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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131화 (131/450)
  • 20화. 노획 (1)

    단혼마백의 죽음으로 싸움은 끝났지만, 강엽은 당장 현장을 떠나지는 않았다.

    용환을 만드느라 들쭉날쭉해진 기파를 갈무리하기 위해서 한갓진 곳을 찾아가서 운기를 한 것이다.

    흑무암쇄진을 비롯한 흑룡교의 비술을 얻은 과정에서 깨우친 심득.

    단혼마백을 비롯하여 이제껏 만나본 고수들을 참고했지만, 직접적으로 영감을 준 것은 생전의 흑룡교주가 연마한 전륜구룡공(轉輪九龍功)의 구결이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구름을 뚫고 하늘로 승천할 때 인간의 소우주에 혼원(混元)이 탄생한다.

    성(成)으로 성취를 가늠하는 무공들과 달리 흑룡교주의 무공은 구룡의 단계로 경지를 정의한다.

    오룡을 만들었을 때 중단전을 개방하며, 칠룡을 이루었을 때 상단전을 이루는 식.

    강엽은 전륜구룡공의 구결과 운기법을 참고하여 중단전에 용환을 만들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잘 될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용환은 다행히 무사히 중단전에 자릴 잡았다.

    전륜구룡공에서 영감을 얻었되 운기법은 딴판이기에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었던 상황.

    만약 진조의 영성이 없었다면 단숨에 정답을 찾지는 못했을 터.

    틀림없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실패했을 공산이 다분했다.

    우우우우우웅......!

    빠르게 회전한 용환의 움직임이 잦아들면서 넘실대던 점차 안정을 되찾는 기파.

    숨을 길게 늘어뜨린 강엽이 쓰게 웃었다.

    ‘만만치 않은 중단전을 만들었어.’

    동급의 고수들과 비교하면 막강한 공력을 자아내는 용환이지만, 완성하는 것은 굉장히 까다로웠다.

    용환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새로운 용환을 만들기가 몇 배로 어려워지기 때문.

    지금까지 먹어치운 고수들의 피로 다섯 개까지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여섯 번째 고리를 만들려면 더 강한 고수의 피를 마셔야겠지.’

    단혼마백의 피를 마셨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붙들 수는 없는 노릇.

    애초에 용환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단혼마백의 격공을 상대하면서 기감이 한 단계 도약한 덕분이니 무작정 아쉬워하는 것도 이치에 들어맞진 않는다.

    “뭐, 꿩 대신 닭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스르륵!

    그 말에 동의하듯 주변을 둘러싼 혈목이 대가리를 까딱인다.

    그가 운기를 하는 동안 사전에 불러낸 혈목이 호위하듯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혈목들이 여덟 구의 시체를 강엽의 발치 아래에 대령한다.

    강엽의 손에 죽은 혈사교령을 비롯한 사파 고수들의 시신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미처 피를 마시지 못한 시신들을, 혈목이 발견해서 회수했던 것이다.

    시신을 내려놓더니 칭찬해달라고 대가리를 흔드는 혈목의 모습에 강엽은 실소를 머금었다.

    손으로 쓰다듬자 기뻐하는 것처럼 부르르 떤다.

    -끼룩! 끼룩!

    ‘이건 뭐 강아지도 아니고.’

    혈목의 능력은 적을 붙잡는 데만 있지 않았다.

    땅밑을 파고들어 멀리 뻗어나가며, 강엽과 감각을 공유한다.

    본래 기감보다 더 넓은 범위를 손금 보듯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고수들은 기가 막히게 찾기도 하고.’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어딨는지 모를 고수들의 시신을 찾아낸 혈목의 능력엔 강엽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문제는 죽은 지 오래돼서 피가 굳었다는 건데....”

    아무리 고수의 피냄새가 매혹적이라도 걸쭉해진 피를 그냥 마시는 것은 찜찜할 수밖에.

    하지만 혈목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좌우로 움직이더니 시신의 심장에 대가리를 박았다.

    그리고는 꿀렁거리면서 시신에 남은 피를 빨아먹는 게 아닌가?

    혈목을 통해 들어온 선천지기가 사지백해로 뻗어나가자 강엽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만 활용하면 굉장하겠는걸.”

    이윽고 시신의 피를 몽땅 빨아들인 혈목이 고개를 흔들었다.

    강엽은 녀석이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남은 놈들을 전부 사냥하자고?”

    -끼이익!

    긍정하듯 끄덕거리는 혈목.

    이 욕심꾸러기는 여덟 명이나 되는 고수들의 피를 처먹고도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전강이 있는 곳을 향해 노골적인 탐욕을 드러내는데, 대가리 끝부분에서 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게 마치 군침을 흘리는 듯했다.

    “그 사람은 안 돼.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라.”

    -끼이잉....

    녀석이 대가리를 떨구며 시무룩해했지만 강엽은 단호했다. 전강이 자신을 적대한다면 몰라도, 먼저 그를 기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조만간 기강을 잡아놔야겠어.’

    제 의지를 갖고 있는 놈이라서 자칫 대형 사고를 칠지 모른다.

    미리 행동방침을 정해놔야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을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혈목이 대가리를 빳빳이 들며 타인의 접근을 경고했다.

    “걱정 마라. 아는 녀석이니까. 넌 시체들을 땅 속에 묻어라.”

    알겠다는 듯이 끼익거린 녀석이 시체들을 둘둘 감싸고는 땅 속으로 들어간다.

    그 뒤에야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엽?”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백서희가 엉망이 된 바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여기 왜 이래?”

    “별일 아니야.”

    시체를 숨겨놨단 얘기를 해줄 필요는 없으리라.

    정체를 들킨 것과 별개로 그녀도 사람인 이상 흡혈이라는 행위에 거부감을 가졌을 테니.

    “.......”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비록 어쩔 수 없었다지만 흡혈귀라는 사실을 들킨 것이다.

    약간 멋쩍은지 백서희가 귀밑머리를 꼬며 작게 웃었다.

    “그거... 처음부터 그랬던 거야?”

    차마 대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강엽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원래는 나도 평범했어.”

    혼백이 된 자성검호를 빼면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솔직히 말하는 날이 올까 싶었는데....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군.’

    역시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

    강엽은 쓴웃음을 흘리며 담담히 이야기를 늘어놨다.

    노예상인에게 납치된 일화부터 모산혈조와 진조와의 만남, 그리고 흡혈귀가 된 이후의 일까지.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비틀린 이야기에 백서희는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강엽의 목소리는 무덤덤했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 분노와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강호에 투신한 지 일 년도 안 돼서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을 했을 때는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했다.

    “어, 그러니까... 원래는 유생이었다고?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유생? 과거도 합격했고?”

    “향시지만 말이야.”

    “납치되기 전엔 무공의 무 자도 몰랐고?”

    “그래.”

    “일 년도 안 됐는데 이만큼 강해졌고?”

    “...뭐, 그런 셈이지.”

    “뭔 그런.......”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웃기지 말라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이야기를 팔아서 먹고 사는 매담자도 헛웃음을 흘리지 않을까?

    “못 믿나 보군.”

    “아, 아니. 못 믿는 건 아니야! 그냥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이야기라서 그래.”

    무작정 부정하기엔 그녀도 많은 괴이를 경험했다.

    주먹으로 입을 막은 그녀가 한차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어쨌든 이젠 어떡할 거야?”

    “돌아가야지. 언제까지고 계속 죽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렇지? 나도 여기 오래 있긴 싫어. 무림맹 놈들하고 얽히기도 싫고.”

    “근데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았어.”

    “응? 단혼마백인지 뭔지는 죽었다면서?”

    “싸우는 일이 아니야.”

    몸을 일으킨 강엽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백서희를 향해 씩 웃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다 털고 가자고.”

    * * *

    “또 뭘 찾으려는 건데?”

    백서희는 강엽이 달리 찾을 게 있다는 말에 의문을 품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던 비고는 흑룡교주의 혼백을 죽여버리고 얻지 않았는가?

    “흑룡교주는 자신의 사후를 대비해서 혼백을 나눠서 이쪽 분타에 봉인해놨지.”

    반보쯤 앞서나간 강엽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설명했다.

    백서희가 콧잔등을 구겼다.

    “아, 그 개자식 이야기는 또 왜 해. 생각만 해도 열불 나는데.”

    흑룡교주가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진조는 흑룡교주가 이혼대법으로 그녀의 몸을 빼앗을 셈이라고 했지만, 술법에 문외한이라서 그런지 잘 와닿지 않았다.

    “나도 그 인간 이야기를 오래 할 생각은 없어. 근데 그 인간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흑룡교를 재건하는 것은 이상이지만, 방파를 운영하는 것은 현실이다. 신심으로 무장한 광신도들도 흙만 파먹고 살 수는 없다.

    “돈이 있어야지. 아주 많은 돈이. 먹고, 입히고, 무장시키는 비용이 한두 푼은 아니니까.”

    그제야 강엽의 말뜻을 이해한 백서희는 침을 꼴딱 삼켰다.

    이곳 어딘가에 흑룡교를 재건하기 위한 보물이 매장됐다는 말 아닌가.

    “...무진장 많겠지? 얼마쯤 될까?”

    “글쎄.”

    강엽이 피식 웃었다. 흑룡교주의 기억을 일부 물려받았지만 얼마나 많은지는 알 수 없었다.

    “본인도 모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흑룡교주의 입장에서 재산은 아랫사람이 관리하는 걸 테니까.”

    “하긴 흑접주 그 인간도 살림살이는 죄다 아랫사람들한테 시키고 본인은 죽어라 무공만 수련했지.”

    숨겨진 길이었기 때문에 기관진식이 움직였을 때도 드러나지 않았다. 일전에 백서희가 찾은 비밀통로처럼 숨겨진 곳에 위치한 장소.

    어이없게도 그곳은 두 사람이 지나친 비밀통로와 연결된 곳이었다.

    쿠구구궁-!

    벽돌을 누르자 문이 회전하면서 숨겨진 통로가 드러난다. 거기서 다시 일 각쯤 걷자 대전에서 봤던 용이 양각된 철문이 나타났다.

    백서희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문고리가 없는데?”

    “문 옆에 용머리 있는 거 보이지? 혓바닥에 네 피를 떨어트리면 된다.”

    흑룡교주 혹은 그의 자손의 피에만 열리는 구조.

    엄지를 질끈 깨문 백서희가 피를 톡톡 떨어트리자 용머리가 둔중한 기관음을 내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 피를 떨어트리면 어떻게 되는데?”

    “절진이 발동되겠지. 암기나 독이나 뭐 그런 것들이 엄청나게 쏟아질 테고.”

    “...후우, 좋아. 내가 그 개자식 후손이길 바라야겠네.”

    다행히 천장에서 암기나 독 따위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열을 셀 때쯤 철문이 삐거덕 열렸다.

    백서희는 산처럼 쌓인 금은보화를 생각했지만 의외로 바로 그런 게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낡은 부적들을 덕지덕지 붙인 일곱 개의 수정관(水晶棺)들이 나타났는데, 거센 바람이 불며 부적들이 떨어져나갔다.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부적을 주운 백서희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보물은 아니지?”

    “설마.”

    그때 수정관들의 뚜껑이 열리면서 그 안에 누워있던 남녀가 용수철처럼 상반신을 일으켰다.

    차가운 김을 내뿜은 자들의 얼굴은 혈색 하나 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면면에서 뭔가를 느낀 백서희가 숨을 삼켰다.

    “저, 저것들 강시 아냐!?”

    “그런 것 같군.”

    “뭐야? 알고 온 거 아니었어?”

    “나도 다 아는 건 아니야. 흑룡교주의 기억은 파편처럼 깨져나가서 완전하지 않아.”

    흑무암쇄진이나 전륜구룡공의 구결을 알아낸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보물고의 위치나 들어가는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안에 무엇이 있는지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보물이 없는 건 아닌 것 같군. 저 강시들 아래를 봐라.”

    “번쩍거리네. 강시들 아래에 금은보화를 숨겨놨다는 말이지?”

    “강시들 자체도 보물인 것 같다.”

    “그게 무슨... 아!”

    뒤늦게 깨닫고 탄성했다.

    강엽의 말마따나 강시들이 걸친 무장은 하나같이 출중했다. 무지개의 칠색광을 띤 흉갑(胸鉀)을 입고 있었으며, 십팔반병기 중 검도창월궁곤(劍刀槍鉞弓棍)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한 놈은 권각술이 특기 같군.’

    한 놈만 병장기 대신 얇은 장갑인 수투를 끼고 있었다. 물론 그 수투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게 예삿물건은 아니었다.

    스윽!

    일곱 명의 강시들이 관짝을 빠져나오자 백서희가 반사적으로 쌍검을 잡았다.

    “젠장, 저것들까지 부숴야 해? 보물 얻기 참 빡세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싸워야 할 줄이야.

    강엽도 혈목을 불러내면서 싸울 준비를 했으나, 다음 순간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일곱 강시들이 충성을 맹세하듯 한쪽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기수식을 취한 백서희를 향해서.

    백서희가 눈을 껌뻑였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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