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20화 (120/450)
  • 19화. 혈룡 (4)

    후개는 현실감이 흐려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슨 귀신놀음도 아니고....’

    악명높은 사파의 고수들과 마교의 종자들이 단 두 사람의 손에 박살나고 있었으니까!

    “이 연놈들이 어딨, 크악!”

    “물러서지 마라! 혈신께서 우릴 굽어살피신...!”

    푸화학!

    싸움을 독전하던 혈령교위의 턱뼈가 뜯겨나간다.

    한순간 가해진 금나수에 목뼈까지 부러진 바람에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절명했다.

    그러나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정작 혈령교위를 죽인 강엽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은 귀신이 무차별적으로 학살극을 벌이는 것만 같은 참상.

    강엽은 그냥 싸우는 게 아니라 석상이라는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상하좌우를 넘나들고 있었다.

    박쥐처럼 매달린 채 어둠 속에 숨어있다 허점을 드러낸 적을 기습적으로 낚아챈다.

    “으아악!”

    위로 솟구친 교도는 잠시 후 심장이 뚫린 채 떨어졌다.

    “뿔뿔이 흩어지지 마라!”

    “한데 모여! 등을 맞대면서 형제들의 뒤를 지켜라!”

    자색 섬광이 어둠을 누비고 피바람이 불어닥친다.

    미지의 위협에 위기감을 느낀 혈교도들이 서로 등을 맞대면서 전방을 노려봤다.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심장을 옥죄였다.

    강엽은 놈들의 머리 위로 무게중심을 잔뜩 낮춘 채 떨어졌다.

    쿠우웅!

    천근추의 묘용을 싣은 진각이 대지를 뒤흔든다.

    튕겨나간 혈교도들은 곧바로 출수한 경파에 휘말리거나 석상에 머리를 박고 목숨을 잃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혈교도가 시뻘게진 눈으로 후개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백도의 위선자!”

    “오냐, 들어와라! 이 자식아!”

    퍼뜩 정신을 차린 후개가 서둘러 공력을 끌어올렸다.

    가뭄이 진 땅처럼 메마른 단전이 고통을 호소해도 이를 악물고 참으며 기수식을 취한다.

    하지만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도 혈교도는 뒤쪽에서 날아온 파편에 무릎을 맞고 발라당 넘어졌다.

    직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에 끌려갔고.

    “아아악!”

    콰직! 쿠드드득!

    무언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이어진 뒤엔 영원히 잠잠해졌다.

    “뭐, 뭐야? 죽은 거야?”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개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백서희가 상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투확!

    “끄으윽!”

    난상으로 휘두른 쌍검.

    피투성이가 된 황충팔객의 일인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무릎을 꿇었다.

    주인의 피가 묻은 칼이 둔한 금속음을 내며 떨어졌다.

    “망할 살수년 같으니....”

    그 말을 끝으로 고꾸라진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후개가 다시 한번 아연해졌다.

    “황충팔객을 저렇게 죽이다니.”

    절반이나 죽었으니 황충팔객은 끝장난 셈이었다.

    설령 그들이 전부 모였어도 후개는 결과가 달라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응?”

    그때 백서희가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는 후개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홱 돌렸다.

    눈호강이 되는 절세가인의 용모에도 후개는 감탄 대신 오한을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백서희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더니 입술 꿰매는 시늉을 하고는, 목을 슥 그어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드는 게 아닌가?

    “...저, 저거! 내가 어디 가서 소문내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아니오?”

    “...그런 것 같구려.”

    “근데 엄지는 왜 치켜든 거지? 형장은 짐작가는 거 없으시오?”

    “그, 글쎄... 대충 믿는다는 뜻이 아닐까 싶은데....”

    상관추영은 왜 흑룡교도인 자신이 개방 후개와 왜 이런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후개는 운가장주와 함께 합류한 상관추영을 기억했기에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던 것이지만.

    “험험, 소개가 늦었구만. 개방의 후개요.”

    “...상추영이오.”

    “알고 있소. 운가장주와 함께 있던 분 아니오? 마을에 살았다가 재수 없이 휘말렸다고 들었는데.”

    “뭐, 그렇게 됐소.”

    “근데 저치들은 정체가 뭐요?”

    “아는 것 아니었소?”

    “저 친구는 안면은 있는데 누군지 모르오. 여인은 생판 초면이고.”

    상관추영을 통해 두 사람에 대해 캐볼 셈.

    하지만 상관추영도 고단수였다.

    “그럼 내가 해줄 말은 더 없겠소. 나도 여기서 처음 만난 사이니까.”

    “이름도 모르오?”

    “...저 시커먼 사내새끼는 강엽이라 하고, 저분 소저는 백서희라는 이름을 갖고 계시오.”

    “강엽, 백서희....”

    이름을 곱씹었지만 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다.

    ‘뭔가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백서희의 이름은 처음 듣지만 강엽은 들어본 느낌이 났다.

    문제는 머리를 쥐어짜도 도통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어디서 들어봤더라?’

    기실 강엽의 이름은 총타에서 개방주와 함께 사천 무림의 정세를 보고받았을 때 처음 접했다.

    하지만 이름 대신 별호로 불린 데다 본명은 보고서에서나 짧게 언급한 수준이기에 바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이름만 듣고 기억하기엔 귀에 들려오는 무림 소식이 너무 많았다.

    * * *

    “구해주셔서 고맙소, 강 형.”

    “강 형?”

    강엽이 퍽 해괴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짓자 후개가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개방의 후개쯤 된다면 어딜 가도 꿀리지 않는 신분이지만 지금은 강엽이 압도적인 갑이었다.

    “실은 저기 있는 상 소협께서 말씀해주셨소.”

    “그래?”

    시선을 받은 상관추영이 흠칫 놀랐지만 강엽은 그러려니 했다.

    ‘보아하니 별호까진 모르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강호 무림 전역에 명성이 퍼진 절세고수나 대방파의 제자가 아니라면 이름만 듣고 별호를 알기는 어려웠다.

    명색이 개방 후개가 사천성에서 작은 명성을 얻은 낭인의 별호를 들어봤을 리도 없고.

    사실은 좀 달랐지만 강엽은 물고 늘어지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고 혼자 쫓긴 거냐?”

    “어휴, 말도 마시오. 그 망할 기관진식 때문에 다 뿔뿔이 흩어졌소. 어떻게 돼먹은 건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던데.”

    한껏 투덜거린 후개가 강엽의 눈치를 봤다.

    “그,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미안하긴 한데... 나도 같이 가면 안 되겠소?”

    “음?”

    “사실 내상이 다 낫지 않아서... 하핫, 그놈의 내상만 아니었어도 황충팔객을 혼쭐 내주는 건데.”

    기실 후개의 안색은 강엽을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땀에 절은 건 물론이고 흰자위에 핏발까지 섰다.

    억지로 무리한 탓에 내상이 도진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밖으로 나가는 것 아니오?”

    “더 깊숙이 들어갈 건데.”

    “...어, 어째서요?”

    살집에 파묻힌 후개의 눈에 의혹이 깃들었다.

    강엽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후개가 적은 아닐지라도 옥좌에 대한 진실을 알려줄 수는 없으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골랐다.

    “안갯속에 들어왔을 때와 같다.”

    그때 강엽은 안갯속 깊숙이 들어가면 생문을 찾기 전까지는 나가지 못할 거라 예상했다.

    강엽과 헤어진 뒤 술법진을 나가려고 했던 후개는 처음 왔던 장소로 돌아오는 경험을 했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개미지옥...!”

    “한번 발을 들이밀면 생문을 찾기 전까진 못 나갈 거다. 힘으로 뚫는 건 불가능해.”

    “오히려 활로는 안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그것 말곤 답이 없으니까.”

    하지만 안쪽으로 갈수록 위험해질 공산이 컸다.

    필시 혈교는 옥좌를 찾아서 온 사방을 들쑤시고 다닐 터.

    “재수 없으면 교성을 맞닥뜨릴 수도 있겠지.”

    “...최악의 경우엔 교성이 혼자가 아닐 수도 있겠구려. 강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소.”

    “그 몸으로 싸울 수 있나?”

    “그건....”

    할 말이 궁해진 후개였다. 강엽의 말마따나 전력으로 싸우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심령을 좀먹는 술법진에 저항하느라 정신적으로도 궁지였다.

    “우리도 오늘은 쉴 거니까, 옆에 있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따라오는 건 안 돼.”

    강엽도 거듭된 격전으로 진력이 빠진 상태였다.

    돌이켜 보면 아침부터 백서희와 만나고, 교령과 싸우고, 비밀통로에 잠입하고, 독야마령 같은 고절한 고수와 드잡이질을 벌인 것이다.

    그도 모자라 상관추영과 황충팔객을 연이어 격파했으니 흡혈로 원기를 보충했어도 지칠 수밖에.

    ‘이 상태로 더 나아가는 건 무리다.’

    후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행 모두 지쳤기 때문에 휴식이 간절했다. 몇 시진만이라도 운기하며 심신을 추스려야 했다.

    “정 우릴 따라오겠다면 이유를 생각해봐라.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 말이야.”

    냉정히 말하면 후개가 따라오는 것은 민폐였다.

    후개 역시 그 점을 알고 있기에 무작정 고집부리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 알겠소....”

    * * *

    일행은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상관추영이 외부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진법을 치겠다고 했지만 강엽이 거절했다.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놈을 믿지 않기 때문.

    지금이야 고분고분해도 기회만 보이면 뒤통수를 때릴 놈이었다.

    이미 백서희에게는 놈이 수상쩍은 짓을 하면 목을 치라고 말했다.

    “이제 내 차례야.”

    “그래. 고생해라.”

    백서희와 교대한 강엽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에 들어갔다.

    독야마랑과 적마표, 그리고 일행에게 시체를 멀리 치운다는 구실로 몰래 피를 마신 황충팔객까지.

    흑접주의 피를 마셨을 때 이상으로 가공할 기운이 전신 경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걸 전부 소화하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큭큭큭....

    강엽은 진조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기분에 미간을 구겼다.

    생각해보면 진조 때문에 반 강제로 흡혈귀가 된 자신이나 태생의 비밀 탓에 흑룡교주가 될 위기에 처한 백서희나 비슷한 신세였다.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

    심상에 쌓인 울화를 애써 밀어내며 내면을 관조한다.

    하단전의 축기량은 이 갑자를 훌쩍 넘겨 포화에 이른 지 오래.

    물론 흡혈을 하면서 조금씩 늘기는 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가파르게 불어나진 않았다.

    일 년의 축기량을 더하려면 예전보다 족히 열 배는 많은 선천지기를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하단전을 계속 키우는 건 상승의 경지에 오르는 데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럼 중단전을 키울 수밖에.’

    포화에 이른 하단전과 달리 중단전은 이제 막 길을 낸 미답지였다.

    전신 경맥을 노니는 선천지기가 중단전으로 흘러들어가면서 덩치를 불려간다.

    ‘중단전은 하단전과 다르다.’

    하단전이 진기를 쌓는 곳간이라면, 중단전은 심장과 연대하여 진기를 폭발적으로 짜내는 기관.

    중단전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 그게 얼마나 자신과 잘 맞는지에 따라 공력 운용이 달라진다.

    아미파의 혜정 사태는 부처가 앉는다는 연화대(蓮花臺)를 닮았고, 흑접주는 악귀의 얼굴이 달린 먹구름의 형상이었다.

    야차마곤이나 팽관후, 몇 시진 전에 싸운 독야마랑의 중단전도 나름대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삼화취정.’

    전강과 단혼마백.

    정기신이 합일되어 융통무애하는 경지에 이른 그들의 내면은 거대한 빛의 기둥을 보는 듯했다.

    너무나 크고 아득하여 마치 자신이 티끝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된 듯한 감각.

    그들과 같은 선상에 오르려면 일단 중단전을 자신의 심상으로 빚어야 하리라.

    ‘나만의 심상이라....’

    온전히 자신에게 맞는 심상.

    중단전으로 선천지기를 끌어모으면서도 강엽은 어떤 심상을 그려넣을지 쉬이 결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고민도 깊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