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08화 (108/450)

17화. 세력 (3)

전강은 혼자 있지 않았다.

‘저자는...?’

검은 철곤을 들고 있는 사내.

삐죽 돋아난 텁석나룻과 터질 듯한 근육질의 육신을 본 순간 강엽은 장경에게 들은 이름을 떠올렸다.

‘야차마곤(夜叉魔棍) 도광륜.’

귀주성의 유일한 금인패급 낭인.

별호에 야차와 마가 들어가지만 마공을 익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마외도의 무리를 만나면 가차없이 골통을 부숴버리는 걸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야차마곤이라는 살벌한 별호로 불리는 것은 사마외도를 상대함에 있어 손속이 과하게 잔혹하기 때문.

하지만 야차마곤이 이 자리에 있는 것보다도, 야차마곤이 전강을 부르는 호칭이 더 놀라웠다.

“예서 사제를 만날 줄은 몰랐네.”

“...!?”

설마 청송객잔의 점소이와 금패급 낭인이 동문의 사형제일 줄이야.

장경에게서도 듣지 못했기에 당혹스러웠다.

‘일부러 숨긴 것 같진 않은데....’

만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숨기진 않았으리라.

알았다면 무언가 암시를 줬을 터.

“자네 소식은 들었네. 중경 분타주의 밑에서 일한다지?”

“그래서 실망하셨소?”

“전혀.”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는 얼굴. 마음이 상하거나 분노하는 기색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 젊은 시절의 번민을 잊지 못해 사바(娑婆)를 방황하고 있거늘 어찌 사제를 비난하겠나?”

“도 사형.”

“하지만 구태여 예까지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군. 사제는 강호를 등지지 않았는가.”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소문을 듣고 왔소.”

“본인과 상관없는 일에 굳이?”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야차마곤도 끝까지 추궁할 생각은 없는지 그러려니 했다.

“오지랖은 여전하구만. 안 그래도 손이 부족한데 돕겠다는 것을 말릴 필요는 없겠지만... 조심하게. 저 안개는 살아있는 사람을 삼키니까.”

“오면서 대강 듣기는 했는데 정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는 것이오?”

“죽어서 돌아온 자도 없지. 깊숙이 들어간 자들은 모두 행방이 묘연해. 수뇌부들이 방도를 찾고 있지만 아직 뾰족한 수를 찾진 못했네.”

“으음!”

“팽 단주가 데려온 진법가도 난색을 표하더군.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씨알도 안 먹힐 거라던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위험을 무릅쓰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다행스러운 건 내공 화후가 깊은 사람들은 안개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거지.”

마치 깊숙이 들어가본 적이 있다는 어투.

굳은 안색의 전강을 응시하며 피식 웃은 야차마곤이 말했다.

“나뿐만 아니라 팽 단주도 비슷했네.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어찌 될지 모르니 곧바로 나왔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삼십 장만 들어가도 정신을 못 차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정신을 못 차린다니?”

“갑자기 멍해지더니 흐느적거리며 걸아가더란 말이지. 충격을 주면 금세 깨어났지만, 그것도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네.”

“...위험하군.”

“그래, 위험하지. 하지만 머지않아 정예들로 꾸린 진입조가 들어갈 걸세. 저 안개를 방치하면 어디까지 퍼져나갈지 모르잖나.”

당장 안개가 퍼진 곳에서 동쪽으로 삼백 리만 가면 귀양이 나온다.

“설마 귀양까지 퍼지진 않겠지만 무작정 낙관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빠르면 내일이나 모레쯤엔 움직일 걸세.”

“기억해두겠소.”

두 사형제는 그렇게 헤어졌다.

‘회포도 안 푸나?’

아무리 중요한 일을 앞뒀어도 오랜만에 만났다면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

내심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강엽은 전강을 따라갔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에겐 초음을 쓴 적 없었지.’

함께 싸울 일도, 대립할 일도 없었던 사내.

전강이 고수라는 것은 알았지만 지금까진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하지만 야차마곤의 사제라면 변수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그의 경지를 파악해놔야 할 터.

우우웅..!

“.......”

전강의 단전에 부딪친 초음의 파동이 튕겨지듯 되돌아와 뇌리에 새겨진 순간, 강엽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충격을 느꼈다.

왜 이제까지 등한시했던 것일까.

‘이런 바보 같은 놈을 봤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혀를 찼다.

아랫배에서 시작하여 정수리까지 뻗어 있는 휘황찬란한 빛줄기.

중단전을 열어 정과 기가 공명하는 경우는 봤어도 그 위쪽까지 융통무애하는 경지는 처음이었다.

확실했다. 전강은 삼화취정의 경지에 올랐다.

‘이게 바로....’

압도적인 향연에 매료되어 기파가 흐트러진 순간, 전강이 그가 숨은 곳을 돌아보며 엷게 웃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구려.”

“...음, 미안합니다.”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고 암신을 풀고 나와 사과했다.

본의는 아니지만 사형제의 대화를 멋대로 엿듣지 않았나.

“의도치 않은 건 알고 있소. 은신한 채 돌아다니다 나를 발견한 것 아니오.”

“알고 계셨습니까?”

“익숙한 기척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진작부터 눈치챘소. 정확히 어딨는지는 몰랐지만....”

역시 암신으로 어둠 속에 녹아들어도 월등히 높은 경지에 오른 초고수의 감각을 속이는 건 힘들었다.

‘그래도 바로 눈치채진 못했군. 내 자존심을 생각해서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전강도 초음을 눈치채진 못했다.’

평정심이 깨져 기척이 흐트러진 건 반성해야겠지만, 전강 같은 고수도 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을 확인한 것은 나름 큰 수확이었다.

전강 같은 고수들을 상대로도 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의미였으니까.

“나와 도 사형에 대해 궁금하진 않으시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강엽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껏 이야기하지 않은 데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남모를 비밀 하나는 있는 법이었다.

그가 흡혈귀에 대해 남에게 밝히기를 꺼려하듯 전강 역시 외부에 자신의 출신을 발설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괜찮다면 저랑 같이 가지 않겠습니까?”

전강 같은 고수의 조력을 받는다면 천군만마나 다름없을 터.

물론 재생력이나 흡혈에 대한 건 철저히 숨겨야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동행할 가치는 충분했다.

“...미안하오.”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는데도 강엽은 평온했다.

왠지 대답을 듣기 전부터 이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강 무사와 동행하는 게 싫은 건 아니오. 다만....”

동문의 사형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리라.

입장이 바뀌었다면 강엽 역시 전강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뭐, 괜찮습니다. 동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서로에게 도움을 될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 말이오?”

“저 안개는 흑룡교와 연관이 있을 겁니다.”

“...아마 그렇지 않겠소?”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 같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엽의 말뜻은 그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죽은 흑접주가 남긴 기록을 봤습니다. 그자는 흑룡교의 비밀 분타를 찾고 있었고, 그중 하나가 여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

“그렇다면 어중간하게 몰려가봤자 화만 입을 겁니다.”

중단전을 열어 고강해진 흑접주도 얕보지 못한 곳이었다.

진입조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들어갈지는 몰라도 하북팽가의 도객이나 야차마곤을 제외하면 제 목숨 건사하기도 빠듯하리라.

“제가 알아낸 정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신....”

“말씀해보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땐 정보의 출처가 저라는 걸 숨겨주십시오.”

“그러겠소.”

“그리고 제가 원하는 걸 찾으신다면 몰래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전강에겐 흑무암쇄진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강엽이 의뢰와 상관없이 왔는데도 왜 왔는지 의아해하지 않는 게 역설적으로 그가 강엽의 동기를 알고 있다는 증거.

장경이 알려주었든, 고절한 경지에 오른 초고수의 감각으로 알아냈든 강엽이 흑무암쇄진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묵한 눈으로 강엽을 바라보던 전강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거절했을 것이오.”

수락이나 다름없는 대답. 내심 쾌재를 부른 강엽은 흑접주의 일기에 서술된 위험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전강과 헤어져서 안개 속으로 향했다.

* * *

“어이구, 내 팔자야.”

남루한 옷차림에 맞지 않게 푸짐한 살집을 가진 개방 후개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사부인 개방주의 명령을 받고 무림맹 총단까지 가서 총군사를 뵙고 서찰을 드린 게 며칠 전이었다.

이후 비호탈명(飛虎奪命) 팽관후가 이끄는 호천단(護天團)과 함께 머나먼 귀주성까지 왔다.

거기까진 좋은데 문제는 그 뒤였다.

‘명령이니 듣기는 하는데....’

수상쩍은 놈들이 얼씬거리진 않는지 감시하라는 팽관후의 명령으로 며칠째 똑같은 산길을 돌고 있었다.

“세상에. 거지가 빌어먹어도 모자랄 판에 가장 열심히 뛰어다니다니.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

죽상을 지으면서 하소연하는 후개의 추한 모습에 뒤에서 따라오던 중년 거지가 킬킬거렸다.

“그래도 이게 어딥니까. 순찰조 아니면 진입조에 걸리는 상황이었는데요.”

허리춤에 세 겹으로 꼬인 매듭을 달고 있는 그는 직금현의 분타주였다. 그와 거지들이 후개와 한 조가 되어 일대를 돌고 있는 것이다.

후개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차라리 진입조가 낫소.”

“엥? 진심이십니까?”

“진법가도 말했잖소. 밖에선 건드릴 수 없다고. 백날 기다린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진 않을 거요.”

“그야 그렇긴 한데... 죽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어차피 저 안개가 퍼져나가면 답이 없소. 그러면 안개가 덜 퍼졌을 때 들어가는 게 낫지.”

삼결제자가 입을 닫았다. 후개가 엄살이 심하긴 해도 틀린 소리를 한 건 아니었다.

“이미 꽤나 시일이 흘렀소. 수뇌부가 망설이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이젠 결정을 내려야지.”

벼랑 끝에 몰렸는데 적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격이었다. 한 발자국만 밀려나면 낭떠러지인데도.

그때 수풀을 즈려밟은 후개가 돌연 흠칫하더니 등 뒤로 멈추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이어서 입을 다물라는 수신호까지 보내자 뒤따르던 개방 거지들의 안색도 심각해졌다.

[피냄새가 나지 않소?]

바람결에 실려오는 비릿한 혈향.

후개의 전음에 콧잔등을 구긴 분타주가 피냄새가 맞다는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조심스레 피냄새가 나는 곳으로 향한 그들은 머지않아 참혹한 현장을 발견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십여 명쯤 되는 무인들의 시체가 사지가 끊기고 목이 썰려나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앞서갔던 순찰조입니다!”

“어떤 미친놈들이...!”

넓은 범위를 감시하기 위해 순찰조도 여러 개를 굴렸다.

살집에 뒤덮인 후개의 눈이 예리하게 현장을 살폈다.

“일방적으로 당했군.”

십여 명이 죽었는데도 주변 경물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공력을 동원하는 무림인들의 싸움은 필연적으로 상흔을 남기는데도 말이다.

경악으로 굳어진 시체들을 일별한 후개가 말했다.

“도망칠 틈새도 없었겠지. 싸움은 금방 끝났을 것이오.”

“모두 같은 수법에 당한 것 같습니다.”

“한 명은 다르오.”

고개를 저은 후개가 손가락이 부러지는 등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은 시체를 가리켰다.

풀어헤친 옷가지를 완전히 벗기자 단풍잎처럼 다섯 갈래로 길게 뻗친 시뻘건 낙인이 드러났다.

분타주가 신음처럼 목구멍을 쥐어짰다.

“혈수인(血手印)...!”

격타하는 순간 뚜렷한 흔적이 남기 때문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마공이었다.

후개가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흑룡교의 흔적을 쫓아왔더니 혈교가 걸렸군.”

“어째서 혈교가...?”

“이상한 일은 아니오. 흑룡교가 멸문했을 당시 백도 정파뿐만 아니라 다른 마교들도 흑룡교의 생존자들을 사냥했으니까.”

사대마교들은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마냥 증오하면서도 상대의 비술은 탐내는 희한한 관계.

흑룡교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안개가 등장했으니 냄새를 맡고 달려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팽 단주께 말씀드려야....”

그렇게 말하던 후개는 별안간 섬뜩함을 느끼고 발밑 용천혈로 진기를 내뿜으며 상반신을 틀었다. 육중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기민한 신법이었다.

직후 시퍼런 빛살이 그가 있던 자리를 베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외마디 비명들이 울려 퍼졌다.

“아악!”

“저, 적이...!”

검은 장포를 입은 자들.

그들을 본 후개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혈령교위(血令敎尉)...!”

그들뿐만이 아니다. 붉은 무복을 입은 평교도들이 노도처럼 개방도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이 더러운 마교 새끼들이!”

“운이 좋군.”

흉흉한 살기를 내뿜은 혈령교위가 맛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입술을 핥았다.

“그놈 말대로야. 개방 후개가 순찰조에 있다니. 혈신(血神)께서 미욱한 중생을 보우하셨구나.”

“닥쳐라!”

노성과 함께 쌍장에서 막강한 기파가 휘몰아쳤다.

용을 불러일으킨다고 알려진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의 절초가 개방 후개의 육장을 통해 현현한다.

뻐어엉!

피처럼 시뻘건 혈수인과 항룡십팔장의 장력이 격돌하는 순간 후개는 반탄력에 저항하지 않고 쭉 밀려났다.

‘빌어먹을, 하나씩 싸우면 별것도 아닌 놈들이!’

혈령교위만 다섯 명이고 평교도들은 스무 명이 훌쩍 넘는다.

개방 후개라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전력이었다.

[분타주, 방도들 챙겨서 도망가시오!]

[하오나...!]

[어서! 내 한 몸 건사할 자신은 있소! 어떻게든 시간을 끌 테니 팽 단주에게 사태를 알리시오!]

방도들이 빠지면 몸을 뺄 자신이 있었다.

분타주는 자신들이 짐만 된다는 것을 깨닫고 탄식했다.

[팽 단주님께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반드시 무사하셔야 합니다!]

목숨이 붙은 방도들을 챙겨 멀리 도망치는 분타주의 전음이 귓가를 아른거린다.

“씁, 몸 쓰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지.”

두툼한 턱살을 긁적이며 입맛을 다신 후개가 포위망을 좁혀오는 혈교도들을 향해 냅다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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