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혈룡 (13)
전강은 시간을 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단혼마백이 옥좌로 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으면서 시간을 소진하는 것이었다.
술법진의 중추였던 흑룡교주가 사멸하자 단혼마백도 영향을 받았다.
온몸의 핏줄이 울긋불긋 치솟은 데다 피부는 터질 듯이 시뻘게졌다. 머리카락도 다시 희끗해졌다.
반면에 기파는 더욱 강맹해졌는데, 일검을 휘두를 때마다 전각이 우지끈 무너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태풍이 휘젓고 갔다고 여겼을 만한 참상.
“크아아아아아! 이놈!”
실핏줄이 터진 안구에서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검격 속에서도 전강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공세를 받아넘겼다.
고요함 속에서 움직임을 찾는다는 부동명왕보법(不動明王步法).
검격이 마치 눈이 달린 것마냥 전강을 피해가자 단혼마백은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전강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스스로를 불태우는 건가....”
삼화취정에 오르면서 마음의 눈이 트인 그였다.
불가의 육신통 전부를 통달하진 못했으나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본다는 타심통(他心通)을 조금이나마 깨우쳤다.
어느 순간부터 단혼마백의 마음 속엔 분노와 혼란만 가득했다. 기혈이 들끓어 주화입마에 빠진 것처럼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나워졌을지언정 날카로움을 잃었기에 상대하기는 오히려 수월했다.
옥좌에 가지 못하도록 시간만 끌면 알아서 자멸할 터.
검강을 피한 전강은 무리해서 반격하는 대신 멀찍이 물러났다.
단혼마백이 공격하다 말고 각혈했다.
“웨에엑!”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단혼마백의 몰골은 피눈물과 입에서 흘러나온 피로 엉망진창이었다.
젊음과 늙음이 뒤섞인 낯짝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그가 으르렁거리자 전강이 한숨을 흘렸다.
“스스로 멈출 생각은 없나 보구려.”
“닥쳐라-!”
단혼마백이 허공을 쥐는 시늉을 했다. 허공섭물로 전강을 끌어당기려는 것이다.
하수라면 흡입력을 버티지 못하고 끌려왔겠지만 전강은 허공섭물의 기파를 와해시켰다.
그 사이 다시 돌진하는 단혼마백이었다.
비록 날카로움을 잃었다지만 여전히 그의 움직임은 벼락처럼 빨랐다. 공방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해도 아차 하며 목이 날아갈 상황.
전강은 백보신권으로 단혼마백의 다리를 후려쳤지만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투카앙!
“흐읍!”
강기와 강기의 충돌. 원형으로 퍼져나간 투명한 충격파가 거센 먼지를 일으켰다.
‘단순히 주화입마에 빠진 게 아니야. 술법진의 기운과 선천지기까지 폭주시키고 있다.’
일시적으로는 본신의 경지를 초월한 힘을 얻었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는 짓거리였다.
단혼마백쯤 되는 초고수가 그런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샤아아아악!
그 집념에 호응하듯 일곱 마리의 혈사가 전강의 사지를 물어뜯는다.
전강이 은은한 금광에 물든 근육을 불끈거리자 불똥이 튀겼다.
“빌어먹을! 더럽게 단단하구나!”
소림 외공으로 갈고 닦은 육신과 호신강기의 조합은 전설 속 금강불괴와 비견할 만했다.
하지만 전강은 불길함을 느꼈다. 신경질을 낸 단혼마백이 돌연 이죽거렸던 것이다.
혈독에 당해 굳어진 팔이 꿈틀거린다.
‘설마?’
촤아아악!
길게 베인 옆구리에서 핏물이 낭자했다.
검결지를 찌른 단혼마백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걸 피해?”
전강은 내심 간담을 쓸어내렸다. 호신강기 덕분에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위험할 뻔했다.
하지만 놀란 마음과 상관없이 그의 몸은 반격을 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단혼마백의 턱을 노리고 후려친 팔꿈치가 혈사의 머리를 터뜨린다.
둔중한 충격에 단혼마백이 뒷걸음질을 치는 찰나 전강이 주먹을 쭉 뻗었다.
휘황한 금광이 허공을 꿰뚫었다.
“후우...!”
단혼마백의 신형이 공중제비를 돌았다. 전각 위에 착지한 그의 모습에 전강이 작게 숨을 골랐다.
단혼마백이 음산하게 웃었다.
“내공에 한계가 왔구나!”
술법진과 합일되어 무한에 가까운 공력을 휘두른 그와 달리 일신의 공력만으로 싸운 전강이었다.
최대한 공력을 아꼈다고 해도 지금쯤이면 단전이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흐흐, 꼴 좋구나! 시간이 제 편인 줄 알았더냐!”
“당신의 편도 아닌 것 같소만.”
이미 단혼마백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술법진이 풀리면서 안개가 물러나고, 조금씩 갠 하늘에서 옅은 빛줄기가 내리쬐고 있었다.
“흑룡교의 마공은 양생(陽生)의 기운과 상극이지. 그들이 총단이나 분타에 사시사철 안개를 드리운 것은 음지에서만 전력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었소.”
“으음...!”
단혼마백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전강의 말마따나 일신에 두른 기파가 약해지고 있었다.
“힘을 다하는 사람이 먼저 쓰러질 것이오.”
“과연 그럴까?”
단혼마백의 눈길은 전강이 아니라 무너진 전각 너머를 향해 번뜩이고 있었다.
그쪽을 곁눈으로 힐끔거린 전강은 쓰러진 사람들을 발견하고 납덩이처럼 경직되었다.
일찍이 술법진에 사로잡힌 괴뢰인들.
단혼마백이 불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기관진식에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 방치되었던 것이다.
“이런...!”
“막아봐라, 놈!”
허공섭물로 부서진 파편들을 끌어올린 단혼마백이 사람들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안 그래도 쇠약해진 사람들이 잔해더미에 깔린다면 살아날 가망성이 만무했다.
이게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전강의 몸은 이성의 경고를 무시하고 움직였다.
격공으로 커다란 잔해들을 부수고 팔다리로 자잘한 파편들을 후려치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거대한 그림자가 전강을 짓눌렀다.
길이만 이 장에 달하는 지붕의 잔해가 그대로 전강을 깔아뭉갠 것.
‘박살내면 위험하다!’
그는 몰라도 정신을 잃은 사람들은 작은 파편에만 맞아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전강이 손을 뻗어 지붕을 받아냈다. 불문 정종의 웅혼한 기파가 무거운 덩어리를 부드럽게 떠받쳤다.
똑같이 허공섭물로 막아낸 것이다. 작게 손목을 휘돌리자 지붕이 원을 그리면서 돌아갔다.
문제는 단혼마백이 그 꼴을 그냥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붉은 유성이 지붕 덩어리를 산산조각 깨버리면서 파편을 날려버렸다.
가까운 사람들은 파편을 맞고 짓이겨졌다.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살에 파편이 푹푹 박혀서 핏줄기를 뿜어냈다.
하나 그들의 죽음에 애석해할 겨를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 어리석은 놈! 알량한 동정심으로 스스로를 죽이는구나!”
시뻘건 검강이 흉근을 파고들었기 때문. 호신강기로 인해 관통하진 못했지만, 조금씩 근육을 가르고 심장에 다다르고 있었다.
눈알을 부라린 전강이 팔꿈치를 뒤로 당겼다. 우락부락한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딜! 이번에야말로 끝이다!”
샤아아아아아!
혈사가 팔뚝을 잡아챈다. 다른 머리들이 반대쪽 팔과 옆구리, 허벅지 등에 송곳니를 박아넣는다.
뜯겨졌던 몸통이 꾸물거리면서 새로운 머리가 나와 전강의 목덜미를 물었다.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입질을 했다.
“힘을 다하는 사람이 쓰러진다고 했었느냐? 누가 먼저 쓰러질지 두고 보자꾸나.”
“큽...!”
단혼마백이 낄낄거렸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엔 숨길 수 없는 광기가 꿈틀거렸다.
죽음을 앞둔 그였기에 잃어버릴 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그를 사지에 몰아넣은 외소림의 아라한을 저승길 길동무로 삼는 것뿐.
갈비뼈 사이 기문혈(期門穴)이 찔리는 고통에 전강의 안색도 단혼마백 못지않게 시뻘게졌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눌린 즉시 기절했겠지만 초인적인 인내력과 심후한 내공으로 버텨냈다.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무렵이었다.
투아앙!
“커헉!”
단혼마백이 휘청거렸다.
“뭐냐? 갑자기 뭔...!”
빛살처럼 날아온 철창이 혈사를 찢어발기고 등짝을 때린 것이다.
다행히 장기까지는 파고들지 못했으나 충격으로 인해 전강을 옥죄였던 압력이 느슨해졌다.
겨우 운신에 성공한 전강은 지체하지 않았다.
콰아앙!
천년의 거암도 부수어버릴 무지막지한 권격이 단혼마백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
오장육부가 이탈하는 듯한 위력.
허공을 부유하는 단혼마백의 목구멍에서 내장 조각이 섞인 핏줄기가 뿜어져나왔다.
따라가서 끝장을 내버릴 절호의 기회였지만, 전강은 그러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혈사가 주입한 마기가 절독처럼 전신 경맥을 휘젓고 있었다.
* * *
전강의 앞에 흑포를 입은 청년이 섰다.
“고생 좀 하셨군요.”
“강 무사....”
다가오는 강엽을 본 전강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고맙소. 덕분에 목숨을 건졌소.”
“이 사람들 지키려다 당한 겁니까?”
강엽의 시선이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자 전강의 안색에 그늘이 드리웠다.
“...내가 신중하지 못했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서 단혼마백을 유인했다면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을.
자책하는 전강을 가만히 내려다본 강엽이 몸을 돌렸다.
“전강이 아니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지요. 술법진도 파훼하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전강이 없었다면 술법진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이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책할 때가 아닙니다. 저놈을 쓰러트려야 끝나니까요.”
“알고 있....”
전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치이익!
강엽의 피부가 붉게 타고 있는 게 아닌가?
“강 무사, 그건...!”
“망할 태양.”
대뜸 욕지거리를 지껄인 강엽이 응달진 구석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화상이 가라앉으며 새살이 돋았다.
“...그래서 흑무암쇄진을 찾은 것이구려.”
“....”
강엽은 입을 다물었다. 재생력은 그렇다 쳐도 태양이 약점이라는 사실은 숨기고 싶었으니까.
하나 술법진이 풀린 이상 태양볕이 들이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머지않아 이 일대는 그가 활동할 수 없는 절대사지가 되고 말리라.
“강 무사, 여의치 않다면....”
“아뇨, 괜찮습니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의아해하는 전강을 두고 수인을 맺었다. 합장을 하고 양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는 선정인을 결한다.
“어차피 그 몸으로는 못 싸울 것 아닙니까. 저놈은 제가 처리할 테니 여기 사람들이나 옮겨주십시오.”
단단한 결의를 느낀 전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엽은 설핏 미소 짓고는 응달을 나왔다.
옷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피부가 태양볕과 맞닿으며 허연 연기를 내뿜는다.
가까스로 몸을 가눈 단혼마백은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피로 점철된 입꼬리를 당겼다.
“쿨럭! 웃기는 꼬락서니로다...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놈이 화상으로 쩔쩔매다니....”
“당신이 남을 비웃을 처지는 아니지 않나? 지금도 저승 문턱에 반쯤 들어간 것 같은데.”
“흐흐, 그래서 저놈을 길동무로 데려가려고 했지.... 이제 네놈도 같이 데려가면 되겠구나.”
“다 죽어가는 주제에 꿈만 크군.”
강엽이 짧게 무어라 읊조리는 순간이었다.
발치에서 칠흑처럼 검은 안개가 솟구치며 그와 단혼마백이 있는 공간을 감싸기 시작했다.
상상치도 못한 광경에 흠칫 놀란 단혼마백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출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냐?”
“흑무암쇄진.”
어둠 속에서 들린 나직한 목소리.
옛 기억을 들춘 단혼마백은 그게 구천호법이 쓴 고절한 술법진임을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뜻밖의 상황에 주춤하는 그를 향해 강엽이 낮게 중얼거렸다.
“놈을 잡아라.”
“지금 누구에게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혼마백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피처럼 붉은 나무 줄기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왔던 것이다.
진조에게 인정받아 새로이 각성한 능력.
혈목(血木)이 단혼마백의 사지를 꽁꽁 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