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안개 (4)
‘저 녀석은 알아서 할 거야.’
백서희는 강엽을 걱정하지 않았다.
상대가 혈사교령이라 한들 쉽게 당하리란 생각이 들지 않거니와, 강엽에겐 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기이한 능력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남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 제 앞가림부터 해야 할 때였다.
차아악!
“아악!”
골목길 사이를 가로지른 은혼사가 붉은 무복을 입은 교도의 발목을 썩둑 절단한다.
그 앞에 쳐둔 또 다른 은혼사가 나자빠지는 교도의 목까지 덤으로 잘라주자 뒤따라오던 교도들이 진저리를 쳤다.
“젠장, 이 빌어먹을 안개만 아니면...!”
안 그래도 발견하기 힘들 만큼 가느다란 실인데 안개가 시야를 가리는 통에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같은 수에 또 당하느냐!”
뒤에서 들린 호통에 교도들이 움찔했다.
짐짓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낸 혈령교위가 준엄하게 꾸짖었다.
“무턱대고 쫓지 마라. 네놈들의 무공으로 감당할 상대가 아니야. 교령께서 오실 때까지 붙잡아두는 게 우리 역할이란 말이다.”
혈사교령이 패할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단언.
혈령교위가 주변을 살펴보며 안색을 굳혔다.
“문제는 이 안개다. 방심하면 우리 역시 저놈들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하루 종일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혈교도들이 보기에도 꽤나 기괴했다.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시험 삼아 건드려도 보고 죽여도 봤지만, 그럼에도 이지를 잃은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정신을 보호하는 술법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면 저들과 같은 꼴이 되었겠지.
똑같이 마(魔)에 근원을 두었으나 흑룡교의 술법진은 혈교에 한없이 적대적이었다.
“호심(護心)의 술법도 한계가 있음이야. 너무 멀어지면 술법이 풀린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렇기에 너무 먼 곳까지 쫓을 순 없다.
하나 그렇게 말하는 혈령교위의 얼굴 역시도 불편한 심기로 가득했다.
‘반드시 잡아야 하거늘.’
백서희와 싸운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교성의 명령으로 그녀를 잡기 위해 이 일대를 이잡듯이 뒤지면서 드잡이질을 벌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세 명의 교위를 포함한 열다섯 명의 죽음뿐.
일대 지리가 복잡한 데다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번번이 놓치고 있었다.
“어쨌든 경거망동하지 말고...!”
혈령교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퍼퍼퍼퍼퍽!
안개를 뚫고 나온 수리검들이 그와 교도들을 덮쳤기 때문.
혈령교위는 기민하게 반응하여 피했지만 교도들은 그렇지 못했다. 하필이면 등진 위치에서 날아온지라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끄윽! 꺽!”
목을 부여잡은 교도가 꺽꺽대다 쓰러지는 모습에 혈령교위가 쌍심지를 돋웠다.
“이교의 죄인 따위가...!”
다행히 이성을 잃진 않았다.
추격했던 교도들의 몸통이 잘려나가는 참상을 몇 번이나 봤던가?
살아남은 교도들과 등을 맞대며 정면을 노려봤다.
안갯속에 숨은 상대가 언제 기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한 줄기 땀이 턱선을 타고 땅에 뚝 떨어진다.
그렇게 여삼추 같은 시간이 지났을 때.
“이 약아빠진 계집이....”
혈령교위의 낯짝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감쪽같이 속았다.’
심리적인 함정이었다.
도망치는 척하면서 암기로 기습하고, 그들이 경계하는 틈을 타서 이번엔 진짜로 도망친 것.
화풀이로 전각의 벽돌을 쾅 차버린 교위가 이를 빠득 갈며 외쳤다.
“따라와라! 다른 형제들과 합류한다!”
하지만 교도들을 이끌고 간 혈령교위가 들은 것은 교령이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 * *
백서희는 무영환살공의 은신술로 스스로를 숨겼다.
안 그래도 안개가 시야를 가리는데 존재감까지 희미해지자 혈교도들은 그녀를 찾지 못했다.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도 엉뚱한 곳을 뒤지고 다닌다.
그렇게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온 그녀는 골목길 안쪽의 문 앞에 잠시 멈춰서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때.
“거기가 은신처냐?”
“...!”
불현듯 들린 목소리.
강엽이 암신을 풀고 나오자 그녀는 아미를 와락 찌푸렸다.
“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기척 좀 내고 다녀!”
“방금까지 은신술 쓴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난 어떻게 찾은 거야?”
“감으로.”
초음으로 일대를 뒤지던 와중에 백서희를 발견하고 곧장 따라붙은 것이다.
백서희가 은신술을 펼쳤어도 그 자리에 존재하는 이상 초음을 피할 순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백서희는 강엽이 또 요상한 재주를 부렸겠거니 생각하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일단은 들어와. 미적대다가 혈귀 새끼들한테 들키면 골치 아파져.”
강엽이 얼른 몸을 들이밀자 그녀는 바깥 동정을 살피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주변을 둘러본 강엽은 바닥에 깔린 먼지에 남은 족적을 찾고 이채를 띠었다.
“여기에 온 적 있었군.”
“응.”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고.”
바닥에 남은 족적이 백서희의 것과 달랐다.
백서희는 그걸 단박에 알아차린 눈썰미에 놀라면서도 평정심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용케 눈치챘네?”
서가에서 책 몇 권을 누르자 톱니가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감춰주는 기관진식.
앞장서는 백서희를 따라 들어간 강엽이 뒤를 힐끔거렸다.
‘다시 닫히는 건가?’
두 사람이 통과한 직후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 빛 한 점 새어들어오지 않았지만 완전히 암흑 천지로 변하지는 않았다. 천장 위의 야명주가 은은한 빛을 뿌려서 시야를 트여준 것이다.
“혈교놈들이 눈치채지 않을까?”
“싹싹 뒤지면 당연히 알겠지.”
전각들의 수가 많아도 혈교가 작정하고 뒤지면 강엽이 그랬듯 바닥에 남은 족적을 통해 뭔가 알아낼지도 모른다.
백서희는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크게 걱정하진 않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그놈들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어. 윗대가리 놈들은 술법진에 집중하고 있으니 인력을 많이 빼지는 못할 거야.”
“흑룡교의 술법진 말이군.”
“...뭐, 그렇지.”
“아깐 그놈들이 끼어들어서 말을 못했었지.”
“....”
무거운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비록 혈교 때문에 협력 비스무리한 짓을 하긴 했지만 그전까진 서로를 경계하지 않았던가.
특히 강엽은 백서희가 하는 짓을 볼수록 의심이 깊어졌다.
‘이런 비밀통로는 또 어떻게 알고?’
처음 온 사람이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백서희가 입맛을 쩝 다셨다.
“사실 나도 내가 왜 여기 왔는지 몰라.”
강엽은 어이가 없어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썅, 진짜 그런 걸 어쩌라고. 정신 차리고 보니 여기였단 말이야.”
어미의 원한을 갚은 뒤로 그녀는 다른 데로 가지 않고 쭉 성도에 눌러 살았다.
성도가 좋아서는 아니었다. 단지 머나먼 동쪽까지 가서 새출발을 하는 게 귀찮았을 뿐.
어차피 금정표국에서 받은 돈도 넉넉하겠다, 세월아 네월아 백수짓을 하던 중이었다.
그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목소리가 들렸어.”
과연 그걸 목소리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람의 육성보다는 마치 심마(心魔)가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뭔지는 몰라도 그걸 듣고 정신이 몽롱해졌는데....”
이유는 몰라도 목소리가 향하는 곳으로 끌려갔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술법진의 중심부에 들어와 있었다.
“나가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일직선으로 가도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오는 거야.”
마치 미로에 빠진 것처럼.
그게 몇 번이나 반복되자 하는 수 없이 탈출을 포기하고 버려진 농가를 찾아갔는데....
“거기서 사람들을 발견했어.”
이 지옥에서 간신히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무림인들이었다.
주민들이 비운 집에서 식량을 축냈던 그들은 하루 대부분을 운기조식에 의존해서 술법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세 명밖에 안 됐지만.”
“수준은?”
“그럭저럭. 하루 종일 운기조식을 해서 간신히 버티는 수준이니 말해 뭐하겠어?”
“혹시 운가장주인가?”
“어?”
백서희가 어떻게 아느냐는 듯이 놀란 토끼눈을 떴다.
강엽이 쓴웃음을 지었다.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걸 들었지. 자식들이 안개에 삼켜져서 발을 동동 굴렀다고 말이야. 혹시나 하고 찍어본 건데.”
“아... 그랬구나. 그 사람도 그렇게 말했지. 안타깝게도 자식들을 찾진 못했지만.”
운가장주의 자식들은 귀양에 들렀다가 가문에 돌아가는 길에 술법진에 휘말렸다.
그리고 운가장주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무림인들이 미적대자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가문의 무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러나 결과는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자식들은 찾지 못했고, 가문의 무사들은 술법에 잠식되어 이지를 잃었으며, 본인은 하루 종일 운기조식을 하지 않으면 버티기도 힘든 신세로 전락했다.
“그 와중에 혈교가 쳐들어와서 한 명이 잡혔어. 우리도 잡으려고 하더라. 우리가 방해가 될 거라고 여겼나 봐.”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남은 두 사람과 함께 안쪽으로 도망쳤다.
비밀통로를 찾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날 여기로 부른 목소리가 여기로 가면 살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어. 일단 다른 방법도 없어서 미친 척하고 그 말대로 했는데....”
“심마처럼 느껴진다고 했었지. 지금도 들리나?”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설명하기 복잡한 듯 곤혹스러운 얼굴로 뺨을 긁적인다.
“이젠 하나만 말하고 있어.”
“뭐라고?”
“옥좌에 앉으래.”
“흠....”
그러고 보니 재회했을 당시에도 옥좌라는 게 있다고 말했었지.
백서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에 앉으면 이 사태가 끝날 거라는 거야.”
“그럼 왜 안 앉았지?”
혈교가 들어온 것은 그녀가 술법진에 들어오고 나서도 시간이 지난 뒤였으니 옥좌에 앉을 여유는 있었을 것이다.
“좀 그렇잖아.”
“...?”
“여길 찾았을 때야 다른 수가 없었으니 따른 거지. 아닌 말로 이 목소리가 뭔지 알고 순순히 따라? 너 같으면 그럴래?”
“안 그러겠지.”
강엽이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술법진에 들어온 것 자체가 그 심마인지 모를 목소리 때문인데 따를 리가 있겠는가?
“잘 모르긴 해도 그 목소리는 술법이 아닌가 싶은데.”
술법이 발동하는 원리는 모르겠지만, 백서희가 흑룡교주의 혈손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으리라.
왜 흑접주가 살아있을 때 발동되지 않고, 이제 와서 발동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기장엔 흑룡교가 위기에 몰렸을 때를 대비한 장소라고 적혀 있었다.’
흑접주도 그 이상은 알지 못했지만, 강엽은 작금의 상황에서 몇 가지 단서를 거머쥐었다.
흑룡교가 멸문하고 나서도 수십 년간 숨겨져 있던 전각군이 지금에서야 드러났으며,
마치 집단이 거주할 것을 전제하고 전각군을 쓸데없이 크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안개를 사방으로 퍼뜨려서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백서희가 따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명줄이 붙어있을 뿐이다.’
만약 그녀가 옥좌에 앉았다면 술법의 제물로 전락해서 목숨을 잃었으리라.
그 순간 강엽은 일전에 흑접주가 펼친 암룡승천술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것 역시 흑룡교주의 혈손을 위해 만들어진 술법이었다.
이 술법진은 그보다 더욱 거대하다. 현 하나를 집어삼킨 걸로 만족하지 않고 사방으로 퍼지려고 하고 있었다.
‘...설마 마지막 혈손을 새로운 흑룡교주를 만들려는 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수백 년이 지나도 반드시 흑룡교를 부활시키겠다는 광기 어린 집념.
어쩌면 흑룡교주가 멸문을 예견하고 안배를 남겨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