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09화 (109/450)

18화. 안개 (1)

바다처럼 펼쳐진 자욱한 운무.

그 한복판에 선 강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개를 헤치고 들어온 뒤부터 정신을 침범하려는 사특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확실히 술법진이구만.’

정신 바빡 차리지 않으면 술법에 먹히고 말 터.

공력을 끌어올려 저항했지만, 술법의 기운은 굶주린 짐승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막으려면 계속 공력을 써야 하는 만큼 꽤나 성가셨다.

‘이러면 장기전은 힘들겠어.’

아무리 축기량이 많아도 단전의 내공은 무한이 아니다. 계속 쓰면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운기조식을 해야 하는데, 술법에 저항하면서 운기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조차 이 안에 오래 있으면 내공이 고갈될 게 뻔했다.

‘그전에 뭔가 찾아야 하는데....’

생각을 이어가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투두둑...!

가파른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돌멩이들.

딱 한 걸음만 내디뎠다면 저 돌멩이들처럼 곤두박질 쳤겠지.

그러나 강엽은 아래쪽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안개 너머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희뿌연 안개 속에 감춰진 그림자.

산골 마을의 주민들이 살았을 거로 짐작되는 가옥들 뒤로, 기와를 올린 수십 채의 전각군이 우후죽순 올라오고 있었다.

‘작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할 줄이야.

예상을 벗어난 규모에 놀라면서도, 강엽은 전각군으로 가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무언가를 감지한 강엽은 뒤쪽의 숲으로 고개를 홱 틀었다.

숲 역시 안개에 휩싸였기에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있다.’

그러고 보면 안개에 들어온 이후론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안개에 삼켜졌는데 한 명도 만나지 못한 건 이상하지 않은가. 이제야 사람을 만난 것은 늦은 감이 있었다.

‘문제는 저기 숨은 놈의 정신머리가 온전한지 모르겠다는 건데....’

회까닥 돌았다면 싸워야 할 수도 있는 일.

만약을 대비해서 공력을 끌어올린 강엽은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입을 열었다.

“거기 숨은 거 다 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강엽은 기척이 흐트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셋을 센다. 그 안에 나오지 않는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영이 움직였다.

강엽이 있는 앞쪽이 아니라 반대편 뒤쪽으로.

“도망치겠다고?”

어이없어하면서도 강엽은 냉철하게 판단했다.

정말 도망치는 걸 수도 있고, 일당이 있는 곳으로 유인하는 걸 수도 있다. 하나 뭐가 됐든 안쪽 상황을 알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놓칠 수는 없었다.

“뜀박질은 꽤 빠른걸. 하지만....”

아마 숲의 지형과 안개를 이용해서 추격을 뿌리치려는 심산이겠지.

추종술의 대가도 이곳에선 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을 테니, 숲 깊숙이 숨겠다는 판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상대가 강엽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파앗!

모습은 감출 수 있어도 피냄새는 지우지 못한다. 오히려 기척을 쫓는 것보다 더 정확했다.

도주하는 자도 강엽이 쫓아온다는 것을 알았는지 기파가 흔들렸다.

‘부상을 입었군.’

유인책의 가능성은 지웠다. 놈은 정말 강엽을 뿌리치기 위해서 도망치고 있었다. 기파가 불안한 걸로 봐서는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오래지 않아 나무와 안개에 가려졌던 놈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봐, 왜 도망치는 거냐?”

내공을 담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자 움찔 굳어진다. 하지만 곧 이를 악물고 다시 도망쳤다.

잠시 망설인 틈을 타서 거리를 좁힌 강엽은 도망치는 놈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또 뭐하는 놈이야?’

뒤룩뒤룩 살찐 놈이 나비처럼 휙 날아서 벌처럼 쐐액 쏘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다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주제에 저토록 표홀하게 움직인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칠 수는 있었다. 발바닥 용천혈에 막대한 공력이 움트는 것과 동시에 강엽의 신형이 유성처럼 쏘아졌다.

결국 놈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몸을 돌리며 쌍장을 내뻗었다.

‘저건...?’

용의 형상으로 뭉친 새하얀 연기.

부상을 입은 자답지 않은 강맹한 장력이었다.

투아아아아앙!

장력을 맞은 나무들이 중간부터 뚝 분질러지면서 주변의 나무들을 덮쳤다.

“꽤 하는데.”

“으헉...!”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도주자는 기겁했다.

강엽이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런 미친! 왜 자꾸 쫓아오는 거냐고!”

그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변화를 일으키면서 마치 용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꾸르릉 메아리쳤다.

다시 한번 격발한 장력 경파가 강엽이 있는 곳을 휩쓸었다.

빠악!

“크헉!”

등짝을 얻어맞은 도주자가 고꾸라졌다.

‘젠장, 언제...!’

앞에 있었던 강엽이 배후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공격한 게 허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자빠진 상태에서 상반신을 튕겨 휙 일어나면서 반격초를 가했다. 강엽은 어느새 상대의 손에 쥐어진 육각 몽둥이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뒤져라, 이 새끼야!”

카앙!

몽둥이는 강엽의 몸에 닿지 못했다. 반쯤 뽑힌 자색의 검날에 가로막혔다.

“으윽!”

터엉!

그 순간 벼락같이 들이닥친 일장.

“끄어억!”

훨훨 날아간 육중한 몸이 수풀을 깔아뭉갰다.

강엽이 차갑게 뇌까렸다.

“까불지 마라. 죽일 거면 진작 죽였어.”

“우웩!”

일어나다 말고 한 움큼 죽은피를 토한다. 초점이 살짝 엇나간 얼굴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쿨럭, 시발... 왜 날 쫓아오는 거요!?”

“넌 왜 도망치는 건데?”

“그, 그야... 당신이 누군지 모르니까....”

“나도 네가 누군지 몰라서 쫓았다.”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알아야 하나?”

“다, 당연히 알아야지. 내가 개방 후개인데.”

“....”

“...뭐요?”

“...개방이 내가 아는 그 개방 맞나? 거지들이 모인 방파 말이야. 구파일방 중의 하나인 그 개방.”

“맞소. 내가 그 개방의 후계자인 후개요!”

“사기치지 마라.”

“뭐, 뭣!”

“너처럼 살찐 거지가 어디 있나. 처음 봤을 땐 돼지가 날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펴, 편견이오! 거지도 살찔 수 있다고!”

“더듬는 걸 보니 아닌 것 같은데. 사람을 속일 거면 좀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는 성의를 보여라. 너 같은 게 개방 거지라고 하면 누가 믿겠냐?”

“아니, 내가 개방 후개 맞다니까! 비만개라 불리는 그 개방 후개라고!”

후개는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세상에, 다른 것도 아니고 뚱뚱하다는 이유로 정체를 의심받다니!

“젠장! 내가 쓴 장법이 항룡십팔장이란 말이오! 봉법은 타구봉법(打狗棒法)이고!”

항룡십팔장과 타구봉법 모두 개방주의 절기였다.

하지만 강엽은 심드렁했다.

“너무 허접해서 모르겠는데.”

“허, 허접....”

후개가 파르르 떨었다. 의심받는 것도 서러운데 무공까지 허접하다는 소리나 듣다니?

만약 다른 사람이 이딴 말을 했으면 골통을 부숴버렸을 텐데 하필 상대가 안 좋았다. 내상을 입지 않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럼 이건 어떻소? 후개의 상징인 팔결(八結)이오!”

허리춤에 매달린 여덟 개의 매듭은 오직 후개만 매달 수 있는 상징이었다.

“꼴랑 그걸로 증명하겠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나?”

“아니, 시발 뭐 어쩌라고!”

후개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너무 억울해서 눈물까지 살짝 맺혀 있었다.

실로 구구절절한 모습에 강엽도 살짝 당황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의심스럽기는 해도 실력은 진짜였다. 내상을 입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잡지 못했으리라.

‘하긴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저딴 몸을 하고 개방 후개를 자처하진 않겠지.’

무림맹과 하북팽가의 고수까지 왔으니 개방 후개가 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좋아. 네가 개방 후개라고 치고, 왜 술법진 안쪽에서 혼자 어슬렁거리는 거냐? 내상은 왜 입었고?”

“미, 믿어주는 거요?”

“들어보고.”

“사실은....”

내상을 입어 피를 토한 만큼 말하는 것도 버거웠지만 무시하기엔 강엽의 눈초리가 무서웠다.

후개가 대강의 사정을 말하자 강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혈교라고?”

“그, 그렇소. 그 미친 혈귀들한테서 간신히 도망친 거요.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자신이 없어서....”

혈귀는 강호인들이 혈교도를 부르는 멸칭이었다.

그들이 모시는 혈신, 혹은 혈마(血魔)를 추종하여 혈겁을 일으키는 것을 경멸하여 그리 부르는 것.

“아, 아마 흑룡교의 비술을 빼앗기 위해 왔을 것이오. 놈들은 예전부터 흑룡교의 비술을 탐냈으니까.”

“몇 명이나 왔지? 우두머리는?”

“내가 본 것만 스무 명은 훌쩍 넘었소. 그중에 혈령교위가 다섯 명이었고.”

“혈령교위라....”

“평교도 위의 직급이오. 평교도들과 달리 흑포를 입은 놈들이지. 혈교가 왕성했을 시절엔 혈령교위 하나가 고을 지배했다고 들었소.”

흔히 강호에서 일류를 자처하는 자들과 맞먹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혈령교위 서넛이 모이면 어지간한 절정고수도 사냥할 수 있었다.

“그놈들이 전부는 아닐 거요. 아마 이 안에도 들어오지 않았나 싶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강엽의 눈치를 살피는 후개였다.

기실 아까 도망친 것은 강엽이 흑포를 입었기에 혈령교위가 아닐까 의심한 탓이었다. 하지만 혈령교위라면 개방 후개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 형장은 누구신지 물어봐도 되오? 혹시 안개에 갇혔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딨는지 알고 계시오? 여기 오는 동안 다른 사람을 못 봐서....”

“나도 방금 들어와서 모른다.”

“엥?”

후개가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다 강엽의 말뜻을 이해하고 황당해했다.

“방금 들어왔다니... 제정신이오? 여기 들어온 사람들은 아무도 못 나갔단 말이오!”

“들어온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 그건 그렇지만... 난 여기밖에 도망칠 데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모두 못 돌아간 건 아니지. 야차마곤 같은 고수는 멀쩡하게 돌아갔잖나.”

물론 야차마곤은 이토록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적당히 외곽만 둘러보다 밖으로 나갔으리라.

“오히려 나보단 네가 더 위험한 것 같은데.”

후개가 맥없이 패한 것은 단순히 내상을 입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술법에 저항하느라 힘들지?”

심연처럼 어둡고 깊은 눈동자를 본 순간, 후개는 강엽이 자신의 문제를 꿰뚫어봤다는 사실을 알고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시오. 몸을 추스르면 다시 나갈 거니까.”

“힘들 거다.”

“...?”

“나가고 싶다고 나갈 수 있는 데가 아니야. 여기까지 들어왔으면 이젠 못 나간다고 봐야 해.”

“무슨 말이오?”

“술법진에 들어온다고 바로 잠식당하진 않아. 우리처럼 저항할 수 있는 고수도 있었겠지. 그럼 개중 한두 명은 진작에 빠져나왔어야 했어.”

야차마곤이나 하북팽가의 도객이 무사히 돌아간 것은 외곽만 훑어봤기 때문일 뿐.

술법에 익숙한 강엽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이 안의 기운이 기묘하게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가려면 생문을 찾아야지. 그전엔 못 나갈 거다.”

확정적인 미래를 논하는 말에 후개의 얼굴에서 혈색이 싹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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