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03화 (103/450)

16화. 미행 (3)

대상단의 후계자라는 거물을 옭아매기 위해서는 증언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개되면 빼도 박도 못할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야 이빨이라도 박아볼 수 있을 테니까.

‘고문을 해도 그 사람이 반드시 입을 연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하지만 제 시신을 가져가면 그들이 저를 대공자에게 데려가지 않겠어요?’

홍가려의 말은 반만 맞았다.

강엽은 장년인 일당이 홍가려를 바로 대공자에게 데려가진 않을 거라 내다봤다.

‘시신이 썩지 않도록 방부 처리를 요청했지. 시신을 보존할 목적으로 그런 짓을 했다는 건....’

의뢰서엔 대공자가 어째서 그런 의뢰를 했는지까지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방부 처리를 해봤자 부패를 늦출 수 있을 뿐 영원히 썩지 않는 건 아니다.

중경 외곽에서 장안대상회가 있는 서안까지 이천 리가 넘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가을이 됐어도 사천 날씨는 덥고 습하다. 시신을 호송하면 그전에 부패할 거다.’

정확히 어떤 방법을 쓸진 몰라도, 필시 그전에 시신이 썩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리라.

장년인의 부하들이 달구지를 모는 것은 홍가려의 시신을 그쪽으로 가져가기 위함일 터.

‘거기에 증거가 있길 바라야겠지.’

그렇게 장년인의 부하들을 쫓아가는 길.

어둠 속에 숨어든 강엽이 뒤꽁무늬에 붙은 줄도 모르고 장년인과 부하들은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뒤에 따라오는 놈들은 없나?”

“예, 형님. 아무도 안 옵니다.”

“그렇군. 그래도 살수놈들이 뭔 짓을 할지 모르니 경계는 게을리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장년인의 부하들은 아쉬워했다.

흑접의 살수들이 앙심을 품고 덤빈다면 몰살시킨 뒤에 줬던 돈을 빼앗을 수 있지 않겠는가?

장년인이 그걸 알고 호통 쳤다.

“푼돈 아까워하지 마라! 그놈들이 눈깔 돌아가서 덤비다 시신에 흠집 나면? 뒷감당을 할 자신은 있나?”

홍가려의 몸에 흠이 생긴다면 모처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상전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혼쭐이 난 장년인의 부하들이 찔끔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장년인이 작게 끄덕였다.

그때 한 놈이 미련이 남은 얼굴로 관짝을 힐끔거렸다.

“아쉽군요. 죽이지 않고 생포했다면....”

다들 그의 말에 동감하는 얼굴이 됐다.

“저 여자가 생전엔 그렇게 도도해서 남자들 수청을 들지 않았다던데. 진짜일까?”

“쯧쯧, 진짜로 그럴 리가 있겠냐. 부자놈들이 돈을 억수로 안겨주면 제 년이 뭔 수로 버텨? 실제론 이놈 저놈하고 뒹굴었을걸.”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낄낄거리는 와중에도 주변을 철저히 경계하는 장년인의 부하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실력으로는 강엽을 찾을 수 없었다.

‘관도를 벗어나고 있다.’

야음을 틈타 홍가려를 운반한 장년인의 부하들은 한갓진 길로 들어서더니 한 노상 객잔에 들어갔다.

오늘은 너무 날이 어둡기에 객잔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 아침 다시 출발하려는 것이다.

관짝을 싣은 달구지를 가져왔어도 객잔 주인이나 점소이는 담담한 기색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마치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 듯이.

아니, 오히려....

‘한통속인 것 같은데.’

성취가 높진 않았지만 객잔 주인과 점소이도 내공을 익힌 몸이었다.

다른 손님들이 신경 쓰여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장년인과 객잔 주인은 은밀한 시선을 교환했다.

곧이어 방을 안내해준 객잔 주인이 점소이를 엄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귀인의 시신이니 조심히 옮겨라.”

“헤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간사한 웃음을 지은 점소이가 달구지를 옮기더니 말만 떼어내서 마굿간으로 가져가고 수레는 마굿간 옆에 딸린 작은 창고로 가져갔다.

“댁도 참 재수가 없구만. 예쁘게 태어난 게 죄지.”

음침하게 중얼거린 점소이가 창고 밖으로 나가려는 때 관짝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뚝 멈춘 점소이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뭐야?”

슬며시 접근한 점소이가 관짝 위로 손을 가져갔다. 열지 말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

“...뭐, 잘못 들었겠지.”

점소이는 못내 걸리는지 연신 돌아보면서도 결국 관짝을 열지 못한 채 창고 밖으로 나갔다.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를 끝으로 적막에 빠진 창고.

불현듯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점소이가 감히 열지 못한 관짝의 문을 열어젖혔다.

“역시 깨어 있었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홍가려는 그제서야 상대가 강엽이라는 걸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알고 있었어요?”

“도중에 숨소리가 달라져서.”

아무리 가사 상태라도 공기가 통하지 않는 관짝에 오래 있으면 질식할 위험성이 크다.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구멍을 뚫어둬서 안팎이 통하게끔 해둔 상태였다.

“그놈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는데요.”

“실수했으면 들켰을 거다. 방금 전엔 위험했어.”

“아, 알고 있어요. 저도 놀라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요.”

그때 강엽이 물과 육포를 내밀었다.

“먹어. 요깃거리는 될 거다.”

“와, 세심하시네요?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라도 울려봐라. 작전이고 뭐고 글러먹는 거야.”

“....”

잠깐 그 상황을 상상해보니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으아, 생각만 해도 쪽팔리네!’

생각해보라. 시체로 위장한 채 적들의 손에 옮겨지고 있는데 갑자기 뱃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린다면?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인생 최악의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새삼 강엽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낀 그녀는 조금씩 물과 육포를 우물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어디로 가는진 알아냈어요?”

“아직.”

정확한 목적지를 알아냈다면 이딴 미행은 집어치우고 장년인 일당을 잡아 족쳤겠지.

“그래도 멀진 않을 거야.”

장년인과 객잔 주인의 대화를 자세히 듣진 않았지만, 산길 어쩌고 하는 소리는 들은 것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홍가려를 들여다본 강엽이 한숨처럼 물었다.

“정말 이대로 갈 거냐?”

“예?”

“위험한 짓을 할 필요가 있냐고. 저놈들 족쳐서 소굴이 어딨는지 알아내는 방법도 있어.”

홍가려를 데리고 놈들의 소굴까지 갔을 때 무사히 지켜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었다.

만약 방비가 예상보다 철저하거나, 강엽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고수가 있다면 홍가려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당신이 죽으면 사원루주가 슬퍼할 텐데.”

“...알아요.”

강엽 이상으로 사원루주의 반대가 극심했다.

오죽하면 이대로 나갈 거면 자신과의 연을 끊고 나가라는 소리까지 했을까.

“하지만 이번엔 제가 나서야 해요. 나중엔 강 무사님도 동의하셨잖아요.”

“....”

강엽은 말없이 입만 다셨다.

홍가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놈들을 고문해서 소굴 위치를 알아내도 안쪽에 들어가는 건 다른 문제니까.’

방비가 생각보다 튼튼하다면 힘으로 뚫고 들어간다 해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놈들이 증거를 없애버릴 위험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것도 사실.

“저를 이용하면 저들의 안쪽까지 단번에 침투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을 괜히 했었지.”

강엽이 허탈하게 웃었다.

지나가는 말로 홍가려의 시체가 있다면 일이 쉬워지겠지만, 그런 방법을 쓸 수 없기에 적들을 잡아서 고문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설마 홍가려가 별 생각없이 중얼거린 말에서 단초를 얻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심장을 늦추는 약이 있을 줄도 몰랐고.’

약을 먹으면 일정 시간 동안 심박을 느슨하게 풀어 가사 상태로 인도하는 비약.

사원루를 찾아온 손님들이 선물이라면서 준 온갖 진귀한 물건 속에 그런 약도 있었던 것이다.

그때 홍가려가 툭 뱉듯 말했다.

“솔직히 무진장 빡쳤어요.”

평소 고아한 인상을 유지하기 위해 속된 말을 내뱉지 않는 홍가려였다.

하지만 이젠 과감없이 내뱉었다.

“그렇잖아요. 대공자 그 인간이 뭔데 저를 죽여달라고 해요? 지가 대상단 후계자면 다야? 돈 많으면 다른 사람 마음대로 죽여도 돼?”

말하다 보니 점점 깊은 빡침이 몰려오는지 홍가려는 얼굴까지 붉힌 채 치맛자락까지 움켜쥐었다.

흑접의 예고장을 받았을 때부터 쌓였던 울분이 한꺼번에 풀려나온 것이다.

“루주님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만 복수를 맡기고 싶진 않아요.”

비록 직접 복수하진 못해도 대공자를 몰락시킬 수만 있다면 위험을 마다치 않을 것이다.

절세가인이 품은 새파란 독기를 엿본 강엽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쓰게 웃기만 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홍가려가 말한 대로 그녀의 시신을 미끼 삼아 놈들의 심처 한복판에 들어가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녀가 죽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말이다.

“받아.”

“이게 뭔데요?”

그것은 청동으로 만든 길쭉한 원통이었다.

“수전(袖箭)이다.”

흑접주의 비고에 있던 암기 중 하나로, 쓸 만한 것들 중 몇 개를 챙겨서 집에 가져온 것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주는 거야. 생긴 건 그래도 어지간한 고수는 한 방에 격살시킬 거다.”

“엥? 이, 이렇게 작은 걸로요?”

“대신에 일회용이지만.”

위급한 순간에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암기였다. 수전을 챙긴 홍가려가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고마워요. 조심해서 쓸게요.”

고개를 주억인 강엽이 구석에 가서 철푸덕 앉았다.

홍가려가 눈을 껌뻑거렸다.

“...안 가세요?”

물론 홀로 우두커니 있는 것보단 강엽과 함께 있는 게 나을 것이다.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테니까.

강엽이 한숨을 쉬며 문을 가리켰다.

“그 점소이놈이 문을 잠가버려서.”

“....”

“물론 힘으로 열 순 있지만 들키겠지.”

“....”

그에게도 불가항력이었다.

* * *

다음날 아침에 날이 밝아올 무렵 장년인 일당은 관짝만 들고 산길을 올랐다.

장년인이 뒤를 돌아봤다.

“조심해라.”

“걱정 마십시오.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닌데요.”

어깨에 관짝을 짊어진 장년인의 부하들은 험산을 오르면서도 여유로웠다.

오히려 뒤에서 따라간 강엽이 더 긴장했다.

‘아혈이랑 마혈을 짚었으니 들키진 않겠지만....’

혹시나 홍가려가 놀라서 소리를 내거나 움직일까 봐 사전에 혈도를 짚긴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놈들이 실수해서 관짝이 천장단애 아래로 떨어지면 홍가려는 죽는 목숨이다.

그런 사태를 피하도록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는 되었지만, 그땐 미행 계획이 틀어지겠지.

목적지가 가까워지는 지금 그런 사고는 피해야 할 터.

다행히 장년인의 부하들은 지나치게 깊은 심산유곡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새벽 안개를 헤치고 들어간 곳에서 강엽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건...?’

산 중턱에 지어진 석조 건물.

그 앞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선두에서 걸어오는 장년인을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오랜만이오. 한데 저건...?”

“백공(白公) 어르신께서 구하라고 지시하신 물건이네.”

“음? 어떻게 구했소? 종 무인께선 흑접이 몰살당한 바람에 다른 살문을 알아보겠다고 하셨는데.”

“허어, 종 무인께서 오셨는가?”

“어르신과 함께 계시오.”

“그렇군. 물건을 구한 건 다름이 아니네. 흑접에서 살아남은 놈들 몇 명이 홍가 계집을 죽였거든. 억하심정도 있고, 돈도 급하니 그랬던 게지.”

“그래서 돈을 주셨소?”

“푼돈 주고 내쫓았네.”

장년인과 문지기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아무튼 물건을 가져왔으니 어르신을 뵙고 싶은데. 안에 기별해줄 수 있나?”

“잠깐만 기다리시오.”

문지기 중 한 명이 건물로 들어가더니 일 각쯤 지난 뒤에야 돌아와서 들어가도 된다고 말했다.

장년인의 부하들 뒤에 바짝 붙은 강엽은 그들과 함께 건물 깊숙한 곳에 있는 심처로 향했다.

그렇게 몇 명을 지나친 뒤에야 가장 깊숙한 심처로 향했을 때, 을씨년스러운 한기가 피부를 자극했다.

햇볕이 들이치지 않음으로 인해 생긴 한기가 아니다.

안쪽에 있는 수많은 시체들.

‘이놈들....’

그 시체들이 잘 만든 박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안쪽에서 백발의 괴인이 나왔다.

“홍가려의 시체를 구했다고?”

“그렇습니다, 어르신.”

장년인 일당이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기실 어르신이라 불린 괴인은 머리만 허옇게 샜을 뿐, 이목구비 자체는 젊은 편이었다. 다만 눈밑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데다 피부가 고목나무처럼 메마른 게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고수다.’

초음으로 살펴본 괴인의 단전엔 일 갑자를 훌쩍 넘는 내공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게다가 그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호오, 뜻밖의 낭보로구만. 안 그래도 어떤 살문에 의뢰를 맡겨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정갈한 회색장포를 입은 사내.

강엽은 직감적으로 그가 장년인과 문지기들이 말한 종 무인임을 알아차렸다. 그 역시 단전에 일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지닌 절정고수였다.

‘속전속결이 답이다.’

강엽이 움직이려는 그때였다.

백발의 괴인이 개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이게 뭔 냄새냐?”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저희 몸에서 나는 냄새인 것 같습니다.”

“뭐야? 너희 오다가 싸웠냐?”

“예?”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왜 피냄새가 나냐고.”

“...!”

장년인 일당은 물론 강엽도 깜짝 놀랐다.

계속 코를 킁킁거린 괴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다. 피냄새가 아니네. 냄새가 아니라... 기감이구만. 어딨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는 건 느껴져. 어디 숨은 쥐새끼지?”

“.......”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장년인 일당이 눈을 뒤루룩 굴리는 그때, 백발의 괴인이 한 곳을 노려봤다.

“관짝 열어봐. 거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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