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혈룡 (8)
‘운이 좋군.’
별호에 음(音)이 있고, 비파까지 갖고 있으니 음공의 고수일 터.
강엽 역시 급할 때마다 망혼소를 쏠쏠이 써먹었기에 음공이 얼마나 악랄한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 상대를 향해서만 내공 음파를 집중시킬 수 있다면 동정귀옹 이상으로 성가셨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더 강한 동정귀옹을 죽이는 게 이득이었지만 놈의 반응이 너무 기민했다.
‘독야마랑과 비슷한 경지.’
동정귀옹 역시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였다.
초음으로 살펴보니 형상이 제법 뚜렷한 게 순수하게 무공 경지만 논하면 강엽 이상이었다.
한편 동정귀옹도 강엽을 경계했다.
경험 많은 노강호답게 금세 울화를 가라앉힌 그는 심유한 눈으로 강엽을 관찰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귀신 눈깔을 한 놈이로고.”
“뭐?”
“흉성을 터뜨리지 못해서 안달이 났어. 아무리 봐도 백도 친구가 아닌데 외소림의 아라한과 협력하다니 기이안 일이로군.”
“....”
강엽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야차마곤과 팽관후의 몸에서 풍기는 피냄새가 흡혈귀의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하물며 방금 전엔 도비사음의 심장을 터뜨렸으니 흡혈욕을 참느라 침을 몇 번이나 삼켜야 했다.
어제 웬종일 포식해서 흡혈욕이 가라앉아야 하건만 오히려 반대의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피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고수인 탓도 있지만, 강엽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진조의 영성이 답을 알려주었다.
‘...성장통인가.’
초음에 이은 새로운 능력.
완전히 개화하려면 더 많은 고수들의 피를 마셔야 한다.
‘슬슬 하나쯤 얻을 때가 됐지.’
돌이켜보면 그동안 고수들의 피를 참 많이 마셨다.
흑접의 상위 서열인 삼호와 오호의 피를 마셨다.
중단전을 개척한 흑접주의 피를 마셨다.
홍가려를 납치하려고 한 백발의 괴인을 죽이고 놈의 피를 포식했다.
흑룡교의 술법진에 들어와서 독야마랑과 적마표, 황충팔객 등 고수들의 피로 배를 채웠다....
이쯤 되면 새로운 능력이 깨어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더 많은, 더 강한 고수의 피가 필요하다.
“당신을 죽이면 채울 수 있을까?”
“무슨 말은 하는 건가?”
“궁금하군. 당신이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지....”
도비사음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내던진 강엽이 손가락에 묻은 피를 혀끝에 댔다.
절정고수의 피는 마약만큼 달콤했지만, 흑접주나 독야마랑의 피를 빨았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뭐, 상관없지. 당신으로 부족하면 저 회춘한 늙은이를 죽이면 되니....”
오싹!
한껏 당긴 입꼬리가 살기를 뱉어내자 동정귀옹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오죽하면 단혼마백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던 전강도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낼 정도였다.
“허어, 개종시킬 중생이 또 있었군.”
단혼마백만 턱을 쓸며 피식하고 웃었다.
예전 버릇대로 수염을 만진 건데, 회춘하면서 수염이 죄다 빠져버린 탓에 매끈한 턱만 만져졌다.
“흑포 아해야, 흑룡교의 유산을 탐내서 온 것이겠지? 본교에 귀의한다면 네가 원하는 걸 주마.”
그 말에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단혼마백을 바라봤다.
동정귀옹이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이 와중에 포교라니 어지간하시구려.”
“교도는 많을수록 좋은 법일세. 물론 내 사람이여야 하겠지만.”
코앞에 전강이 있어 대놓고 몸을 돌리진 못했지만 단혼마백은 강엽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노부는 교로 돌아가는 즉시 팔대교왕의 좌에 도전할 것이다. 노부가 팔대교왕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네겐 교성의 자리를 주마.”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소리였다. 파격적인 언사에 그와 손을 잡은 동정귀옹도 아연해졌다.
“맙소사, 진심이시오? 갓 입교한 놈에게 교성의 자리를?”
“물론 당장은 무리겠지. 하나 노부가 도와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게야. 저 아해의 기질도 우리와 가까우니 강호에 사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한 눈길을 보낸다.
강엽은 강엽대로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살다 살다 혈교에게 영입 제안을 받을 줄이야?
“야, 강엽! 설마 덥석 받진 않을 거지!?”
보다못한 백서희가 빽 소리쳤지만 강엽은 대꾸하지 않았다.
약간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무엇이냐?”
“모산혈조가 아직 혈교에 있나?”
“으음?”
단혼마백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뜻밖인걸.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구나. 모산혈조와 아는 사이였던 게냐?”
“계산해야 할 게 있는 사이지.”
“은원이 있다는 말이군. 흠, 모산혈조라....”
“그래서 있나?”
“하하, 교에 들어오면 알려주마.”
단혼마백도 무턱대고 교의 비밀을 누설할 만큼 허술한 인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강엽의 말 덕분에 그가 모산혈조와 은원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모산혈조가 교에 돌아왔을 적에 다 죽어가던 몸이라고 했었지. 어쩌면 이놈과 관련이 있을지도....’
그도 교내의 일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다.
모산혈조는 불로불사의 비밀을 찾겠다며 교를 비우는 일이 많았기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아니, 오히려 교의 일을 등한시하고 자기 일만 중시했기에 아니꼽게 여겼다. 그만 아니라 팔대교왕의 몇 명도 모산혈조를 경멸했다.
교주가 비호하지 않았다면 진작 숙청당했겠지.
‘이 녀석이 뭔가 알고 있다면 모산혈조가 뭘 하는지 알아낼 수도 있으리라.’
그는 강엽이 고민할 거라 생각했다.
원수를 찾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반겨주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얻을 기회가 아닌가?
“자, 어찌할 테냐. 노부를 따라 입교하....”
“거절하지.”
“면... 뭐라고?”
“거절한다고. 젊어졌는데 귀를 먹었나?”
“이유가 뭐냐?”
단혼마백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사마외도처럼 사특한 기운을 내뿜는 주제에 혈교를 거부하다니?
‘광명마교나 일월신교와 접점이 있는 놈이었나?’
그렇다면 외소림의 아라한과 손을 잡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머리를 쥐어짜도 그것 말고는 답을 낼 수가 없었다.
강엽이 말했다.
“당신 대답으로 알았거든.”
혈교에 들어오면 모산혈조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한 것은, 역설적으로 놈이 살아있다는 말과 진배없다.
“그 늙은이가 뒈졌다면 거래는 성립하지 않아.”
“으음.”
“하나 더. 내가 모산혈조와 은원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래를 제안했다는 건, 당신도 그자를 싫어한다는 뜻일 테지?”
“.......”
“혈교도 사람 사는 동네인데 알력 다툼이 있겠지. 당신은 날 이용해서 모산혈조를 죽이거나 그자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거 아닌가?”
불로불사를 위해 흡혈귀의 비밀을 파헤친 모산혈조였다. 당연히 그 비밀을 남들과 공유할 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혈교주나 알고 있을까.
“모산혈조는 불로불사를 찾겠다면서 천하를 방랑했다고 들었다. 혈교의 일은 뒷전이었을 테니 남들이 봤을 때는 고까웠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 작자가 뭔 짓을 하는지는 몰랐을 테니 답답했을 테고.”
“놀랍군.”
진심이었다. 몇 마디 대화로 저간의 사정을 알아낸 통찰력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점점 네 녀석 정체가 뭔지 궁금해지는구나. 그자가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는 것까지 알다니....”
고개를 내저은 그가 동정귀옹에게 말했다.
“귀옹, 그 아해만은 생포하게. 물어볼 게 많아.”
“쉬울지 모르겠구려. 이 친구도 만만치 않아서 사지 무탈하게 잡는 건 어려울 것 같소만.”
“목숨만 붙어있으면 상관없네.”
“그렇다면야.”
어깨를 으쓱인 동정귀옹이 기수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상관추영!”
강엽이 이 자리에서 가장 비중이 적은 사람의 이름을 부른 것은.
“제길, 잘 될지 모르겠는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상관추영이 양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쥐고, 엄지를 검지 끝에 맞대는 지권인(智拳印)을 맺는다.
‘지(池)! 경(經)! 투(透)! 반(反)!’
진법을 쓰기 위한 수인.
-내가 신호하면 진법을 펼쳐라.
철문을 통과하기 전에 강엽이 보낸 전음이었다.
모두의 이목이 강엽에게 쏠린 틈을 타서 상관추영은 진법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 준비였기에 삼화취정에 오른 단혼마백의 기감으로도 눈치챌 수 없었다.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한 단혼마백이 검결지를 뻗어 상관추영을 겨누었다.
타앙!
하지만 한발 앞선 전강이 손가락에서 발출한 지공을 튕겨냈다.
단혼마백의 미간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외소림의 땡중...!”
“잊었소? 당신의 적은 나요.”
“오냐, 안 그래도 벼르고 있었느니라!”
단혼마백이 손을 뻗자 옥좌 옆에 둔 명아주 지팡이가 절로 날아와서 손에 잡혔다.
격공권과 마찬가지로 초절정의 고수들에게만 허락된다는 허공섭물(虛空攝物)의 비기.
손잡이를 빼내자 은빛의 칼날이 자태를 드러낸다.
지팡이 안에 칼날을 숨겨둔 것이다.
“본교에 강시를 만드는 놈들이 있지. 녀석들에게 네놈을 갖다 주면 좋아할 것 같구나.”
“이번엔 도망치지 못할 것이오.”
전강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역시 두꺼운 근육을 불끈거리면서 상서로운 금광을 뿜었다.
이윽고 그의 일권에 어린 금광이 한껏 응축되면서 대기를 웅웅 진동하자 뒤에 떨어져 있던 백서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강기(罡氣)...!’
격공권, 허공섭물과 마찬가지로 초절정의 영역에 올라야만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지고한 기예.
서로를 노려본 두 초고수가 강기에 휩싸인 검과 주먹을 전광석화처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 * *
“이깟 진법 따위로!”
노성을 발한 동정귀옹이 비호같은 몸놀림으로 발을 날렸다.
상관추영이 발동한 진법이 그와 강엽을 감싸고 있었다. 진법 따위로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강엽의 손목에 어린 태극반의 경파가 발의 각도를 틀었다.
원을 그리듯 움직인 강엽이 배후를 점하면서 호쾌한 일권을 날린다.
투아아아앙!
“이런...!”
격발 순간 허리를 꺾은 덕에 간신히 직격을 모면했다.
하지만 동정귀옹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넉 냥의 힘으로 능히 천 근의 힘을 발하는 상승 기예.
상대방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은 이화접목과 비슷하나, 그 힘을 몇 배로 더해서 온전히 돌려준다는 면에서는 이화접목과 달랐다.
이화접목보다 상승의 경지.
태극반에서 무당 절학의 심상을 엿본 동정귀옹은 자신이 누굴 상대하는 건지 헷갈렸다.
“사마외도 따위가 어찌 구파 도가의 무학을?”
“사량발천근이 꼭 무당만의 전유물은 아니지.”
강엽이 태극반을 창안한 지도 몇 달이 지났다.
그동안 실전에서 몇 번이나 활용하면서 갈고 닦았고, 최근엔 이화접목과는 다른 가능성을 엿본 것이다.
태극반이 전부가 아니었다.
촤아아아악!
자색 섬광이 공간을 질주한다.
동정귀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빠르다!’
깨달았을 땐 이미 면전까지 치달은 상황.
회피가 불가함을 직감한 그는 맞치는 식으로 발을 뻗었다.
일전에 강엽이 흑접주와 싸웠던 방식대로 역습을 노린 것.
필살의 초식이 교차하고,
쩌어엉!
둔중한 충격파가 두 사람을 밀어냈다.
작게 움직이며 반발력을 해소한 동정귀옹이 다시 움직이는 찰나, 강엽의 입술이 둥글게 말렸다.
-휘리리릭!
끼이이이이!
귀신의 휘파람 소리에 동정귀옹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가지가지 하는군!”
강엽의 내공 화후가 깊어지면서 망혼소의 위력 역시 올라갔기에 완전히 무시할 순 없었다.
고수들의 싸움에선 일초식, 아니 반수 차이로 생사가 갈리는 법.
동정귀옹이 경직된 순간 강엽이 반 박자 앞서 검로를 이어나갔다.
뇌령의 섬광이 다시 한번 공간을 찢어발긴다.
“크윽...!”
피하기엔 호흡이 모자랐다.
비스듬히 틀어버린 상반신 위로 자색의 검격이 훑고 지나가면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요혈이 베이진 않았다!’
거죽만 아슬아슬하게 베고 지나간 것이다.
안도하며 반격을 가하려던 그때였다.
‘뭣이?’
강엽은 검을 버리는 게 아닌가?
다리를 넓게 벌리고 하체를 단단히 지탱한다.
검붉은 권기가 주먹을 감쌌다.
그리고....
꾸아아아앙!
“......!”
주요 요혈을 얻어맞은 동정귀옹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와 강엽을 감싼 진법의 천장에 부딪치고 몇 바퀴나 나뒹굴었다.
머리의 방립은 떨어진 지 오래.
“쿠웩! 무슨 놈의 위력이...!”
그는 도비사음과 달랐다.
권각술을 성명절기로 삼은 만큼 호신기를 단단히 둘렀다. 한 겹이 아니라 몇 겹으로. 한데 호신기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간 것이다.
“내가 여기 와서 좀 강해졌거든.”
“뭐라? 커억!”
빠악!
무릎으로 턱주가리를 후려친다.
동정귀옹이 솟구친 사이 암신을 펼쳐서 그의 감각을 희롱한 것.
반백의 머리채를 잡아챈 강엽이 또 다시 안면을 찍어버렸다.
콧잔등이 주저앉고 누런 이빨이 우수수 떨어진다.
얼굴뼈가 으스러지며 안면까지 함몰된 동정귀옹은 축 늘어진 채 미동도 없었다.
조금 전에 말을 내뱉을 때 기습적으로 후려쳤기 때문에 혓바닥까지 잘려나간 상태.
하지만 그때 눈을 번쩍 뜬 동정귀옹이 머리를 꺾으면서 족격으로 바닥을 쓸었다.
풍성한 머리칼이 뜯겨나가며 두피에 피가 맺혔지만 그런 데 신경 쓸 틈새가 없었다.
“큭!”
상당한 공력이 실린 일격에 걷어차인 강엽이 이를 악물었다.
호신기로 막았는데도 발목뼈에 금이 갔다.
맞은편에서 비틀거린 동정귀옹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피해는 그가 더 컸지만 발목을 부쉈으니 움직이지 못할....
“...!?”
“썩어도 준치라더니.”
강엽이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발목은 몇 번의 호흡만으로 깨끗이 아문 상태.
“어, 어더게...!”
혀가 잘리고 이빨이 부러져서 발음이 뭉개졌지만 너무 놀라서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발목 관절을 움직여본 강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보법을 펼쳐 동정귀옹의 앞에 치달았다.
콰직!
목울대를 잡고 뜯어버린다.
충격과 공포로 얼룩진 시신을 붙잡은 강엽이 입술을 핥았다.
‘진법을 쳤으니 보이진 않겠지.’
탐욕에 이끌려 사지에 들어온 노강호는 그렇게 흡혈귀의 한 입 식사거리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