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혈룡 (14)
구루루루루룩...!
지면을 뚫고 올라온 붉은 줄기.
혈목은 진조가 다루는 것을 보기도 했고, 막 흡혈귀가 되었을 당시 도움을 받기도 했었다.
북해빙궁의 무인인 아설하와 겨룰 때 혈목을 이용하여 승부를 뒤집었던 것이다.
이번엔 혈교의 주구를 상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무도한 놈!”
단혼마백도 그냥 당해주진 않았다. 여섯 마리만 남은 혈사들이 혈목을 물어채어 부러뜨린 것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격공으로 반격을 꾀한다.
거미줄처럼 퍼진 기파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격공의 묘리를 검식(劍式)으로 구현한 격공검. 강엽이 재생력을 발휘할 새도 없이 목을 칠 심산이었지만....
“피해?”
때마침 강엽이 뒤로 물러났다.
깔끔하게 피하지는 못해서 경동맥이 베였지만 그 정도는 눈 깜짝할 새에 아물었다.
그 사이에도 혈목은 사방에서 마구잡이로 샘솟고 있었다.
장력을 쏟아부어 반격한 단혼마백이 무언가 걸리는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강엽은 초음으로 단혼마백의 체내를 살펴봤다.
‘늑골은 네 대가 금이 갔고, 정강이가 부러져서 운신도 여의치 않아. 내장과 혈도 곳곳에 내상을 입었어. 공력도 많이 소모했고.’
살아있는 게 신기한 몰골.
하지만 그런 상태가 되었으면서도 단혼마백의 투지는 조금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강엽을 황천길 동무로 삼겠다는 듯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회광반조?’
죽기 전에 일시적으로 기력을 되찾는 현상. 단혼마백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고 하고 있었다.
촤아악!
검결지를 쥐고 허공을 긋는다. 수십 줄기의 혈목이 잘려나가면서 짙은 피내음을 풍겼다.
그와 동시에 단혼마백의 뒤를 점한 강엽의 일권에서 막강한 발경 권파가 터져나왔다.
평상시의 단혼마백이라면 어렵지 않게 피했겠지만, 정강이뼈가 부러진 채로는 힘들었다.
그나마 멀쩡한 다리를 축으로 삼아 몸을 돌리며 똑같이 받아칠 뿐.
하지만 충격을 전부 흘려내지 못하고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며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이놈이!”
횡으로 허공을 가르는 검결지.
사전 동작을 읽고 있던 강엽은 미끄러지듯 몸을 날려 허리를 쪼개는 검격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안개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것과 동시에 굵직한 혈목이 단혼마백의 발등을 휘어감는다.
재빠르게 혈목을 피한 단혼마백이 밟아서 터뜨렸을 때 호쾌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콰아앙...!
농밀한 공력이 깃든 족격이 뱀머리를 터뜨린 것.
혈사들이 어금니를 내밀며 짓쳐들었지만 강엽은 현란한 보신경으로 어렵지 않게 빠져나갔다.
직후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휘이이익!
까아아아아아!
“흐읍!”
공력으로 이문혈을 보호한 단혼마백이 빠득 이를 갈았다.
“악랄한 놈 같으니!”
강엽의 노림수는 명확했다.
차근차근 그의 힘을 깎아서 확실한 승기를 거머쥘 작정이겠지.
그 자신은 격공검에 노출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면서 조금만 빈틈이 보인다 싶으면 여지없이 밀고 들어온다.
다섯 줄기의 섬광이 뱀머리를 갈가리 찢어발기고 피륙에 상처를 남기자 단혼마백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촤아아악!
사각에서 휘두른 격공의 참격이 뒤통수를 노리는 순간 강엽이 철판교의 수법으로 허리를 꺾었다.
단혼마백은 늑골이 부러진 고통을 공력으로 감내하며 강엽의 복부를 손날로 찍어누르려고 했다.
강엽은 자세를 되돌리지도 않은 채 각법을 차올렸다.
길게 찢겨나간 관자놀이 사이로 핏줄기가 뿌려진다.
“크학!”
크게 휘젓는 일수를 따라 핏빛 마기가 파도처럼 몰아친다.
이화접목의 무리로 투로를 비튼 강엽은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땅에 착지했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몸을 급격히 꺾었다.
‘오른쪽!’
격공검이 머리가 있던 곳을 비스듬히 스치고 지나간다.
가만히 있었다면 두개골이 쪼개졌을 터.
‘허리!’
횡소천군의 검격이 공간을 횡으로 훑었다. 흑무암쇄진의 검은 안개가 일순 흩어질 만큼 넓은 범위를 갈라버린 일검.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고 안심할 새도 없었다.
그 다음엔 심장이었으니까.
파슉!
“으윽.”
허리를 비틀어 피하긴 했지만 늑골이 잘려나갔다. 경혈까지 스치고 지나갔기에 정말로 위험했다.
‘재생력이 없었다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겠어!’
반쯤 저승 문턱에 발을 걸쳤는데도 너무나 압도적인 무위.
그러나 강엽이 놀랐어도 단혼마백의 경악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격공을 연달아 피한다니!”
한두 번은 운이라고 치부할 수 있어도 세 번, 네 번 반복되면 그것은 더 이상 운이 아니었다.
“설마... 벌써 이 영역에 올랐단 말이냐?”
격공은 유용하지만 무적은 아니다. 똑같이 격공을 쓰는 고수들끼리는 사전에 조짐을 읽고 막거나 피할 수 있기 때문.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선상에 오른 고수들에 한정해서였다. 삼화취정의 초고수는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의 우위에 있었다.
“아니군, 아니야.... 삼화취정에 오르진 못했어.”
그랬다면 무작정 피하기만 할 리가 없다.
단지 거미줄처럼 퍼진 기파가 격공으로 벼려지는 것을 사전에 감지하고 대응한 것뿐.
하지만 그거야말로 더더욱 경이적이었다. 대체 얼마나 기감이 민감해야 삼화취정에 오르지 않고도 이런 곡예가 가능하단 말인가.
이전엔 맥없이 당하던 강엽만 기억하는 단혼마백으로선 그의 성장 속도가 불가해로 다가왔다.
“필히 죽여야겠구나. 살려두면 본교의 화근이 될 놈이로다!”
격공의 공세가 한층 매서워졌다.
격공검뿐만 아니라 격공장과 격공권 등 온갖 다채로운 기예가 사방팔방에서 몰아친다.
그럼에도 강엽은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능숙하게 대처해갔다.
한 박자 빨리 피하거나 혈목을 이용해서 방패를 세웠던 것.
‘느껴진다.’
육안으로 볼 수는 없다.
초음으로도 격공의 투로를 꿰뚫어볼 수 없었다.
다만 진조의 영성이, 기감이, 그리고 초감각이 하나로 섞이면서 예지력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몸을 틀면서 장력을 격발, 격공장을 상쇄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격자 무늬처럼 쇄도하는 격공검의 중심부를 정확히 통과하고,
미간을 찌르는 격공검을 지면을 뚫고 나온 혈목으로 막는다.
허상을 남기면서 어둠 속에 녹아든 강엽이 기습처럼 단혼마백의 면전에 출현했다.
꽈앙!
묵직한 암경이 부러진 늑골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친다.
공방의 주도권을 뒤집는 일권.
“.......!”
단혼마백은 낙법도 취하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호위무사처럼 그를 지킨 혈사들도 모조리 터져나간 지 오래.
“쿨럭! 커헉!”
회광반조로 잠시 되찾은 기력이 빠져나간 얼굴엔 짙은 죽음의 징조가 드리웠다. 피를 토한 단혼마백이 힘겹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 잘난 뱀대가리들도 더 이상 못 불러내나 보지?”
“네놈...!”
단혼마백의 눈동자가 강풍을 맞은 사시나무마냥 흔들렸다.
강엽이 성장했다는 것을 절절하게 깨달은 것이다.
우우웅!
“당신에겐 고마워해야겠지.”
중단전의 기운이 하단전과 공명하여 회전하기 시작한다.
단혼마백은 생기가 희미해진 몸으로도 강엽의 기파가 변하는 것을 살필 수 있었다.
정(精)과 기(氣)가 통하는 것을 넘어, 중단전이 구체적인 형태를 잡아가는 과정.
기이이이이잉......!
“솔직히 당신을 많이 참고했거든.”
단혼마백뿐만이 아니다.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들을 참고했고, 흑룡교의 비술을 얻으면서 영감을 폭발시켰다.
고속으로 회전한 기운은 이제 중단전을 둥글게 감싸며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혈공진기로 이루어진 핏빛의 고리였다.
자세히 보면 용처럼 비늘이 달렸으며, 신령스러운 뿔과 수염이 돋아난 용머리를 하고 있었다.
마치 붉은 비늘을 가진 적룡이 자신의 꼬리를 문 듯한 형태.
‘용환(龍環).’
흑룡교의 비술을 습득하며 얻은 깨달음이 녹아든 심상.
처음에 만들어진 용환 옆에 또 하나의 고리가 비스듬히 걸렸다.
그 옆에 또 다른 고리가 걸리고, 그렇게 이어지면서... 총 다섯 개의 고리가 중단전을 감쌌다.
맞물린 다섯 개의 용환이 회전하면서 강엽의 몸 주변에 핏빛의 둥근 막을 만들어내자 단혼마백은 미칠 노릇이 되었다.
“마, 말도 안 된다! 어떻게 호신강기를...!”
이제 막 중단전을 빚은 놈이 어떻게 호신강기를 구현한단 말인가.
강엽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그게 이상한가?”
“무어?”
“삼화취정에 올라야만 호신강기를 쓰는 건 아닐 텐데.”
하후진과 흑접주는 예외였다.
물론 그들의 호신강기는 완전하지 않았다.
하후진은 경맥이 불타는 위험을 각오하고 극히 짧은 시간만 쓸 수 있었고, 흑접주는 사악한 대법의 공능으로 간신히 쓴 것이니까.
그럼에도 호신강기를 구현한 것은 사실.
강엽은 용환을 고속으로 회전, 하단전과 공명시켜 일시적으로 공력의 질과 양을 폭증시킨 것이다.
기감으로 강엽의 체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어렴풋이 감지한 단혼마백은 경악했다.
“미, 미쳤구나! 완전히 실성한 게야. 그렇지 않고서 어찌 이런 중단전을 만든단 말이냐!”
“인정하지. 미친 짓이긴 해.”
싸울 때마다 잠력을 격발시킨 것마냥 육신을 쥐어짜는 것이다.
평범한 무림인이었다면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기혈이 터지거나 주화입마에 빠졌겠지.
하지만 흡혈귀의 강건한 육신은 버텨낼 수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제껏 마신 피로 다섯 개의 용환을 만들긴 했지만 완성됐다고 보긴 힘들었다.
이보다 더 많이 만들어야 용환이 완성되겠지.
‘그때가 되면....’
단혼마백이나 전강이 그랬듯 상단전을 개통하여 정기신을 합일하는 삼화취정의 경지에 다다르리라.
“...네놈은 불가해의 괴물이구나. 외소림의 아라한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다.”
당장 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킨 단혼마백이 숨을 내쉬었다.
손은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부들거리는데도 억지로 검결지를 세워 강엽을 가리켰다.
강엽은 내심 쓴웃음을 삼켰다.
‘이렇게까지 선천지기를 소진했다면 피를 마셔봤자 별 의미가 없는데....’
지금의 단혼마백은 텅 비어버린 껍데기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생애 마지막 기운을 불태우는 마인을 향해 강엽 역시 검결지를 들어올렸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용환을 따라 농밀한 공력이 움텄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용천혈로 공력을 발출한 강엽이 한 줄기 붉은 빛살이 되어 단혼마백을 지나쳤다.
“......!”
초식이 충돌하는 일 따윈 없었다.
단혼마백의 검결지는 강엽이 두른 호신강기를 뚫지 못한 반면, 강엽의 검결지는 그의 몸 곳곳에 있는 요혈들을 베고 지나간 것이다.
약간의 사이를 두고 단혼마백이 물었다.
“...상승 검법이군. 초식의 이름이 무엇이냐?”
“뇌익(雷翼).”
자성검법의 두 번째 검초.
단혼마백과 두 번에 걸쳐 싸운 끝에 영감을 얻고 자성검법의 이초식을 깨달았다.
“모산혈조, 이 찢어죽여도 모자랄 놈 같으니. 이런 괴물을 만들고 말 한마디 없었단 말이냐....”
검은 안개로 덮인 천장을 보고 장탄식을 토한 단혼마백이 마침내 허물어졌다.
광신과 집념으로 무장한 마인의 최후.
그의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본 강엽이 몸을 돌리며 뇌까렸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그 작자도 당신을 따라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