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10화 (110/450)
  • 18화. 안개 (2)

    강엽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뿌연 안개가 드리운 회색 하늘은 밤낮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칙칙하기 짝이 없었다.

    ‘바깥엔 해가 떴겠지?’

    안갯속에서 햇볕이 들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고 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술법진의 효능을 누리니 새삼 흑무암쇄진이 필요한 이유가 절절하게 와닿았다.

    그냥 안개만 불러내는 거라면 꼭 흑무암쇄진이 아니어도 된다. 하지만 흑무암쇄진이 특별한 이유는 빠르게 발동할 수 있어서였다.

    본디 술법진이 준비하는 데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굉장한 이점이었다.

    ‘이번엔 얻었으면 좋겠는데....’

    이곳에 흑무암쇄진이 있을지는 모른다. 흑접주 역시 다른 분타에서 정보를 얻은 것이기에 전부 알진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놈이 얻은 정보를 취합하면....

    “크흠!”

    별안간 등 뒤에서 들린 후개의 헛기침이 상념을 끊었다.

    그가 운기하는 동안 호법을 섰던 강엽이 팔짱을 풀고 물었다.

    “몸은 어떻지?”

    “덕분에 한결 나아졌소.”

    후개가 멋쩍어하며 두 손을 맞잡아 포권을 쥐었다.

    강엽 덕분에 기습당할 염려 없이 운기할 수 있었던 것.

    물론 강엽을 덮어놓고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다른 수가 없었다. 운기조식으로 몸을 돌보지 않으면 술법에 저항하지 못하고 몸을 내주었을 테니까.

    강엽이 물었다.

    “아까 복용한 게 성수장의 요상약이라고?”

    “그렇소. 본방에도 비전의 요상약이 있긴 하지만, 솔직히 요상약은 성수장의 것이 가장 낫소. 괜히 강호 제일의 의원이라 불리는 게 아니지.”

    당연히 값은 무진장 비쌌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물론 완전히 나은 건 아니오. 전력으로 싸우는 건 무리니까. 그래도 급한 불은 껐소.”

    강엽은 어지간한 내상쯤은 바로 재생하기 때문에 성수장의 약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뭐, 그래도 위험한 고비는 몇 번인가 있었소. 까딱 잘못했으면 주화입마에 빠졌겠지.”

    강엽도 알고 있었다.

    초음으로 후개의 몸을 살피는 도중 기파가 흔들리는 것을 몇 번이나 감지했으니까.

    호법을 자처한 것은 후개가 운기하는 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관찰하기 위함도 있었다.

    만약 후개가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술법에 잠식당하면 바로 대처해야 할 테니까.

    그때 후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부터 어쩔 거요?”

    “저기로 가야지.”

    흑룡교의 비밀 분타가 있는 방향.

    강엽이 엄지로 그쪽을 가리키자 후개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떠올랐다.

    “으음, 형장의 힘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소?”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지 만큼 진입조와 합류하는 게 현명하지 않겠는가.

    “우리 방도들이 소식을 전했다면 바깥 사람들도 마냥 기다리진 않을 거요. 어쩌면 이미 진입했을 수도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굳이 동행할 생각은 없다.

    내상을 입고 골골대는 병자를 데려가봤자 운신만 제한받을 뿐.

    “원래부터 일행도 아니고, 각자 원하는 대로 하면 되지 않나.”

    “그, 그래도 위험하지 않겠소?”

    “물론 위험하겠지만....”

    아무리 불사에 가까운 몸이라도 정말로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미적대면 혈교가 흑룡교의 유산을 들고 튈 거다.”

    “그야....”

    후개도 부정하진 못했다.

    바깥에서 본 혈교도들은 일부였다. 정작 혈령교위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는 구경도 못해봤다.

    ‘가만, 그럼 이자의 목적은 뭐지?’

    혼자 행동하는 걸로 봐선 단지 사태를 해결하려고 온 것 같진 않았다.

    후개는 뒤늦게 중대한 점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긴 한데, 형장의 정체를 모르는구려.”

    “그걸 알아서 뭐하게.”

    “혹시 형장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면 말이 씨가 될까 봐.

    강엽이 피식 웃었다.

    “내가 흑룡교의 유산을 노리는 게 아니냐고?”

    “음,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오.”

    “내가 흑룡교의 비술을 노렸다면 이렇게 말을 섞는 일도 없었어. 널 죽였겠지.”

    후개를 입막음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후개를 죽인다고 해도 자신의 소행임이 드러날 일은 없겠지.

    ‘다들 혈교를 의심할 테니까.’

    그럼에도 후개를 살려둔 것은 단지 살인멸구가 내키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목적이 따로 있는 건 맞아.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태를 분석하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않나?”

    “무슨 뜻이오?”

    “이 술법진은 모순덩어리다.”

    뜬금없이 술법진을 주워 섬긴다.

    후개는 강엽이 일부러 화제를 돌리는 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지적할 틈새도 없이 말이 이어졌다.

    “얼마 전까진 외부로부터 이 공간을 감췄지. 한데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드러났다.”

    “음, 그건....”

    “경우의 수는 두 가지겠지.”

    검지와 중지를 편 강엽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하나는 처음부터 술법진이 두 개였을 경우.”

    외부로부터 격리하는 술법진과 안개를 퍼뜨리는 술법진이 따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엔 외부로부터 격리하는 술법진이 수명이 다해서 안개가 퍼졌다고 가정할 수 있지. 하지만 이 가정엔 한 가지 허점이 있어.”

    “그게 무엇이오?”

    “안개가 퍼진다는 거다. 격리하는 술법진을 쓴다는 건 외부로부터 숨기고 싶다는 건데, 안개가 퍼지면 외부의 시선을 끌게 돼.”

    “음, 일리 있구려. 다른 하나는 뭐요?”

    “처음부터 안개를 퍼뜨리는 게 목적인 경우.”

    “...어째서 그런 짓을?”

    “낸들 아나. 근데 내가 겪어본 사마외도의 술법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들을 희생시키더군.”

    강엽을 흡혈귀로 만든 진혈강림대법이나 흑접주가 썼던 암룡승천술 모두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지 않았던가.

    안개를 퍼뜨리는 술법진의 목적이 그런 용도가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왜 인제 와서 안개를 퍼뜨렸는지는 몰라. 근데 여기 오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본 적 있나?”

    “...!”

    “여긴 이미 개미지옥이야.”

    뇌리를 강타하는 충격에 어안이 벙벙해진 후개를 두고 강엽은 무심히 몸을 돌렸다.

    “최악은 혈교가 술법진의 혜택을 홀라당 처먹는 거지.”

    진입조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데 하염없이 죽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네가 전령 노릇을 해줘야겠다.”

    누군가는 술법진을 막아야 한다.

    강엽이 혈교와 싸우느라 시간이 지체된다면 술법진을 막는 것은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역할이리라.

    “명색이 무림맹이고 금패급 낭인인데 그쯤은 할 수 있을 거다. 그것도 못하면 접싯물에 코 박고 뒈져야지.”

    이 말을 들으면 다들 복장이 뒤집히겠지.

    그 광경을 상상하며 쓴웃음을 지은 후개는 진지한 표정으로 포권을 쥐었다.

    “그 말 그대로 전해드리겠소.”

    고개를 끄덕인 강엽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안개 너머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후개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거참, 이름은 끝까지 말해주지 않는구만.”

    * * *

    숲을 나온 강엽은 마을로 향했다.

    안개에 휩싸인 고요하고 을씨년스러운 산골 마을.

    끼익-.

    높다란 나무에 매달아둔 그네가 바람결에 흔들리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 아래선 낡은 헝겊인형이 방치된 채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컹컹! 음머-!

    인기척에 놀란 가축들이 운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소돼지들이 축사를 빠져나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

    하나 가축들을 간수해야 할 마을 주민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황. 마을의 집들을 이잡듯 뒤져봤지만 살아있는 사람은커녕 시체도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

    전강과 만났을 때 야차마곤이 말하지 않았나.

    ‘갑자기 멍해지더니 흐느적거리며 걸아가더란 말이지. 충격을 주면 금세 깨어났지만, 그것도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네.’

    마을 사람들이 그런 꼴이 됐다면, 그들이 어디로 갔을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산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전각군.

    유유히 안개의 마을을 통과한 강엽은 입구를 지나고 나서야 인기척을 감지했다.

    “.......”

    예상과는 사뭇 다른 광경.

    남루한 행색의 사람들이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멍하니 회색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선 채로 똥오줌을 지렸는지 바지가 볼룩하게 솟고 오물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발소리가 났는데도 반응하지 않는다. 하나 심장은 느릿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살아있긴 하지만 반쯤은 송장이나 다름없어.’

    안개가 퍼진 시일을 감안하면 이들은 최소 보름은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한 채 하늘만 바라봤을 것이다.

    육신을 갈고 닦은 무림 고수에게도 불가능한 일을 산골 마을의 주민들이 할 순 없다. 굶어죽진 않더라도 탈진해서 쓰러졌을 텐데....

    초음으로 주민들의 체내를 관찰한 강엽은 어떤 기운이 그들에게 흘러가는 것을 확인했다.

    ‘술법인가?’

    확실했다. 술법이 이들을 살지도 죽지도 못한 상태로 강제로 연명시키고 있었다.

    ‘술법이 완성된 건 아닌 것 같고. 발동은 됐지만 애매한 상태로 유지하는 건가...?’

    이것이 술법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인지, 아니면 잠시 중단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술법엔 중심이 존재한다.’

    진혈강림대법을 쓸 때 강엽이 그랬고, 암룡승천술을 쓸 때 흑접주가 그랬듯. 필시 이번에도 술법의 중심이 되는 존재가 있을 터.

    고민은 길지 않았다.

    ‘피냄새.’

    안개를 타고 흐른 피냄새가 코끝을 찌른 순간, 강엽은 즉시 그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복잡한 구조의 전각들을 지나치자 시체들이 나타났다. 붉은 무복을 입은 시체들이 팔다리나 몸통이 썰려나간 몰골로 피웅덩이 위에 누워 있었다.

    살아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끄윽....”

    흑포를 입은 무인.

    경동맥을 베인 채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리는 흑포무인은 애타는 시선을 보내다 숨이 끊어졌다.

    강엽은 경악으로 굳어진 시체를 보자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모산혈조의 부하이자 그가 처음으로 피를 마셨던 혈교의 무인.

    ‘그렇군. 그놈도 혈령교위였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

    혈교도들의 목숨을 끊은 병장기.

    허공에 걸쳐진 채 핏방울이 뚝뚝 흐르는 은사를 본 강엽이 차가운 안광을 내뿜었다.

    줄곧 품었던 의문과 눈앞의 현실이 짜맞춰지면서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싸움이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혈교도들을 살해한 자는 멀리 가지 못했으리라.

    우우우우우웅......!

    초음의 파동이 동심원처럼 퍼져나간다.

    제자리에 서서 되돌아오는 파동을 받아들인 강엽은 십여 장쯤 떨어진 전각의 지붕에 불쑥 치솟았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인영이 출수하려는 순간, 죽립을 살짝 벗은 강엽을 보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촤아악!

    검풍에 죽립이 날아갔지만 강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눈앞의 인영을 바라봤다.

    회색의 피풍의를 입은 여인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스르릉...!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날이 안갯속에서 자색 신광을 내비친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멸문한 흑접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한 자릿수의 살수.

    그리고 본인은 모르지만, 흑접주의 혈육인 여인.

    태풍을 만난 것처럼 흔들리는 동공을 보면서 강엽이 그녀의 이름을 뇌까렸다.

    “백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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