데....”

귀양과 중경 분타는 관할이 달라 교류가 드물다. 하지만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간간이 표국이나 상단을 통해 소문을 듣곤 했다.

“귀영이라....”

한동안 골몰하던 후개는 두툼한 턱을 매만지다 눈을 부릅떴다.

강엽의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는지 떠올린 것이다.

‘흑접!’

총타에서 사부와 함께 강엽의 활약상을 보고받지 않았던가?

“아이고, 이 똥멍청이야! 왜 지금 떠올린 거냐!?”

“음?”

“아, 아니... 저한테 하는 말입니다. 진작에 기억했어야 하는데....”

“흠흠, 혹시 그가 어딨는지 아시오?”

“...글쎄요.”

단혼마백을 죽인 뒤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와 함께 싸운 전강은 내상을 다스리기 위해 운기조식을 하고 있기에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

‘백 소저도 사라진 걸 보면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 같은데... 끄응, 어딜 간 거야?’

말도 없이 사라진 게 좀 섭섭했다.

귀양 분타주는 노골적으로 아쉬워했다.

“혹시라도 찾게 된다면 나한테도 말해주시오.”

얼마나 강한 낭인을 보유했느냐로 분타의 위상이 달라진다. 야차마곤은 최소 몇 달은 정양하지 않으면 안 될 중상을 입었기에 새로운 전력이 절실했다.

‘소문에 따르면 고작 동천패인 모양이지만... 그만한 무공이라면 금패가 되고도 남지.’

물론 강엽을 영입하려고 하면 중경 분타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그 역시 코가 석 자였기에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귀양 분타주의 얼굴에서 탐욕을 엿본 후개는 떨떠름해졌다.

“...아, 예. 찾게 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 *

후개와 귀양 분타주가 전전긍긍할 때 강엽은 전강을 만나고 있었다.

“중경에 돌아가실 것이오?”

“아뇨. 당분간은 노주에서 지낼 겁니다.”

“노주라....”

전강은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강엽이 숙정방에 지분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번엔 강엽이 물었다.

“저랑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삼화취정에 오른 고수이긴 하나 전강에겐 재생력이 없다.

내상을 다스리려면 안정적인 환경에서 요양해야 하리라.

“제안은 고맙지만....”

전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엽과 달리 그는 돌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미안하오. 사형 때문에 힘들 것 같소.”

간신히 숨만 붙은 야마차곤의 상태.

본인은 괜찮다고 할지 몰라도 전강은 십수 년 만에 만난 사형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몸을 가눌 만큼 회복할 때까진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장 분타주에겐 휴가를 연장하겠다고 서찰을 보낼 생각이오. 혼자 두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중경으로 데려가는 건 어떻습니까? 마침 중경엔 온천도 많으니 요양하기도 좋지 않습니까?”

예로부터 중경은 온천이 많이 나는 땅이었다.

물론 귀주에도 온천이 있지만, 전강의 입장에선 굳이 장경과 떨어지기보다는 중경에서 사형과 함께 지내는 게 좋으리라.

제안을 들은 전강이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구려. 사형과 의논해봐야겠소.”

“그럼 중경에서 뵙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강엽이 몸을 돌리려고 하자 전강이 잠시 한숨을 쉬며 그를 불렀다.

“...강 무사.”

“하실 말씀이라도?”

“스스로를 잃지 마시오.”

그는 강엽이 상리에서 벗어난 부류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백도 정파의 협객처럼 강엽을 나무라거나 징치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강을 응시한 강엽은 깊고 고요한 심연이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기분에 미간을 좁혔다.

“어쩌다 보니 작은 재주를 얻었소. 피상적으로나마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그건 타심통 아닙니까?”

강엽은 어이가 없었다. 저 말대로라면 전강은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그렇게 신묘한 재주는 아니오. 진짜 타심통에 비하면 보잘 것 없소.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속들이 눈치채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기질을 조금 아는 정도에 불과하오.”

“그것도 충분히 대단한 것 같습니다만.”

기실 술법에도 비슷한 재주가 있긴 했지만 익힐 엄두가 안 날 만큼 지고한 술법이었다.

전강은 그것을 무공으로 이룬 것이다.

‘삼화취정에 오른 고수라서 그런가? 아니면 불문 내공의 특수성 때문인가?’

단혼마백에겐 그런 재주가 없었던 걸 봐선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 소림 불문의 내공을 고찰하면서 불문의 신통력을 일부 깨우친 게 아닐까.

“강 무사가 처음 객잔에 온 날 나는 강 무사의 내면에 있는 마성을 느꼈소.”

“...그런데도 가만히 내버려두셨습니까?”

“절박함을 느꼈으니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시 강 무사는 절망하고, 분노하고, 슬퍼했었소.”

흡혈귀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이 비틀렸으니까.

“사실 강 무사가 처음 의뢰를 받은 날, 멀리서 몰래 지켜봤소.”

“...!”

뒷골목 흑도 건달패들의 싸움.

당시 거산중권이라는 예상외의 고수가 끼어드는 바람에 위험할 뻔했지만, 흡혈귀의 능력으로 우열을 뒤집고 승리하지 않았던가.

생애 두 번째로 타인의 피를 마신 순간이기도 했다.

“...보셨겠군요.”

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했소. 아무리 봐도 사마외도로 보이는 사람을 장 분타주의 곁에 놔둬도 될지. 혹시 강 무사가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해치지는 않을지.”

하지만 강엽은 전강이 보기에도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했다. 적으로 만난 무림인들을 빼면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았던 것이다.

“내 이목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엉뚱한 사람을 해치는 건 아닐까 의심도 했었소. 그래서 정보상을 이용해서 강 무사의 흔적을 추적했소.”

듣기에 따라선 불쾌할 수도 있는 이야기.

하지만 강엽은 가타부타 화내는 대신 전강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다행히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소. 투기장에서 죽은 사람들의 피를 마신 적은 있었지만, 적어도 애꿎은 사람들을 습격한 적은 없었지.”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었을 줄이야.

‘딴마음을 먹었다면 거기서 끝났겠군.’

만약 욕망에 굴복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면 전강의 손에 생을 마감했으리라.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행동방침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강 무사가 어찌해서 그런 몸이 됐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그게 마공 때문이라면....”

“그랬다면 저 스스로 단전을 부쉈겠지요.”

단전을 부수는 것만으로 흡혈귀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진작에 그랬을 터.

그러나 한번 흡혈귀가 되면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단지 그 작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도산검림 무림 강호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나.

“누군가는 이런 저를 보고 차라리 자결하라고 하겠지요. 저도 그걸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냥 죽기는 억울하더군요.”

자신을 흡혈귀로 만든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모산혈조, 나아가 모산혈조를 지원한 혈교와는 같은 하늘을 짊어지고 살 수 없기에.

“그러니 누군가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저는 최선을 다해 저항할 겁니다.”

전강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전력을 다해서 쓰러트릴 것이다.

이길 수 없다면 도망간 뒤에 훗날을 기약하리라.

“.......”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결의. 굳이 타심통의 공능을 행사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각오에 전강은 입을 다물었다.

“강 무사는....”

그는 바보가 아니다. 비밀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살인멸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강엽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전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아는데도. 그가 잠자코 지켜봐준 것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였다.

“만약 제가 낭인전이나 장경에게 폐를 끼칠 것 같으면 떠나겠습니다. 저로 인해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장 분타주를 어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목숨이 위험하다면 구해줄 생각은 있습니다.”

친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일적인 관계라고 한 것도 아니다. 애매한 대답. 하지만 전강은 대답이 되었다는 듯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되면 장 분타주를 부탁하오.”

그건 강엽의 정체를 함구하겠다는 말이었다. 강엽은 고개를 주억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백서희는 숲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얘기는 잘 됐어?”

“그럭저럭.”

“노주로 간다고 했지?”

“그래, 이 녀석들을 숨겨야 하니까.”

백서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홍예칠위라 이름 붙인 강시들이 금은보화가 들어있는 수정관을 짊어진 채 멀뚱멀뚱 서 있었다.

“당분간은 그쪽에서 정비하자고. 그리고....”

“약속 지켜야지?”

백서희는 그녀의 출신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한 약속 때문에 강엽과 동행하는 것이다.

초조함으로 바짝 타들어가는 낯빛을 보며 강엽이 쓰게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 까먹는다.”

* * *

흑무암쇄진을 얻었어도 대놓고 쓸 수는 없기에 두 사람과 일곱 강시는 야음을 틈타 이동했다.

다행히 이튿날에는 하늘이 흐렸기 때문에 날이 저물기 전에 숙정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저게 무슨 상황이야?”

“나도 모르겠는데.”

청색단삼의 칼잡이들이 숙정방의 정면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고래고래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니 숙정방과 시비가 붙어 칼잡이들을 끌고 온 모양.

무슨 일인지 몰라도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싸움마저 불사할 살벌한 기세였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칼잡이들이 눈을 부라리다, 커다란 수정관을 짊어지고 오는 홍예칠위를 보고 주춤거렸다.

그렇게 좌우로 나뉜 칼잡이들 사이를 지나간 강엽은 자신을 막는 사내 앞에서 멈춰 섰다.

“네놈들은 뭐냐? 감히...!”

다짜고짜 고함을 치던 그는 강엽과 함께 걸어온 백서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며칠 고생해서 수척해지긴 했지만 타고난 아름다움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뒤를 따르는 홍예칠위까지 예사롭지 않은 기세를 풍겼기에 사내의 얼굴엔 긴장감이 배어나왔다.

“...수, 숙정방은 외인의 출입이 금지되오. 그러니 다음에 다시 찾아오시....”

“어디서 왔나?”

강엽이 말을 끊자 사내는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청우방(淸宇幇)이외다.”

청우방은 노주에 있는 흑도 방파 중 하나였다. 숙정방과 어깨를 견줄 만한 덩치를 지닌.

“당신한테 물은 거 아니다.”

“뭐요?”

사내의 눈썹이 역팔자로 치솟았지만 강엽은 무시하고 대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숙정방주 단목정의 오른팔인 애꾸 사내가 있었다.

강엽이 그의 이름이 고섭풍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애꾸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삼가 주군을 뵙습니다!”

“주군이라니....”

고섭풍의 선언에 당혹스러워진 것은 청우방의 칼잡이들이었다.

강엽을 막아섰던 사내가 특히 대경실색했다. 숙정방의 이인자가 주군이라 부를 사내라면......!

“귀, 귀영?!”

“이건 무슨 상황이지?”

여전히 강엽은 청우방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고섭풍에게만 물었다.

고섭풍이 침을 꿀꺽 삼켰다.

“송구합니다, 주군. 못난 모습을 보여드려서....”

“됐고 무슨 일인지나 말해. 그래야 내가 화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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