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노획 (2)
강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석대로 들어오길 잘했군.’
사실 백서희를 빼고 오는 것도 염두에 뒀었다. 혈목으로 땅을 파서 길을 만들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강시들을 보니 그런 편법을 썼다면 골치 아파졌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이야 백서희가 피를 흘려넣어 흑룡교주의 혈손임을 증명했지만, 만약 그런 과정 없이 우격다짐으로 들어왔다면?
‘이놈들과 드잡이질을 벌였을 수도 있겠지.’
설령 싸우지 않았더라도 흑룡교주의 후손도 아닌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진 않았으리라.
“이것들 지금 나를 상전으로 받드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 널 교주로 섬기는 것 아닐까?”
“그게 뭐야.”
졸지에 흑룡교주로 오해받은 백서희는 질색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강엽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응?”
“흑룡교주가 아닌데 알맹이는 쏙 빼먹었으니까. 권리는 있고 의무는 없는 거지.”
“...그러네?”
흑룡교를 재건할 의무는 없는데 그가 남긴 것들은 누리는 셈이었다.
그 점을 깨닫고 싱글벙글 웃은 백서희가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근데 얘네들은 얼마나 강한 거람.”
“내공 수위는 일 갑자를 넘는다. 대충 칠십 년에서 팔십 년 사이... 저기 보라색 갑옷은 구십 년이고.”
모든 강시들이 내공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흑룡교가 각별히 신경 썼기 때문인지 강시들은 생전의 내공을 보전하고 있었다.
단숨에 알아내자 백서희가 신기해했다.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대충은.”
정체도 들킨 마당에 내공 수위 파악할 수 있다는 게 대수랴?
강엽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백서희가 호오 하며 관심을 보였다.
“그럼 난 몇 년으로 보여?”
“팔십오 년쯤?”
“성능 확실하네.”
“....”
묘한 표정을 짓는 강엽을 두고서 백서희가 강시들을 쭉 둘러봤다.
“근데 얘네를 뭐라고 부르지?”
멀쩡한 사람이라면 자기가 누구라고 대답했을 텐데 강시라서 그런지 입을 놀릴 줄 몰랐다.
“이름이 필요한가?”
“한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이나 되잖아. 뭔가 명칭 같은 게 있어야 부르기 편하지.”
“홍예칠형제(虹蜺七兄弟)는 어때?”
무지개를 뜻하는 홍예와 일곱 명인 것에서 착안한 작명이지만 백서희는 눈을 흘겼다.
“말 못하는 강시라고 함부로 짓는 것 좀 봐. 여자도 있는데 형제가 웬말이야?”
“그럼 칠남매?”
“어휴, 넌 어디 가서 다른 사람 이름 지어주면 안 되겠다. 평생 원망살 거야.”
핀잔을 준 백서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뭔가 떠올리고는 씩 웃었다.
“기깔나게 홍예칠위(虹蜺七衛)라고 하자.”
“달라진 게 없는데...?”
강엽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제나 남매에서 호위로 바뀐 것 빼면 그게 그거 아닌가?
“형제나 남매보다는 낫지. 얘네도 말을 할 줄 알면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할걸.”
사실 강시들에게는 호교칠걸(護敎七傑)이라는 멀쩡한 별호가 있었지만 감정과 의지가 말살당한지라 주인의 작명 감각에 항의하지 못했다.
그렇게 호교칠걸에서 홍예칠위로 강제 개명당한 강시들은 백서희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걷거나 앉는 등의 간단한 동작은 물론이고 대련을 명하자 내공을 제한한 채 싸웠다.
한쪽에서 팔짱을 낀 채 관전하고 있던 강엽은 대련이 끝난 뒤에 짧게 품평했다.
“무위는 절정 수준이군. 괜찮으면 나도 한번 겨뤄보고 싶은데.”
“결과는 뻔하지 않아?”
해보나 마나한 싸움이다. 강시들이 강해도 강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야. 강시인 만큼 평범한 무림인하고는 여러모로 다를 거다.”
뭐가 다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파악해야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으리라.
백서희도 강엽의 말을 알아들었다.
“좋아. 누구하고 싸울래?”
“저기 있는 자색하고.”
홍예칠병 중 홀로 중단전을 개척한 권각술의 고수.
무공만 따지면 백서희보다 윗줄이었다.
* * *
가벼운 대련인 만큼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손속을 겨루었다.
파바박! 투각!
하박과 팔꿈치가, 무릎과 손바닥이 부딪치며 경쾌한 타격음을 자아낸다.
강엽이 고개를 까딱여 전사경의 묘리를 싣은 일권을 피하자 한 박자 늦게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내공을 싣지 않았음에도 공기를 찢는 일권.
스친 뺨에서 피가 흐르자 백서희가 화들짝 놀랐다.
“내공 쓰지 말라니까!”
“안 쓴 것 맞아.”
초음으로 관찰했으니 확실했다. 자색강시의 단전은 묵직한 천년거암처럼 제 자리를 지켰다.
의외로 처음엔 강엽이 약간 밀리는 양상이었다. 속도는 비슷한데 자색강시가 이상하리만치 움직임을 한 박자 빨리 가져갔다.
‘호흡이 다르군.’
흡혈귀도 호흡을 한다. 호흡의 세기와 길이에 따라 초식의 박자와 강약을 조절한다.
하나 폐가 굳어버린 자색강시는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반 수씩 앞서가고 있었다.
평범한 무림인을 상대하는 감각으로 싸워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강엽은 즉시 투로를 바꿨다.
자색강시처럼 호흡을 멈추지는 않되, 초식을 더욱 간결하게 가져가며 빠르게 공방을 이어간다.
흡혈귀와 강시의 팔다리가 어지럽게 부딪치며 거친 타박음을 일으켰다.
빠바박!
강엽의 발등이 정강이를 찍자 자색강시의 무릎이 굽혀진다.
자색강시가 본능적으로 강엽의 다리를 낚아채려고 했지만, 그전에 발을 회수한 강엽이 다시 한발 앞서 녀석의 목을 향해 섬전같은 족격을 날렸다.
그러자 자색강시가 자세를 무너뜨리면서 역공을 펼친다.
상체를 흔들어 역공을 흘린 강엽이 사량발천근의 수로 자색강시를 끌어들이고는 의표를 찔렀다.
열어젖힌 상체를 빠르게 타혈하자 자색강시의 온몸이 통나무처럼 빳빳해진다.
‘어째 바위를 치는 기분인데....’
인간의 육신쯤은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발길 수도 있는 흡혈귀의 괴력.
하지만 강시는 타격을 허용할지언정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반격을 이어가고 있었다.
매의 발톱처럼 구부린 응조수(鷹爪手)를 어깨 너머로 흘린 강엽이 명치에 일권을 먹였지만, 충격이 잘 전달됐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더럽게 단단하군. 빠르기도 엄청 빠르고.’
강건한 육신을 바탕으로 생전의 무공을 고스란히 펼치는 것을 보니 비슷한 경지의 고수와 싸운다면 약간은 유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앙!
방어를 위해 교차한 팔을 밑에서부터 들춰 와해시킨 뒤 곧장 일장을 뻗는다.
가슴팍을 얻어맞은 자색강시가 서너 걸음 물러나더니 강엽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이미 죽은 몸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진 않는다. 무표정하게 강엽을 바라보다 반격할 따름.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는 투로는 강엽도 두루 살필 만큼 상승 무학의 정수를 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승부의 추는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장점은 명확한데 단점도 명확해.’
둘의 대련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관찰한 백서희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맙소사... 똑같은 약점을 찔리고 있잖아?”
시간이 갈수록 강엽의 우위가 두드러진다. 바삐 움직이는 손발은 강엽의 공세를 막기 급급해졌다.
일 각쯤 지났을 때는 처음의 백중세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일방적으로 털리고 있었다.
절묘하게 빈틈을 점함과 동시에 양팔로 태극을 그린 유능제강의 금나수가 자색강시의 완맥을 잡는다.
빠르지 않았음에도 눈 깜짝할 새에 그렇게 됐다. 부드럽게 몸을 돌린 강엽이 상대의 관절을 꺾었다.
퍼억!
가볍게 올려친 앞발이 무릎을 후려친다.
금강석처럼 단단한 맷집을 지녔지만 관절은 취약한 만큼 자색강시는 맥없이 비틀거렸다.
그럼에도 일격으로는 무릎을 굽히지 않았기에 강엽은 연이어 두 번을 더 치고서야 자색강시를 제압했다.
자색강시가 관절이 아작나는 것을 감수하고 온몸으로 뿌리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그만!”
백서희의 외침에 움직임이 멎었다.
강엽도 팔을 놔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팔다리를 주물렀다. 호신을 위한 공력을 전혀 쓰지 않은 만큼 약간의 타박상을 입은 것이다. 상처야 재생력 덕분에 금방 아물었지만 부딪칠 때마다 바위를 때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다가온 백서희가 한숨을 삼켰다.
“왜 대련을 하자고 했는지 알겠네. 얘네들은 학습하는 능력이 전혀 없어.”
언젠가부터 시간을 되돌리듯 똑같은 양상이 반복되었는데도 자색강시는 마땅한 수를 짜내지 못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실수를 자각한 시점에서 뭐라도 해봤겠지. 정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말이야.”
무릇 학습은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다. 정답을 찾든 오답을 내든 위기에 처하면 뭐라도 해보기 마련.
하지만 강시에게는 그런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투로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다.
“내공을 쓰면 좀 달라지긴 하겠지만....”
공력이 뒷받침된다면 움직임이 빨라지는 것은 물론 초식의 위력이 증대하고 간합도 훨씬 길어질 터.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 될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근데 내공을 안 쓴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오히려 네가 더 유리해지는 것 아니야?”
“...그렇지.”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백서희가 지적한 대로 내공 격차가 큰 만큼 그가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해지진 않을 것이다.
암신이나 혈목 등 흡혈귀의 능력까지 발휘한다면 더욱 빨리 승부가 나지 않을까 싶었다.
“하수들한테는 저승사자나 다름없겠지. 비슷한 경지의 고수들도 부담을 느낄 테고. 하지만 거기까지다.”
홍예칠위는 더 이상 강해지지 못한다. 사람처럼 노쇠를 겪진 않겠지만 더 성장하지도 못하리라.
“강시가 된 시점에서 무재를 짓뭉갠 거지.”
“왜 그런 짓을...?”
“글쎄, 대충 세 가지가 떠오르는데.”
강엽의 눈길이 뚜껑이 열린 수정관을 훑었다.
“첫 번째 이유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기서 오래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일 테고.”
차가운 한기를 주입해서 피부가 부패되는 것을 방지한다고 한들 공기가 통하지 않으니 평범한 사람은 질식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충성심 때문이겠지.”
강시들은 배신하지 않는다. 흑룡교주의 피를 이었다면 그게 누구든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것이리라.
“세 번째 이유는... 아마 이놈들을 만든 목적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목적이라니?”
“이놈들은 병장기가 모두 달라.”
검진(劍陣)이나 도진(刀陣)처럼 합격진을 펼칠 요량이라면 같은 병장기를 쓰는 게 낫다.
굳이 다른 병장기를 쓰는 자들을 강시로 만든 것이 꽤나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부하나 호위로 써먹기보다는 흑룡교의 무공을 보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은데.”
물론 흑룡교주의 혼백이 있긴 했지만, 놈이 흑룡교의 모든 무공을 전부 알고 있진 않을 것이다.
교주만 익힐 수 있는 신공절학과는 별개로 아래 계급의 무인들이 익히는 무공이 있지 않겠는가.
“가령 흑룡교가 멸문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후손이 홀로 찾아왔다고 가정해보자고. 흑룡교를 재건하려면 교도를 받아야겠지. 근데 뭘 가르쳐야 할까?”
“그래서 얘네들을 뒀다는 거구나?”
“비급만으로는 무공을 복원하기 힘드니까.”
강시들을 지나친 강엽이 한 수정관을 골라서 안에 있는 것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휘황찬란한 금원보와 귀한 보석들이 쏟아지자 백서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강엽이 관심을 가진 것은 석판이었다.
“아무래도 이게 비급 같은데....”
서책이나 양피지는 세월이 지나면 곰팡이가 들 수 있으니 석판에 무공을 새긴 것이리라.
그 안에 담긴 구결과 운기법을 읽은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권각술부터 십팔반병기를 다루는 무공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좋군. 혈교에 붙어먹은 사파놈들이 찾았던 건 모두 이 안에 들어있다고 봐도 되겠어.”
석판에 손가락을 튕긴 강엽이 입꼬리를 올렸다.
전륜구룡공과 흑무암쇄진에 다른 비전들까지, 이만하면 흑룡교를 탈탈 털어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서희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실소를 흘리고는 나머지 여섯 개의 수정관을 모두 털었다.
* * *
수정관에 보관된 것은 금은보화와 비급만이 아니었다.
신병이기라고 할 만한 검이 나왔다.
“이 검은 마음에 쏙 드는걸.”
은은한 기광을 발하는 협봉검을 발견한 백서희가 눈을 반짝였다.
강엽도 호기심에 살펴봤는데 흘러나오는 예기가 자성검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검의 길이나 무게를 봤을 때 쌍검술을 쓰는 백서희와 잘 어울릴 듯싶었다.
“이거 내가 가져도 되지?”
“마음대로 해라. 애초에 네 거나 마찬가진데.”
“아, 그러네?”
백서희가 겸연쩍게 웃을 때 강엽도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용비늘이 새겨진 팔찌인데 은근히 주력이 느껴지는 게 술법과 관련된 물건인 듯싶었다.
“뭔데 그래?”
“친절하게 설명서도 동봉해줬군. 어디 보자... 술법을 담을 수 있는 법구라는데?”
구절을 이해한 강엽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술법을 완성하려면 수인을 맺고 진언을 외워야 한다.
하지만 이 팔찌에 술법을 담으면 그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술법을 쓸 수 있으리라.
“그건 네가 쓰면 되겠네.”
술법의 문외한인 백서희는 쓰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팔찌를 착용한 강엽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때 백서희가 의문을 드러냈다.
“다 좋은데 이것들을 어디로 옮기지?”
계속 여기에 둘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안전하지만 언젠가는 도굴꾼에게 털릴 수도 있었다.
강엽도 동의했다.
“재물이야 전장에 보관하면 안전하긴 한데, 문제는 비급이군.”
“홍예칠위도 문제고.”
“부하로 써먹으면 되지 않나?”
“그건 좀....”
데리고 다니는 게 꺼려졌다.
백도 정파의 고수와 시비가 붙어 강시임이 들통나면 마교의 요녀로 소문날 수도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그 물음에 강엽이 턱을 매만졌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강시라는 사실만 들키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긴 해.”
“그럼 본연의 목적에 맞게 교관으로 써먹자고.”
“...누구 무공 가르쳐줄 사람 있어?”
“있지.”
노주에 있는 흑도 방파의 이름이 강엽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