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07화 (107/450)

17화. 세력 (2)

“솔직히 사업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단목정과 애꾸 사내가 한아름 들고 온 장부를 모두 훑어본 강엽은 그 점을 분명히 짚었다.

유생 시절 산학(算學)을 공부한 적이 있어 그럭저럭 장부를 알아볼 수 있긴 해도, 상인처럼 사업을 논하는 수준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강엽이 봤을 때도 숙정방의 사업은 상당히 난잡했다.

“돈 되는 곳은 죄다 걸쳤군.”

기루와 도박장, 사채를 운영하는 건 물론이고 저자의 상인들로부터 보호세를 명목으로 돈을 뜯었다.

그런가 하면 주조장 같은 양지의 사업장을 운영하며 상계와도 밀접한 연을 맺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노주가 대곡주(大曲酒)로 유명하지 않았나?”

“예. 본방의 주조장도 대곡주를 빚습니다. 본방 수입의 삼분지 일이 주조장에서 나옵니다.”

그 다음으론 기루와 도박장 순서로 수입이 많이 들어왔다.

‘의외로 사채나 보호세는 비중이 적군.’

사채는 다른 흑도 방파들도 많이 하기 때문에 재미를 보기 힘들었고, 보호세 역시 저잣거리 상인들에게서 뜯어내는 돈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강엽이 말했다.

“사채는 접어. 보호세도 그만 받고.”

“예에?”

가장 놀란 것은 애꾸 사내였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그는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시선을 받고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가만히 애꾸 사내를 노려본 강엽이 빈정거렸다.

“왜, 내 이름 팔면서 그딴 짓은 하고 싶나?”

“그, 그래도 돈은 꽤....”

“명을 따르겠습니다.”

아까워하는 애꾸 사내에 비해 단목정은 단호했다.

그녀는 애꾸 사내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주군께 누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전대 방주는 돈에 미쳐서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손을 뻗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강엽의 휘하에 들어간 만큼 그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 정도는 해야 하리라.

“허락하신다면 다른 애매한 사업들도 정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그런데....”

“...?”

“혹시 밀염(密鹽)은 안 하나?”

작금의 국법상 소금은 양회염장(兩淮鹽場)의 권한을 얻은 상인들만 유통할 수 있었다.

‘그러려면 북방 전선에 군량을 납부해야 하고.’

막대한 군량을 조달하는 것부터가 중소상인들이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다. 대상인들이 염업을 독점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국 각지에 소금을 유통할 수 없기에 알게 모르게 밀염이 횡행하는 실정이었다.

두 사람이 기겁했다.

“하다가 걸리면 본방이 풍비박산납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안 하는 짓이 없던 전대 방주도 밀염은 감히 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야. 앞으로도 하지 마라.”

“예....”

“순이익의 일 할은 내 앞으로 달아놓고.”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면 모를까, 이름을 빌려주는 이상 가져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순이익의 일 할이라면 어지간한 고액 의뢰비 뺨치는 돈이었다.

“대신 무공을 주지.”

두 사람이 눈을 끔뻑거렸다. 무공을 주겠다는 말이 선뜻 와닿지 않은 탓이었다.

강엽이 단목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공을 익힌 지 얼마 안 됐지?”

초음으로 살펴본 단목정의 단전은 형태만 겨우 잡은 상태였다.

본래 서녀의 신분인 만큼 가전무공을 배우지 못했기에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것.

“그, 그렇습니다.”

“비급 갖고 와 봐.”

단목정은 순순히 따랐다. 이미 강엽은 전대 방주를 죽이고 그의 비급을 읽지 않았던가.

비급을 다시 찬찬히 훑어본 강엽은 미간을 좁혔다.

‘역시....’

자성검법 등 상승 무공들을 통찰하면서 안목을 키운 덕에 숙정방의 가전무공은 변변찮게 느껴졌다. 차라리 흑접의 무공이 더 나았다.

“이것보다 좋은 무공을 주겠다. 그걸 익히는 게 더 나을 거야.”

그제야 두 사람도 강엽의 말뜻을 깨닫고 입을 함지박 만하게 벌렸다.

“무, 무공을요?”

“그래. 지필묵 가져와 봐.”

애꾸 사내가 얼른 종이와 먹과 붓을 대령했다. 벼루에 붓을 적신 강엽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나이를 먹었으니 근골이 굳었겠지. 혈도도 잡스러운 기운이 찼을 테고.”

명가의 자제들이 어렸을 적부터 수련에 임하는 이유였다. 성장이 끝나고 입문하면 상승 무공을 익히기 힘들었다.

강엽은 흡혈귀가 되면서 환골탈태와 같은 공능을 누렸기에 그런 문제를 겪지 않았지만, 단목정은 평범한 인간이다.

그녀가 상승 무공에 입문하려면 일단 토대를 갖추는 것부터 선결되어야 한다.

“수신경(修身經)이라는 거다.”

이름 그대로 몸을 닦는 공부였다.

흑접주의 비고에서 발견한 비급 중 하나.

‘흑룡교주의 혈손들이 어릴 적부터 익히는 기본공... 그렇게 적혀 있었지.’

수신경의 수련은 근골과 혈도를 자극한다.

그 성취가 여타 무공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흑접주 역시 나이를 먹고도 계속 갈고 닦았다.

강엽 역시 흥미를 느끼고 수신경을 고찰했었기에 구결을 막힘없이 써낼 수 있었다.

“일단 구결부터 외워. 구체적인 수련법은 그 뒤에 알려줄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단목정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자신이 받은 것이 엄청난 기연임을 깨닫고 감격했다.

오죽하면 애꾸 사내가 부러워하는 시선을 보내는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일단 방주가 먼저 익히고, 나중에 싹수가 보이는 놈들을 골라서 전수해.”

무공을 전수받았다는 소문이 나면 숙정방의 방도들은 단목정을 더더욱 어려워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 역시 수혜자가 되지 않을까 기대할 테고.

강엽은 애꾸 사내가 결연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세를 확장하는 건 생각하지 마라. 지금은 실력을 키우고 내실을 다질 때야.”

숙정방을 거두긴 했지만 무엇을 할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둔 게 없었다.

그래도 훗날 세력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쓸 만한 구석이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단목정이 결기 어린 얼굴로 화답했다.

“주군의 명을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무슨 말씀이신지....”

“귀주성의 괴소문.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사람을 삼키는 정체불명의 안개.

애꾸 사내와 시선을 교환한 단목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간의 사정을 밝혔다.

* * *

그로부터 나흘간 숙정방에 머무른 강엽은 땅거미가 내려앉았을 때 노주를 떠났다.

사건이 벌어진 직금현까지는 천백 리가 넘는다. 게다가 귀주땅은 산세가 험하고 관도가 거의 없어 시간이 더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강엽이 직금현에 도착하는 데는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확실히 내가 강해지긴 강해졌어.”

이 갑자가 넘는 공력 덕분이다. 경공을 전개하는 속도는 물론 지속력도 몇 배는 월등해진 것. 하룻밤에 사백 리씩 달렸는데도 공력이 마르지 않는다.

산봉우리에 오른 강엽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자욱한 운무를 주시했다.

‘먹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은걸.’

단목정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저 안개가 창궐한 시점은 흑접이 무너진 다음 날이었다.

‘하루 정도는 오차가 날 수 있겠지. 만약 흑접주가 죽은 당일에 저 안개가 나타난 거라면....’

처음엔 마을 하나 뒤덮었던 안개는 시간이 지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세를 불리고 있었다.

강엽은 단목정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상인들 말로는 귀양에 있는 낭인전 분타뿐만 아니라 여러 무림 문파들이 나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시체도 못 찾았고?’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도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만 한다고 하던가.

안개 바깥에서 흔들거리는 노란 불꽃들이 저곳에 귀주의 무림인들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산봉우리에서 보일 정도라면 군영과 맞먹는 규모였다.

‘들어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야.’

귀주의 무림인들이 암만 경계를 철저히 해도 저 넓은 지역을 다 틀어막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강엽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귀주 무림인들이 있는 군영에 들어갔다.

바로 앞에서 안개를 접한 사람들이라면 저 안에 어떤 변수가 있는지 알아냈을 수도 있을 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면면들이 모였는지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그렇게 막사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 따가운 고성이 귓전을 때렸다.

“지금 당장 진입해야 하오!”

“진정하시오, 조검문주. 성급하게 결정할 문제가....”

“어찌 진정한단 말이오? 하루만 지나면 저 안개가 본문까지 집어삼킬 텐데!”

“제자들은 피신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소!”

쿵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검문주가 답답한 나머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친 것이다.

“남일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저 빌어먹을 안개가 계속 퍼지면 당신들의 문파도 위협받을 거요!”

그 말에 비단 궁장의 여인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생각하지 못한다더니 딱 귀하를 두고 하는 격언이군요.”

“뭣이? 비령곡주, 지금 말 다 했소?”

“며칠 전에 운가장주님이 문주님처럼 격하게 항의하셨지요. 그때 문주님께서 어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지 못하시나 봅니다?”

“그, 그건...!”

조검문주는 감히 항변하지 못했다.

안개로 인해 슬하의 자식들을 잃은 운가장주가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갖가지 이유로 난색을 표하면서 거절했던 것이다.

“그땐 안개가 이토록 빨리 퍼질 줄 모르셨겠지요. 남일이라고 여기신 건 조검문주님입니다.”

“...내가 실수했음을 인정하겠소. 하지만 비령곡은 계속 무사할 것 같소? 조만간 곡주의 문파도 저 안개에 삼켜질 수 있단 말이오!”

“으음.”

이번엔 비령곡주의 말문이 막혔다.

이도 저도 못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좀 전에 조검문주를 진정시키려고 했던 사내가 발언했다.

“조검문주님의 말이 맞소.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 하지만 우리에겐 금패급 낭인이 있소. 또한....”

좌중을 둘러보며 사내가 강조했다.

“무림맹에서도 전력을 보내주었지.”

그 말에 놀란 것은 강엽이었다.

중경에도 아직 소문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머나먼 하남성에 있는 무림맹에서 전력을 파견할 줄이야?

‘저자인가?’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유일하게 동요한 기색을 일절 내비치지 않은 다부진 체격의 중년 도객.

초음으로 그의 단전을 살펴본 강엽은 그가 혜정 사태와 비견할 만한 무인임을 알고 표정을 굳혔다.

‘...중단전을 개통했군.’

그때 도객이 흠칫하더니 사방을 둘러봤다.

심상찮은 낯빛에 좌중이 의아해했다.

“왜 그러시오, 팽 단주?”

“...아무것도. 내가 착각했나 보오.”

하지만 그의 눈길은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찾는 듯이 어둠 속을 훑고 있었다.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계속 알짱거리면 들킬 판이었다.

강엽은 기척을 들키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조용히 막사를 빠져나왔다.

‘팽씨 성을 쓰는 도객이라....’

강호 무림에 도객이 많다 하나, 팽씨 성을 쓰는 도객을 만난다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팔대세가. 그중 도법으로 대가문을 이룬 하북팽가 고수의 현신이었다.

‘와보길 잘했군.’

위험한 순간은 있었지만 무림맹과 하북팽가 고수가 왔다는 것을 알았으니 결과적으로 잘됐다.

그렇게 막사에서 완전히 벗어난 강엽은 다양한 복장을 입은 무리들 틈바구니에 끼었다.

대충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니 낭인전 귀양 분타가 귀주성 각지에서 긁어모은 낭인들이었다.

하지만 강엽의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여기서 볼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사람.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하북팽가의 고수를 발견했을 때보다 더 크게 놀랐다.

항상 청송객잔에서나 봤던 전강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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