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안개 (3)
설마 여기서 만날 줄 몰랐기 때문일까.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리던 백서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나부꼈지만, 두 사람 모두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상대를 향해 눈빛으로 묻는다.
왜 여기에 있는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대답해.”
먼저 입을 뗀 건 강엽이었다.
“여긴 왜 온 거냐?”
“칼침 날린 건 미안한데 말이 좀 그렇네?”
백서희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막말로 그렇잖아. 내가 네 부하야?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야 해?”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나도 장난 아니야.”
백서희 역시 진심이었다.
“오랜만에 보자마자 왜 사람을 죄인 취급하냐고. 지금 나 심문하는 거잖아.”
“그래.”
“뭐?”
눈꼬리가 앙칼지게 올라갔지만 강엽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 흑접 출신의 생존자가 있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엥? 흐, 흑룡교?”
“발뺌하는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야! 난 진짜 몰랐다고!”
“그럼 여긴 왜 온 건데?”
근처를 지나다 재수없이 휘말린 게 아닌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백번 양보해서 우연히 휘말렸다고 해도 그녀의 무공이라면 술법에 잠식당하지 않고 탈출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마주친 것은 일부러 중심부에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흑접주의 딸이기도 하고.’
흑접주와 한 자릿수의 살수들이 궤멸했으니 백서희야말로 흑룡교주의 마지막 혈손이었다.
흑접주의 일기에 적힌 대로라면 백서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했지만....
“흑접에서 뭔가 안 건가?”
“알긴 뭘 알아?”
백서희가 콧잔등을 구겼다. 모르는 척 잡아떼는 표정은 아니었다.
“실은....”
바로 그때 강엽은 기감을 자극하는 기척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백서희의 안색도 급변했다.
파파파파파팟!
두 사람이 서로 반대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수십 개의 쇠붙이들이 그 자리를 수놓았다.
“고슴도치가 될 뻔했군. 괜찮나?”
“하, 이제 와서 걱정해주는 척?”
“그게 아니라... 아니, 됐다.”
강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야. 왜 말하다 말고 지랄인데.”
“일단 저놈들부터 치우자고.”
각종 병장기로 무장한 혈포와 흑포 무인들이 안갯속에서 살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계집. 네가 백날 재롱을 부려도 혈신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가련한 중생에 불과하다. 언제까지 우릴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백서희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풋, 웃기셔. 누가 사냥당하는 처지인지 모르나 봐? 내가 사냥꾼이고 너흰 사냥감이거든?”
“보란 듯이 본교의 형제들을 죽여 우릴 불렀지.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해볼 수 있으면 해봐.”
시원하게 씩 웃으며 도발한 그녀가 수중의 쌍검을 부딪쳐서 맑은 금속음을 냈다.
“이젠 도망치지도 않는구나. 조력자를 믿는 건가?”
뱀처럼 사이한 눈길이 강엽을 훑고 지나간다.
강엽은 무시하고 중얼거렸다.
“쉰 명쯤 되는군. 혈령교위와 평교도밖에 없고. 이게 전부는 아닐 텐데. 두령은 어딨나?”
“옥좌... 그러니까 중심부에 있어.”
대답은 백서희의 입에서 나왔다.
“옥좌?”
“나중에 설명해줄게. 네 말대로 저놈들부터 치우고 나서 말이야.”
강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처럼 많지만 방해꾼들부터 치우는 게 순서였다.
하단으로 자성검을 늘어뜨린 채 용천혈에 공력을 주입한다.
백서희는 강엽이 검술을 구사하자 호기심이 생겼다.
‘저거 분명 자성검일 텐데.’
자성검호를 암살하는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강엽이 흑접주를 죽였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강엽이 어떻게 자성검을 손에 넣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근데 검술을 쓸 줄 알았나?’
의문을 품은 순간 자색 섬광이 질주했다.
“어?”
백서희가 눈을 크게 떴다.
‘놓쳤어!’
절정고수인 그녀도 강엽의 움직임을 쫓지 못했다.
깨달았을 땐 강엽이 이미 흑포를 입은 혈령교위의 코앞에서 검극을 올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혈령교위가 무어라 지껄이는 찰나, 깊은 혈선이 몸뚱이 위를 내달린다.
이윽고 상반신이 떨어져나가며 성대한 피분수가 치솟기 시작했다. 맥없이 무너진 하체가 붉은 덩어리들을 꿀렁꿀렁 게워낸다.
“교위께서...!”
면전에서 강엽을 놓친 혈교도들은 경악하면서도 즉각적으로 움직임을 가져갔다.
물러나기는커녕 냉큼 뒤어올라 강엽을 품(品) 자로 포위한다. 일부는 백서희에게 달려들었다.
강엽은 놈들의 몸에서 진동하는 짙은 피비린내를 맡자 목구멍이 까끌거리는 것 같았다.
흡혈귀의 본능이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죽이고 그 피로 축배를 들 것을 종용한다.
‘먹어라. 모두 너의 먹잇감이다!’
자성검은 다시 검집에 넣어놨다.
아직은 일격필살의 수로만 가져갈 뿐, 다수와의 난전에서도 쓸 만큼 숙달되지 않았다.
촤아아악!
손톱이 살을 가르고 피를 뿌린다.
뒤에서 짓쳐든 교도의 칼날이 목을 노린 순간, 강엽의 신형이 잠기듯 푹 꺼졌다.
이 한 수에 교도는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셋을 세지도 못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수를 상대로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촤아아악!
“윽!”
호쾌한 궤적이 발목을 끊었다.
몸을 회전시킨 강엽이 무게중심을 낮춘 상태에서 발목을 냅다 후려친 것. 공력이 깃든 흡혈귀의 족격(足擊)은 발도술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쓰러진 놈을 즈려밟아 등뼈를 부러뜨린 강엽이 서늘한 한광을 뿌렸다. 그리고 벼락같이 손을 뻗어 한 놈의 안면을 움켜쥐었다.
붙잡힌 놈이 고통을 호소했다.
“커허...!”
우드드득!
흡혈귀의 악력이 광대뼈를 우악스럽게 바스라뜨렸다. 반쯤 안구가 튀어나온 시체가 축 늘어졌다.
사마외도의 혈교도들조차 등골이 오싹해지는 잔인한 손속.
한 놈을 처리한 백서희가 혀를 내둘렀다.
“뭔 원수 대하듯이 싸우네.”
그럼에도 혈교도들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의 죽음에 분개하여 달려들었다.
물론 강엽은 압도적인 폭력으로 되돌려주었다. 암신을 펼쳐 적들의 공세를 빠져나와 반격했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궤적이 혈교도들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혈령교위와 평교도 모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손톱에 담긴 혈공진기가 그들의 목숨을 수확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혈령교위가 목구멍을 쥐어짜냈다.
“물러서지 마라! 숫자는 우리가 훨씬 많다!”
강엽에게 붙은 숫자만 서른 명이었다. 몇 명이 죽었다 하나 그 이상이 남아 있었다.
강엽의 눈썹이 하늘로 곤두섰다.
“차륜전을 할 생각인가 본데....”
자기들이 얼마나 죽든 강엽의 힘만 소모시킬 수 있다면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겠지.
이만한 전력이라면 절정고수조차 사냥할 수 있다. 실제로 후개 역시 혈령교위 다섯에 평교도들 스무 명과 싸웠을 때 밀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강엽을 죽일 수는 없었다.
“카아악...!”
배후의 비명에 혈교도들이 흠칫했다.
‘또 다른 적인가?’
아니, 그들이 눈앞에 둔 것은 허상에 불과했다.
강엽의 허상이 녹아들 듯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닫고 치를 떨었다.
그러나 늦었다.
“여기... 흐악!”
또 다른 비명이 연쇄적으로 울려 퍼진다.
이번엔 반대쪽이었다.
-휘이익!
심지어 난데없이 메아리친 휘파람이 그들의 정신을 할퀴고 육신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이미 그때쯤 강엽은 물러서지 말라고 독전했던 혈령교위의 면전에 치달아 있었다.
“숫자가 뭐 어쨌다고?”
“빌어먹...!”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장에 작렬한 일권. 가슴이 함몰된 놈이 피화살을 뿌리며 나가떨어진다.
주변을 살핀 강엽이 다시 어둠 속에 녹아들려고 하는 찰나였다.
“거기까지다, 이교의 죄인.”
* * *
사나운 기파가 감각을 사로잡았다.
강엽으로서도 만만히 볼 수 없는 강대한 경파가 머리 위에서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앙!
딛고 선 지붕이 통째로 흔들리고 기왓장이 산산조각 박살나서 사방으로 비산한다.
경파가 들이닥치기 직전 신법으로 피한 강엽이 눈앞에 떨어진 상대를 훑어보았다.
중단전을 개척하진 못했으나 하단전의 축기량이 일 갑자를 훌쩍 넘는다. 축기량만 많다고 무조건 고수인 건 아니지만 방금 전의 경파는 진짜배기였다.
‘최소 은천패급의 고수다.’
흑포를 걸치긴 했으나 실제 경지는 혈령교위를 아득히 뛰어넘은 강자였다.
강엽이 상대의 팔뚝에 단 붉은색 완장을 발견했을 때 뒤에서 백서희가 외쳤다.
“혈사교령(血師敎領)...! 혈령교위보다 윗대가리야!”
혈령교위가 평교도들을 통솔한다면 혈사교령은 혈령교위들을 통솔하는 존재.
혈사교령이 내려선 뒤로 속속들이 혈령교위들과 평교도들이 착지하며 상전을 호종했다.
“그렇군. 차륜전이 아니라 상전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었어.”
“내가 오기 전에 끝냈다면 좋았겠지.”
혈사교령이 완만히 휘어진 유엽도를 늘어뜨렸다.
“네놈이 누군지 모르겠구나. 기파를 보면 우리쪽 같기도 한데... 누구길래 본교를 적대하느냐?”
“염라대왕한테 가서 물어봐라.”
“건방진 놈.”
피식 웃은 혈사교령이 뒤쪽으로 손짓했다.
“너희들은 저 계집을 사로잡는 데 힘을 보태라. 이놈은 내가 잡겠다.”
“삼가 명을 받듭니다.”
교위들이 예를 갖추었다. 철저한 상명하복의 규율이 그들의 몸에 배어 있었다.
교위들과 평교도들이 빠져나가는데도 강엽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백서희가 고생은 좀 하겠지만 허망하게 죽진 않을 테니까.
“동요하지 않는군. 걱정되진 않나?”
“전혀.”
강엽이 손가락을 구부리며 말을 이었다.
“널 죽이고 가면 되거든.”
“하하,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지.”
짐짓 호기롭게 웃고 있지만 혈사교령의 눈빛은 광기 어린 살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강엽 역시 허리춤의 검파를 그러쥐었다.
그 순간, 빛살처럼 내달린 두 사람이 교차하면서 서로를 향해 필살의 절초를 휘둘렀다.
단 한 초식이지만 그 안엔 무수히 많은 공방이 담겨져 있었다. 상대의 시선과 호흡, 병장기를 쥔 근육의 움직임과 공력의 발출까지.
공방이 길어져서 내상을 입으면 술법진에 먹힐 수 있었기에 혈사교령은 장기전을 생각하지 않았다.
강엽 역시 마찬가지였다.
쓰하악!
서로를 스쳐나간 병장기가 상대의 호신기를 우격다짐으로 베어버린다. 강엽의 검격은 앞서 휘둘렀을 때보다 비교도 안 되게 강맹했다.
몰래 지켜보고 있던 혈사교령의 예상을 웃돌 만큼.
“제기랄...!”
욕지거리를 내뱉은 혈사교령이 한쪽 무릎을 꿇고는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했다.
“쿨럭! 방금 그거, 이름이 뭐냐?”
“뇌령.”
“...더럽게 빨랐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작게 중얼거린 혈사교령의 손에서 칼잡이가 빠져나갔다.
숨이 꺼져가는 그를 향해 강엽이 물었다.
“네가 진짜 두령은 아니겠지. 너보다 더 위가 있을 거다. 그게 누구지?”
꽤 강하긴 해도 흑룡교의 유산을 둘러싼 무림맹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준은 아니었다.
혈교가 흑룡교의 유산을 중시한다면 교령만 보냈을 리가 만무할 터.
교령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큭큭, 교성(敎聖)께서... 내 복수를 해주실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교령의 숨이 멎자 잘려나간 심맥에서 선혈이 울컥울컥 쏟아져나왔다.
강엽이 미간을 찌푸렸다.
“교성....”
혈교에 대한 서적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과거 수천을 헤아렸던 혈교의 마인들 중에서도 한 줌에 꼽혔던 초강자들.
엄청난 위기였지만 강엽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교성쯤 되는 존재라면 모산혈조의 행방을 알고 있지 않을까.
‘일단은 눈앞의 일이 먼저.’
강엽은 백서희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