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27화 (127/450)

19화. 혈룡 (11)

다른 사람 앞에서 흡혈귀를 입에 담은 것은 처음이다.

백서희가 턱을 살짝 기울였다.

“흡혈귀?”

-사람의 피를 마시는 족속이니라.

이번에도 흑룡교주의 입에서 답이 나왔다.

-혈교의 시조 혈마가 사람의 피를 마시는 불로불사의 요괴였다지. 네놈이 했던 짓이 그와 같더구나.

“....”

어차피 흡혈귀를 입밖에 낸 뒤다.

이제 와서 부정해봤자 의미가 없겠지.

‘혈마도 흡혈귀였다면 진조와 무슨 관계지?’

진조가 혈마였을까.

하나 그가 혈마라면 모산혈조는 어째서 진조에게 온전히 충성하지 않은 것일까.

그가 진실된 혈교도가 아니라서?

설령 그렇다 해도 휘하의 무인들은 혈교에 속했을 테니 진조에게 충성했을 텐데?

-원래는 네놈과 만날 생각이 없었다. 내 후손을 이용해서 끌어들이다니....

“알면서도 끌려온 놈이 병신이지.”

-아무리 봐도 저 아이가 스스로 옥좌에 앉을 기미가 안 보이더군. 내 후손이라는 자각이 있었다면 기뻐하며 앉았을 텐데....

지극히 무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낮게 뇌까리는 얼굴엔 아쉬운 감정이 묻어나왔다.

백서희가 콧방귀를 흥 뀌었다.

“추잡한 새끼가 염병하고 자빠졌네.”

-흠, 본 교주에게 하는 말이냐?

“그럼 누구에게 하겠어?”

-후우....

흑룡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거대한 종파의 주인으로서 자기 후손들에게 쌍욕을 처먹을 거라고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조금 서글프구나. 유일하게 남은 후손이 위대한 용혈이라는 자부심이 없는 것도 모자라서, 최소한의 품위조차 갖추지 못하다니.

“누가 들으면 내가 사는 데 뭐라도 보태준 줄 알겠네. 내가 누군지는 알아?”

-알 필요가 있겠느냐.

뒷짐을 쥔 흑룡교주가 한 걸음 옮긴다.

-네가 여기에 들어온 걸로 목적을 이뤘는데.

그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녀의 용모도, 성품도, 심지어 무공도 아니었다.

-네가 누군지는 상관없다. 여기에 들어온 이상 본 교주의 의지를 받들어서 흑룡교를 재건할 뿐.

상관추영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흑룡교주는 그녀의 마음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흑룡교를 재건할 그릇으로 여길 뿐이었다.

“지랄 마! 누가 얌전히 흑룡교주가 된대?”

-반항해봤자 소용없다.

그 순간, 지면에서 수많은 사슬이 튀어나와 두 사람을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져내렸다.

각자 공력을 일으킨 두 사람이 보법과 신법을 밟으며 사슬의 소나기를 피해서 거리를 벌렸지만....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두 사람이 물러나는 곳에서도 여지없이 사슬이 나오며 어지러운 궤도로 휘몰아쳤다.

터어엉!

강엽의 장력이 궤도를 비틀었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사슬이 전후좌우에서 쇄도한다.

-여긴 본 교주의 심상세계다. 너희가 날랜 재주가 있어도 그 힘이 어디까지 갈 것 같은가?

그가 엄지와 중지를 마찰시켜 딱 튕기는 소리를 내자 백서희의 움직임이 갑자기 굼떠졌다.

“이런, 공력이...!”

-본 교주가 허락하지 않으면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심상세계에 들어온 이상 싸움은 성립되지 않는다.

독사처럼 머리를 꼿꼿이 치켜든 사슬들이 날아오는 광경에 백서희는 암담함을 느꼈다.

“아...!”

그렇게 탄식하는데 시커먼 인영이 그녀의 앞을 막으면서 사슬을 낚아챘다.

“강엽!?”

대체 어떻게?

내공을 봉인당한 몸으로는 지나치게 빠른 보신경이었다.

흑룡교주도 이해되지 않는지 기광을 발했다.

-외공의 힘으로 흑룡박(黑龍縛)을 잡았나.

내가기공과 달리 외공은 공력을 필요치 않으니 어느 정도 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고작 외공으로는 사방팔방에서 휘몰아치는 수천, 수만 개의 사슬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백서희도 곧 맞이할 운명을 직감하고 파르르 떨었다.

‘아무리 이 녀석이라도 무리야.’

물론 강엽에게는 무공 말고도 술법이 있었지만 기이한 힘을 발하는 흑룡교주에게 통할 것 같진 않았다.

흑룡교주가 한 짓을 보면 술법으로도 일가를 이룬 것 같고 말이다.

‘저 인간은 대체 뭔데?’

강엽이 흡혈귀라고 하나 흑룡교주도 괴력난신이었다.

수십 년 전에 죽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그가 휘두르는 힘도 상리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뿐이었다.

촤르륵! 촤르르르륵!

두 사람을 포위하는 수천 수만 개의 사슬들.

저들끼리 둘둘 꼬이면서 뭉친 사슬들은 기둥처럼 두꺼워지더니 이내 시커먼 용대가리로 거듭났다.

아홉 마리의 용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광경에 백서희는 새삼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여기에 온 것 자체가 실수였다, 흡혈귀.

처음에 강엽이 옥좌에 앉았을 때 만나주지 않은 것은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강엽이 잘못되면 백서희가 더더욱 옥좌에 앉으려고 하지 않을 테니 만나줄 이유가 없었던 것.

-네가 만용을 부린 덕에 저 아이가 본 교주의 앞에 왔구나. 그 공로를 높이 사서 네 정신도 제압해주지. 너 역시 바깥에 있는 혈교의 종자처럼 도구가 될 것이다.

“자신만만하시군.”

-그럴 수밖에.

공력도 제한된 마당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흡혈귀의 육신이 강건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의 마수에서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촤아아악!

아홉 마리의 흑룡이 아가리를 벌리자 사슬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누가 봐도 살아날 구멍이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터터터터터텅!

사슬이 강엽의 몸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도중에 튕겨나가는 게 아닌가?

-내공을 쓴다고?

“어, 어떻게 된 거야?”

강엽이 손을 들자 태극반이 흡자결의 기파를 발해서 사슬들을 한 점으로 빨아들인다.

그렇게 뭉친 사슬들을 손날을 휘둘러서 잘라버린 직후였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흑룡 한 마리의 몸통에 큼지막한 구멍이 생겨났다.

일권에 모든 공력을 때려박은 강엽이 구멍 너머에 있는 흑룡교주를 노려보면서 손목을 주물렀다.

“더럽게 단단하군.”

십이성의 공력을 다한 일격이었는데 구멍을 내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흑룡교주의 놀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어떻게 내공을 쓰는 거지?

이제까지 견지했던 무표정이 깨져나가며 작게나마 놀람의 감정을 드러내는 흑룡교주였다.

-분명히 내공을 금하였다. 산공독(散功毒)에 중독당한 것과 진배없을진대....

“알려줄 거라 생각하나?”

강엽이 입꼬리를 길게 당겼다.

왠지 얄밉게 느껴지는 비웃음에 흑룡교주가 얼굴을 찌푸리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본디 그의 심상세계는 흑룡교가 건재하던 시절의 총단을 고스란히 옮겨둔 듯한 정경이었다.

한데 외곽이 급격히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난데없는 우레가 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헉!”

백서희가 질겁했다.

평평한 판석 사이로 흘러나온 핏물이 발치까지 차올랐던 것이다.

-...그렇군.

흑룡교주는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고는 금세 감정을 수습했다.

-네놈의 심상세계였구나.

옥좌에 앉을 당시 강엽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

예전에 심상세계에서 진조를 만났을 때처럼.

하지만 옥좌의 술법진이 강엽과 백서희를 흑룡교주의 심상세계로 끌어당겼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의 심상세계가 겹쳐지고 말았다.

“손 잡아.”

“어?”

강엽의 말에 백서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얼떨결에 손을 뻗어 강엽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잃어버렸던 내공의 힘이 급격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건지 알려줄 수 있어?”

“흠, 쉽게 말하면....”

강엽은 내심 어떻게 설명하면 될지 말을 고르다 그냥 과정은 건너뛰고 결과만 말해주기로 했다.

“저놈이 주도권을 잃어버린 거지.”

두 사람의 심상세계가 섞이면서 흑룡교주는 절대자처럼 행세했던 권능을 잃어버렸다.

그가 만들어낸 흑룡들도 피가 닿자 고통을 느끼는지 거체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백서희는 잠시 강엽의 얼굴을 바라봤다.

“뭐, 묻고 싶은 건 많지만....”

강엽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이 문제를 걸고 넘어지기엔 때와 장소가 좋지 않았다. 뭣보다 그녀의 인생도 골머리를 썩힐 만큼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출생의 비밀부터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알려주마.”

“아, 그래. 고마....”

“네가 궁금해하는 것도.”

“...알고 있어?”

강엽이 긍정하는 눈빛을 보내자 백서희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놈부터 족치고.”

“그래야지.”

내공을 되찾긴 했지만 흑룡교주는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그가 부른 흑룡들도 건재한 상황.

-감히 본 교주와 주도권을 다투려고 하다니... 네놈이 불사의 괴물이라도 천 년은 이르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기세를 회복한 흑룡교주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드넓은 부지 위에 찰박거리던 핏물이 증발한 것처럼 급속도로 마르기 시작했다.

-제법 머리를 굴렸다만 여기까지다, 흡혈귀.

살아생전 신인의 반열에 올라갔던 절대자답게 흑룡교주는 심상세계에서의 공방에도 능숙했다.

-인간은 모두 내면의 심상을 갖고 있지. 술법을 극한까지 단련한 술사들은 심상을 활용할 수 있다.

결국 심상세계에서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술사로서의 역량과 정신력이었다.

강엽도 나름대로 술법을 갈고닦았지만 종사의 칭호를 받은 흑룡교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강엽은 조금도 절망한 얼굴이 아니었다.

“물론 내가 술법으로 겨룬다면 당신의 상대는 아니겠지. 내가 패배하는 건 당연해.”

하지만 패배를 받아들이면서도 강엽의 얼굴은 전혀 패배감에 물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원군을 불렀다.”

-무어라?

이해하지 못할 말에 흑룡교주가 눈을 역팔자로 치켜뜨는 그 순간이었다.

[클클, 제법 맛있는 먹잇감을 갖고 왔구나.]

한 줄기 굵직한 전성이 대기를 진동했다.

그리고 흑룡교주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배후를 점한 무언가가 그를 채찍처럼 강타했다.

콰아아앙!

-......!

불시의 기습에 흑룡교주는 이렇다 할 반격조차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저게 뭐야!?”

백서희가 입을 떡 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일 장에 달하는 거인이 흑룡교주의 안면을 향해 호쾌한 일권을 갈기는 게 아닌가?

그오오오오오!

주인이 공격받자 흑룡들이 괴성을 토하며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거인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흉흉한 안광을 발하며 짧게 내뱉었다.

[죽어라.]

그러자 흑룡들이 달려들던 그대로 몸이 무너지면서 수만 개의 사슬로 돌아갔다.

벌떡 일어난 흑룡교주의 동공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어찌 본 교주의 흑룡박을...!

[웃기는 망발을 하는구나. 너 자신의 원본이라면 모를까, 혼백의 일부밖에 안 되는 놈이 짐의 상대가 될 것 같더냐?]

-...!

[분혼대법(分魂大法)으로 혼백을 나누었군. 죽음을 피하려는 목적이렷다?]

고대의 술사들은 불로장생을 이루기 위해 온갖 방술과 대법을 깊이 연구했다.

타인의 몸을 강탈하는 이혼대법이나 스스로의 혼백을 쪼개는 분혼대법 역시 그 일환이었다.

[분혼대법으로 혼백을 쪼개고, 이혼대법으로 타인의 몸을 강탈할 셈이었겠지. 대상은 저기 있는 계집이었을 테고 말이다.]

-네놈은 누구지? 누구길래 타인의 심상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이냐?

흑룡교주가 멀리 있는 강엽을 힐끔거렸다. 그가 말한 지원군은 눈앞의 거인일 것이다.

[생각보단 멍청한 녀석이었군. 저 녀석의 정체는 알면서 짐의 정체는 짐작을 못하느냐?]

하얗게 웃는 거인의 입가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자 흑룡교주가 경직되었다.

-...혈마?

[그리운 이름이구나.]

그 순간 흑룡교의 총단이 사라졌다.

사라진다는 과정을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모조리 사라져 있었으니까.

새로이 드러난 풍경 앞에선 흑룡교주도, 심지어 강엽과 백서희도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샛노란 화마가 세상을 까맣게 불태우고 있었다.

수천, 수만 명의 시체들이 말뚝에 박힌 가운데 마귀들이 게걸스레 뜯어먹고 있는 인세의 지옥도.

태양조차 내리쬐지 않은 잿더미 위에서 진조가 오연히 팔짱을 낀 채 흑룡교주를 굽어보았다.

강엽에게 능력을 물려주면서 불구가 됐지만, 검붉은 혈공진기가 잃어버린 신체 부위를 대체한 것이다.

-이건 대체...!

[네놈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술법을 극한으로 단련한 술사들은 심상을 다룰 수 있다고.]

-그럼 여기가?

[그렇다. 짐의 심상이니라.]

한 줌의 태양볕도 허락되지 않은 지옥.

어느새 자신의 거구에 걸맞는 옥좌에 몸을 누인 진조가 흑룡교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흑룡교주가 기수식을 취했지만 그의 몸은 의지를 거슬러 진조의 손에 목이 잡혔다.

-큭...!

[본인도 아니고 혼백의 찌꺼기에 불과한 놈이라면 다루는 건 아주 쉽지.]

절대자처럼 행세했던 흑룡교주를 어린아이 다루듯 제압한 모습에 강엽과 백서희는 말문이 막혔다.

흉신악살처럼 얼굴이 썩어문드러진 흑룡교주가 진조의 팔을 잡고 버둥거렸다.

-혈마...!

[뭔가 단단히 오해했구나, 흑룡의 아해야. 짐은 네놈이 말한 혈마가 아니다.]

진조가 혈마가 아닐까 생각했던 강엽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진조가 씩 웃었다.

[혈마의 최후를 들어본 적 있느냐?]

-...뭐?

눈을 부릅뜬 흑룡교주의 귓가에 입을 가져간 진조가 클클거리면서 작게 속삭였다.

[짐의 뱃속에서 일용한 양식이 되었지.]

-...!

그리고 진조가 입을 벌렸다.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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