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23화 (123/450)

19화. 혈룡 (7)

강엽이 우뚝 서자 일행의 걸음도 멈추었다.

백서희가 의아해했다.

“왜 그래?”

“....”

강엽은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눈썹 사이를 찌푸리고 있었다.

‘뭔가 일어났다.’

진조의 영성이 속삭인다. 자신을 위협하는 무언가가 나타났다고. 뭔지는 알 수 없으나 술법진과 관련됐음을 알 수 있었다.

‘기분탓이면 좋겠는데....’

어쨌든 계속 갈 수밖에.

그렇게 걷고 있는데 이어진 갈림길에서 피냄새가 풍겨왔다.

희미한 잔향에서도 농밀한 선천지기가 느껴지는 걸로 보면 엄청난 고수였다.

‘점점 짙어지고 있어. 이쪽으로 오는 건가?’

마침 상대도 알아차린 모양.

잠시 느려지는가 싶더니 제 속도를 되찾고 갈림길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강 무사.”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피냄새의 주인은 전강이었다.

강엽의 시선이 걸레짝이 된 앞섶 사이로 흘러나오는 핏줄기로 향하자 전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별거 아니오. 생채기니까.”

“아, 예.”

하지만 강엽이 전강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보다도 코끝을 찌르는 농밀한 향기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이게 삼화취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의 피....’

넘치도록 피를 포식한 만큼 당분간은 피를 마실 필요가 없는데도 군침이 흐를 정도였다.

전강도 이상한 기색을 알아챈 걸까?

“강 무사, 괜찮으시오?”

“...괜찮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강엽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통증 때문인지 자괴감 때문인지 다행히 흡혈 충동은 가라앉았다.

‘정신 차려라, 이 자식아.’

이 와중에 같이 싸워야 할 사람의 피를 탐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좀 피곤해서 멍해졌나 봅니다.”

“정말 괜찮은 것이오?”

“예. 아, 그리고 이쪽은....”

강엽이 백서희를 흘깃거리자 전강이 이채를 띠었다. 이전에 흑접 사태 때 청송객잔에서 만난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그쪽 소저와는 구면이구려.”

“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백서희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전강이 작게 웃었다.

“원래 있는 데서 나오셨다고 들었소만.”

“뭐... 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웬만큼 나이 차이가 나지 않으면 반말을 일삼는 백서희지만 전강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그가 삼화취정의 초고수임을 강엽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끄응, 처음 만났을 때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

전강은 기파를 발하지도 않았는데 항거할 수 없는 존재감이 함부로 굴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에 쓰던 이름을 그대로 부르면 결례가 될 것 같은데 뭐라 부르면 되겠소?”

“백서희가 내 본명이에요.”

“원래 백 소저였구려. 난 전강이오.”

“알고 있어요. 그쪽이 있다는 걸 이 녀석이 알려주기도 했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강엽을 가리키는 백서희였다.

전강이 상관추영을 보았다.

“운가장주와 함께 진입조에 합류했던 분이구려.”

“사, 상추영이오.”

앞서 전강과 단혼마백의 공방을 짧게나마 지켜본 상관추영은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잠시 그를 지켜본 전강이 강엽에게 고개를 돌렸다.

“강 무사가 부탁했던 건 아직 찾지 못했소.”

“알고 있습니다.”

“음?”

“단서를 찾았거든요.”

강엽이 이제껏 알아낸 사실을 설명했다. 전강은 자신이 흑무암쇄진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숨길 게 없었다.

단, 백서희의 비밀은 말해서 좋을 게 없기에 우연히 휘말렸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이걸 얼마나 믿을지 모르겠군.’

자신 같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강은 궁금하지 않은지, 아니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지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단혼마백도 비고가 있다는 식으로 말했소. 그렇군. 옥좌의 술법진을 풀면 단서가 나오겠구려.”

“확실한 건 아닙니다.”

“지금은 그것밖에 답이 없지 않소? 어차피 이 사태를 끝내려면 술법진을 풀어야 하고 말이오.”

“그건 그렇지요.”

뒷일은 그때 가서의 일.

암묵적인 합의를 본 일행은 쭉 이어진 길로 향했다.

* * *

“적이다!”

일행을 본 붉은 무복의 혈교도들이 호각을 불었다.

삐이익-!

새된 소리와 함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혈령교위들과 평교도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격전을 치른 만큼 숫자는 상당히 줄어 있었지만 서른 명은 훌쩍 넘겼다.

한쪽 팔에 완장을 찬 검은 장삼의 혈사교령이 달려오는 강엽 일행을 보고 섬뜩한 살광을 내뿜었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이교의 죄인들!”

강엽과 백서희의 인상착의는 잘 알고 있었다. 잠시나마 단혼마백을 몰아붙였던 전강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고 말이다.

“막아라!”

“와아아아아!”

혈사교령을 포함한 혈교도들이 노도처럼 몰려오자 백서희가 황당해했다.

“저 새끼들은 흩어지지 않고 용케 모였네.”

“술법진을 장악한 것 같은데.”

“뭐어?”

“그것 말곤 답이 없어.”

사실 그래도 의문은 남아 있었다.

‘술법진엔 흑룡교주의 의지가 남아있을 텐데... 어떻게 한 거지?’

혈교의 술사들도 피를 토하며 쓰러지지 않았던가?

백번 양보해서 술법진을 장악했어도 흩어진 놈들이 어딨는지 알고 규합한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은 눈앞의 싸움에 집중했다.

투아아앙!

한천최심장의 장력을 격발, 선두의 교도 셋을 날려버린다.

종아리에 힘을 준 강엽이 혈교도들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교의 죄인 따위가 어딜!”

재빨리 몸을 날린 혈사교령이 참격을 날리려고 할 때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채찍처럼 후려쳤다.

“크헉!”

강엽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전강이 주먹을 내민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십 장이 넘는 거리인데 여기까지 온다고?’

더욱 놀라운 것은 경파가 도달하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백서희가 경이감에 탄성을 흘렸다.

“격공권(隔空拳)...!”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른 초고수들에게만 허락된 비기.

의념으로 공간을 초월, 응축한 경력을 한 지점에서 터뜨리기 때문에 기감이 뛰어난 고수들도 감지하기 어려웠다.

“쿨럭, 이런 빌어먹을 놈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진 교령이 이를 갈았다.

그나마 호신기를 둘렀기에 즉사는 면했지만....

촤아아악!

“컥!”

태세를 정비하기도 전에 섬전같은 검격이 목을 훑고 지나갔다.

강엽은 허물어진 교령을 뒤로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우두머리가 죽었는데도 혈교도들은 사기가 떨어지기는커녕 제 목숨을 사리지 않고 악귀처럼 미쳐 날뛰고 있었다.

마치 단체로 약에 취해 발광하는 듯한 광경.

하지만 일행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촤악! 서걱!

백서희도 쌍검을 종횡무진 휘두르며 혈교도들을 격살하고 있었다.

신들린 듯 춤추는 쌍검술은 검의 궤적과 속도가 전부 다르다.

과거 강엽도 그녀와 싸웠을 때 곤욕을 치렀던 만큼 평교도들의 무공으로는 대응하지 못했다.

“더러운 혈귀놈들이 감히...!”

상관추영 역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결국 혈교도들이 전멸하기까지는 일 각도 걸리지 않았다.

“쳇, 같잖은 놈들이 힘쓰게 하네.”

뺨에 묻은 피를 닦은 백서희가 툴툴거렸다.

빠르게 전멸시키긴 했지만 어쨌든 놈들을 치우느라 상당한 공력을 소모한 것이다.

“근데 그 단혼마백인지 뭔지 하는 난쟁이 똥자루 영감탱이는 어디 있는 거야? 지 부하들 뒈져나가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네?”

“저쪽에 있는 것 같소.”

전강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

삼십여 장 거리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비늘 하나하나가 선명히 새겨진 용이 있었다. 통로 양쪽에서 타오르는 횃불 덕분에 멀리서도 육안으로 구별되는 철문.

그 철문이 일행을 맞이하듯 열리는 것과 동시에, 한 줄기 메아리가 허공을 울렸다.

[어서 오라.]

가장 약한 상관추영이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주춤했다.

강엽이 툭 내뱉었다.

“단혼마백이군.”

“엥? 목소리가 다른데?”

백서희가 놀라 물었다.

“저 안에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른 자가 있어. 그 외에 서너 명이 더 있는 것 같은데....”

[놀랍구나. 어떻게 안 것이냐?]

단혼마백이 알 리가 만무했다. 철문이 열리자마자 강엽이 초음의 파동을 내뿜어서 안쪽을 샅샅이 훑었다는 것을.

강엽은 대답하는 대신 경직된 얼굴로 전강을 돌아봤다.

“전강.”

“말씀하시오.”

“확실하진 않지만, 저 안에 야차마곤과 하북팽가의 고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굵직한 눈썹이 꿈틀거린다.

전강은 강엽이 신묘한 재주를 부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허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형께선 무사하시오?”

“....”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는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다는 듯이 전강이 한숨을 쉬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단혼마백이 기꺼워하며 웃었다.

[호오, 기어이 사지로 들어오는가? 가상한 용기다. 칭찬해주마.]

“부하들을 사지로 내던진 자가 하는 칭찬이라. 평생 들어본 칭찬 중 가장 무가치하게 느껴지오만.”

[노부가 기력을 회복할 동안 그 앞을 지키는 것이 그 아해들의 임무였다. 녀석들을 잃은 것은 아쉽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네놈들의 목숨을 거두는 걸로 녀석들의 넋을 위로해야겠구나.]

“당신 목소리를 들으니 내게 맞은 곳이 아프진 않은 모양이구려.”

[아팠지. 그 잘난 백보신권(百步神拳)으로 노부의 호신강기를 부수지 않았느냐. 격공권에 내가중수의 묘리까지 섞어서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노부가 기연을 얻지 않았다면 삼도천을 건넜을 게야.]

전강은 입맛이 씁쓸해졌다.

첫 싸움에선 승기를 잡았지만 이번에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단혼마백 스스로도 기연을 얻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때 옆에서 강엽이 걸어왔다.

“강 무사.”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일을 붙잡고 후회해봤자 소용없었다.

강엽이 뒤를 돌아봤다.

“백서희.”

“알아. 싸울 수밖에 없잖아?”

이건 그녀의 싸움이기도 했다.

흑룡교주가 그녀를 핏줄이라 칭하기는 했지만, 아직 그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흑룡교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핏줄을 물려준 사람은 아마....

‘젠장, 그럴 리가 없잖아.’

머릿속에 떠오른 가능성을 부정하며 애써 쾌활하게 웃었다.

“가자! 저 개자식 엉덩이를 걷어차줘야지.”

* * *

철문을 통과하니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옥좌에 앉은 젊은 청년과 신하처럼 좌우에 늘어선 두 명의 남녀.

목울대를 꿀꺽 움직인 상관추영이 설명했다.

“...동정귀옹과 도비사음이오.”

강엽과 백서희도 여기 와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문제는 옥좌에 앉은 청년.

“젊어졌군.”

“그렇다.”

다리를 꼰 채 비스듬히 턱을 괸 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얇은 미소를 머금었다.

강엽은 옥좌 아래에서 간헐적으로 경련하고 있는 두 피떡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눈에 봐도 기식이 엄엄했다.

전강도 두 사람을 알아봤다.

“사형!”

애병인 철곤은 두 동강이 났고, 본인은 사지가 박살난 채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피투성이가 된 야차마곤이 힘겹게 눈을 떴다.

“사, 사제, 미안하네....”

“말씀을 아끼셔야 합니다, 사형.”

들숨을 내쉴 때마다 기력이 흩어질 터. 한시라도 빨리 싸움을 끝내야만 두 사람을 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긴다.

“하하, 사형제 간의 우애가 눈물겹구나. 하지만 걱정 말거라. 너흴 죽일 생각은 없다. 너흴 생포하면 교주님께서도 흡족해하시겠지.”

단혼마백이 눈짓을 보내자 동정귀옹과 도비사음이 두 사람의 발을 들고 짐짝처럼 끌고 간다.

몰상식한 취급에 전강이 노호성을 질렀다.

“멈추...!”

“한눈 팔 때가 아닐 텐데.”

후욱-!

단혼마백의 기파에 휘말린 먼지가 위로 솟구쳤다.

짧은 호흡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공력 깊이를 가늠한 전강은 미간을 좁혔지만,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단혼마백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대가를 치를 것이오.”

“누가 대가를 치를지는 두고 보자꾸나.”

그렇게 삼화취정의 두 초고수가 서로를 견제할 때.

불현듯 고개를 홱 돌린 단혼마백이 동정귀옹과 도비사음 쪽을 향해 경호성을 내뱉었다.

“조심해라!”

“...?”

도비사음보다는 동정귀옹의 반응이 한 박자 빨랐다.

돌연 흠칫하더니 각법을 펼쳐 허공의 한 지점을 관통한 것.

투아아아앙!

연이어 울려 퍼지는 파공성.

무언가 걸리는 감각을 느끼지 못한 동정귀옹은 즉시 두 번째 연격을 준비했지만,

“꺄악!”

곧 등 뒤에서 들린 비명에 황망해졌다.

“도비...!”

흑색장포를 걸친 사내의 관수에 심장이 꿰뚫린 도비사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암신으로 모두를 속인 강엽이 무심하게 뇌까렸다.

“방심하면 죽어도 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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