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혈룡 (12)
사람이 죽는 광경은 수도 없이 접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씹어먹히는 꼴을 보니 속이 메스꺼워졌다.
“...너도 저렇게 먹는 건 아니지?”
“난 피만 빤다.”
“다행이네.”
말하고 나서 고개를 갸웃했다.
다행인 게 맞나?
[흥, 누가 들으면 식인종으로 알겠구나.]
흑룡교주를 먹어치운 진조가 꺼억 트름을 하는가 싶더니 입 안에 든 것을 퉤 뱉어냈다.
한때 흑룡교주였던 것의 잔해였다.
“....”
“....”
뭐라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묘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향해 진조가 턱을 괴었다.
[못 보던 사이에 꽤 강해졌군. 중단전을 열었어. 그동안 꽤 많은 고수를 잡아먹었구나.]
그 말에 놀란 건 강엽이 아니라 백서희였다. 하지만 낄 데 못 낄 데 구분하는 눈치는 있었기에 놀랐을지언정 함부로 나서진 않았다.
새삼 피로를 느낀 강엽이 눈가를 문지르며 물었다.
“내 안에서 보고 있던 것 아니었나?”
[대충은.]
진조의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그건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실제로 이렇게 대면하는 것만은 못하지.]
저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아니었다.
강엽이 진실로 궁금해하는 건 따로 있었다.
“한데 당신, 원래 그렇게 강했나?”
진조가 강한 것은 알고 있었고, 도움을 받기 위해 지원을 부탁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조와 힘을 합칠 생각이었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털어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모산혈조와 싸울 땐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그때도 이만큼 강했다면 모산혈조는 도망치지 못하고 꼼짝없이 잡혀 죽었을 것이다.
[그땐 짐이 약했으니까.]
“음?”
[수백 년간 관짝에 누워서 피도 못 빨았는데 기력이 남아있을 턱이 있나. 약간의 피를 마시긴 했다만 그걸론 어림도 없느니라.]
“지금은 다르다?”
[네 덕분이지. 심상에서 짐이 쓸 수 있는 힘의 한계치는 네가 지닌 공력에 비례한다.]
단, 진조의 힘은 심상에서만 통하기 때문에 현실에선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분명히 해두마. 짐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알고 있다. 나도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한 직후 조금 머뭇거리던 강엽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만약 진조가 호응하지 않았다면 흑룡교주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신세를 면치 못했으리라.
감사 인사를 들을 줄 몰랐는지 진조는 눈을 끔벅이다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큭큭, 네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도와준 보람이 영 없진 않구나.]
“인정하지. 이번엔 빚을 졌어.”
[됐다. 후계자라는 녀석이 하찮은 놈팡이에게 조종당한다면 고역이지 않느냐. 고마우면 얼른 강해져서 짐의 권능이나 물려받거라.]
“아, 그것 말인데... 안 그래도 조만간 당신을 다시 볼 것 같다.”
동정귀옹의 피를 마시면서 슬슬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섰다.
진조가 턱을 어루만졌다.
[그렇군. 새로운 능력을 얻을 때인가.]
“그래. 당신 말대로라면 시험을 치러야....”
[생략하지.]
“...?”
[이번엔 시험을 치르지 않고 능력을 얻을 게다.]
한 박자 늦게 말뜻을 깨달은 강엽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생략한다는데 기쁘지 않느냐?]
“그게 생략할 수 있는 거였나?”
[중단전도 개방했고, 암신이나 초음도 어느 정도 숙달됐으니 통 크게 넘어가주마.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진조의 손가락은 강엽의 심장 어림 중단전을 향하고 있었다.
중단전을 개방했지만 아직 명확한 형태를 잡지 못했음을 꼬집은 것이다.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르는 데 두 가지 난관이 있다고들 하지.]
그중 하나가 중단전을 빚는 것이다.
이걸 못하면 상단전 개통은 꿈도 못 꾼다.
[다행히 어느 정도 실마리는 잡은 것 같구나. 중단전이 자극받고 있어.]
“아직 멀었어.”
여러 고수들과 맞상대를 하며 방향을 잡았을 뿐, 돈오(頓悟)처럼 단숨에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심상을 그려넣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일단 여길 나가는 게 먼저겠지.”
바깥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괴뢰인들은 정신을 차렸을지, 전강과 단혼마백의 싸움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 아니, 서둘러선 안 되지.]
“무슨 말이지?”
[하늘을 보거라.]
그 말에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강엽은 쏟아질 것처럼 찬란한 별빛에 넋을 나가버렸다.
마치 밤하늘을 가로지른 은하수 같았다. 물론 실제 은하수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으나, 평생 다시 보기 힘든 장관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백서희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여기에 별이 있었어?”
“...별이 아니야.”
진조의 영성이 답을 알려준다.
저것이야말로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이라고.
“흑룡교의 비고.”
“저게?”
비고라고 하길래 장서고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두 사람이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진조가 설명했다.
[정확히는 흑룡교주라는 놈의 기억이지. 놈의 죽음과 함께 심상세계도 부서진 거다.]
그리고 심상세계가 부서지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이나 기억 등이 산산조각나서 쏟아지는 것이다.
[심상이란 게 무엇이냐. 결국 마음과 기억이 심상을 결정한다. 심상세계가 부서지면 죽은 자가 지녔던 것들도 함께 부서지는 게야.]
진조가 손짓을 하자 별빛처럼 부서지던 조각들이 바람결에 흩날려서 강엽에게 흘러갔다.
강엽의 손과 닿은 별조각들은 피부에 스며들면서 환하게 빛났다. 하지만 강엽은 외양의 변화보다 내부의 변화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네가 그토록 찾던 것이다.]
“아...!”
한번도 배운 적 없는 술법진의 구결이 떠오른다.
다행히 흑접주의 비고에서 얻은 흑룡교의 비술들이 구결을 이해할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이 터질 듯이 복잡해지자 강엽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머릿속에 떠오른 글자들을 음미하는 동안 그의 사고는 점점 확장되었고, 머릿속에서 수많은 무공 구결들과 술법 구결들이 명멸했다.
“저거 괜찮은 거예요?”
백서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운기 중엔 건드리면 안 되는데 강엽이 새로운 별조각들을 받아들이니 걱정이 됐다.
[상관없다. 녀석의 재능이라면 이 안에 있는 것들을 전부 빨아들여도 능히 버틸 수 있을 터.]
강엽이 얼마나 강해질지는 진조도 예단할 수 없었다.
그건 전적으로 강엽의 몫이었으니까.
[이제 네 문제만 남았구나.]
진조의 눈길을 받은 백서희는 태산이 몰려오는 것처럼 아득해지는 기분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살인멸구할 건가요?”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느냐.]
다만 그녀는 너무 많이 알았다.
강엽이 흡혈귀라는 사실부터 진조의 존재까지.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다고 맹세해도 말만 앞서는 약속은 깃털만큼 가벼운 법.
죽음은 피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릴 새도 없이 진조의 말이 이어졌다.
[네 기억을 지울 것이다.]
과거 강엽이 흡혈귀가 되었을 때도 그런 식으로 목격자를 없애지 않았던가.
북해빙궁의 야율소소는 빙궁의 무인들로부터 강엽을 지키기 위해서 그냥 놔두었지만 말이다.
백서희가 어색하게 입가를 올렸다.
“기억을 지우겠다.... 살인멸구에 비하면 참 가볍네요.”
[짐은 관대하다.]
“근데 그게 소용이 있을까요?”
[짐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냐?]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강엽의 정체를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저 말고 또 있거든요?”
[...그렇군.]
진조도 조금 늦게 전강의 존재를 떠올리고 안광을 빛냈다.
엄밀히 말하면 전강은 강엽이 흡혈귀라는 사실은 몰랐다. 그가 흡혈하는 광경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강엽이 목숨이 날아갈 치명상을 여러 번 입고도 멀쩡히 살아나는 것을 목격했으니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죠? 저만 기억을 지워서 뭐하겠어요? 그 사람 입까지 막아야 확실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놔달라?]
“절대 발설하지 않을게요.”
[그놈은 그렇다 치고 넌 어떻게 믿느냐?]
“가족의 명예를 걸면 되잖아요.”
딱히 강엽의 약점을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기억을 잃는 게 싫어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실을 찾는 것뿐.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는 백서희의 표정에 진조가 쯧쯧 혀를 찼다.
[잔머리 쥐어짜는 게 눈에 보이는구나. 기껏 자비를 베풀었건만 벌주를 택하는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서희는 손바닥이 따끔거리는 통증에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칼로 벤 것처럼 손바닥에 혈선이 그어졌다.
[그러게 얌전히 따랐어야지.]
진조가 손가락을 펴들자 그녀가 흘린 걸로 짐작되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흐읍! 언제?’
백서희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옥좌에 앉은 진조가 어찌 움직였는지 눈치채지도 못했다.
진조가 피가 묻은 손을 꽉 쥐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됐군.]
“뭐, 뭘 한 거예요!?”
[별거 아니다. 만약을 대비했을 뿐이지. 녀석의 정체나 짐에 대한 것을 떠벌린다면 짐의 주력(呪力)이 널 황천으로 인도하리라.]
그것은 술법의 금제였다.
일찍이 흑접에서 지내는 동안 술법의 금제를 겪어본 백서희는 표정이 썩어문드러졌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클클, 너무 억울해하지 말거라. 너 말고 다른 녀석도 이 금제를 당한 적이 있으니.]
“...것참 위로가 되는 말씀이네요. 기왕이면 누군지 말씀 좀 해주시죠?”
[북해빙궁의 계집이었지.]
“북해빙궁?”
북해빙궁과는 언제 만난 거람.
운기 삼매경에 빠진 강엽을 흘겨본 백서희는 곧 자신의 신세를 자각하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겨우 흑접의 금제를 벗어났건만 또 금제라니, 왠지 하늘을 보고 울고 싶어졌다.
“내 팔자 왜 이러냐고....”
* * *
흑룡교주의 죽음과 함께 괴뢰인들은 힘을 잃었다.
허수아비처럼 쓰러지자 강엽과 백서희를 호위했던 사람들은 두 사람이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이 쓰러지고 있습니다!”
“섣불리 건드리지 마시오!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소!”
사자후처럼 터진 후개의 고함에 쓰러진 괴뢰인들을 일으키려던 몇몇 무림인들이 흠칫했다.
후개가 다시 침중히 외쳤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비록 괴뢰인이 쓰러졌으나 적은 남아 있었다.
정신을 차린 무림인들은 부상자들을 돌봤다. 피투성이 몰골로 쓰러진 야차마곤과 팽관후도 바로 눕혀서 급한 처치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때도 옥좌를 떠나지 못한 후개는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무사해야 할 텐데.’
주변의 피해가 커지자 전강은 단혼마백을 괴뢰인들이 나왔던 통로로 내몰았다.
괴뢰인들이 쓰러진 걸로 보아 술법진이 끝난 것 같지만 단혼마백도 영향을 받을지는 미지수였다.
만약 단혼마백이 이긴다면 그땐 모두가 죽음을 면치 못할 터.
‘제발, 둘 중 누구라도 먼저 돌아와주시오.’
강엽과 전강, 둘 중 하나만이라도 돌아와야 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
백서희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후개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백 소저, 무사하시오?”
“그야 무사한데... 윽!”
백서희가 일어나다 말고 코를 막자 후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왜 그러시오? 무슨 문제라도 난 거요?”
“...비켜.”
“비키라니 뭘...?”
“냄새 난다고.”
안 그래도 잘 씻지 않는 후개였다. 여기에 땀냄새와 피냄새까지 섞이니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코를 쥔 채 눈살을 찡그리는 백서희의 얼굴에 후개가 멋쩍어하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허연 비듬이 우수수 떨어지자 그녀가 기겁했다.
“윽, 야! 좀 씻고 다녀!”
“에이, 거지가 씻어서 뭐 하겠소? 그나저나 강 형은 언제 깨어나는 거요?”
“조, 좀 있으면 깨어날 거야.”
과연 그녀의 말대로 반 각쯤 지났을 무렵 강엽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이전처럼 붉은 눈동자가 아니라 흑요석처럼 검은 눈동자였다.
어쩐지 고요하면서도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눈동자에 백서희는 한순간 멍해졌다.
‘...달라졌어.’
심상에서 강엽이 운기조식을 하는 것을 봤지만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무언가 달라졌다. 이전처럼 사특한 기운을 내뿜지도, 살기가 넘치지도 않았다.
후개도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강엽의 말에 퍼뜩 정신 차렸다.
“상황은?”
“아, 그게... 전강이란 분이 단혼마백을 내몰았소! 저쪽 통로로 빠져나갔는데....”
후개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와 무림인들이 빠져나온 통로의 반대쪽이었다.
백서희는 왠지 강엽이 어떻게 할지 알 것 같았다.
“갈 거지?”
“으잉?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그 싸움에 끼어들겠다고?”
후개의 눈이 쥐방울 만해졌다. 초절정의 고수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격전에 참견하겠다니?
“가, 강 형이 강한 건 알지만 그건 자살행위요! 우리랑 같이 여기서 싸움 끝나길 기다립시다! 보아하니 단혼마백은 한쪽 어깨도 못 쓰는 것 같은데 전강이란 분이 무난하게 이기지 않겠소?”
“시험해볼 게 있어서 말이야.”
“어? 자, 잠깐! 강 형!?”
다음 순간 이어진 광경에 후개가 눈을 비볐다.
강엽이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왜? 나더러 뭐 어쩌라고?”
“.......”
백서희가 자신도 방법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후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