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02화 (102/450)

16화. 미행 (2)

“.......”

호위와 시비를 물린 접객실.

암살을 사주한 흉수의 정체를 들은 홍가려와 사원루주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허옇게 굳어졌다.

“장안대상회의 대공자가 왜 그런 짓을....”

“이유는 모르겠군. 하지만 장부에 거짓말을 적어놓진 않았겠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사원루주가 하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저도 이 바닥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들은 게 있습니다. 살문 같은 곳에 암살을 의뢰하면 보통은 의뢰인의 정체를 감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기에 홍가려가 암살을 사주한 자의 정체를 알고 싶어할 때도 사원루주는 알아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두 여인의 눈길을 받은 강엽은 뜨거운 차를 호로록 마시며 잠시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의뢰인이 먼저 정체를 밝히진 않았을 것이오. 아마 흑접이 자체적으로 알아냈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흑룡교의 술법.”

흑접이 흑룡교의 후신임은 세간에도 파다하게 퍼진 만큼 두 여인은 바로 알아들었다.

“생포한 살수들의 말에 의하면 섭혼술로 의뢰인들의 정신을 쏙 빼놓은 다음에 의뢰인의 정체를 알아낸다는군.”

“혹시 나중에 의뢰인들을 협박할 목적으로...?”

“그런 것도 있지만, 보통은 역의뢰를 받기 위해서라고 했소.”

“역의뢰라고요?”

“암살 대상에게 의뢰 사실을 알려주고 의뢰인을 역으로 죽이는 식으로 말이지. 물론 모두에게 역제안을 한 것은 아니오.”

“돈 많은 거상들이나 권력자들에게만 그랬겠지요. 혹시 장부에 그들의 이름도 적혀 있었나요?”

“.......”

침묵이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사원루주는 강엽이 미처 말하지 않은 뒷말까지 헤아렸다.

“장부를 공개하진 못하겠군요.”

“낭인전은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소. 아미파나 금정표국도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고.”

이득은 없는데 위험성만 크다. 그런 이유로 세 단체는 장부를 숨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장부를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만큼 차후에 소문이 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때도 눈 가리고 아웅하겠지.’

치명적인 무기는 그것을 쓸 때보다 감추고 있을 때 큰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이걸로 그쪽 의뢰는 완수했다.”

건조하리만치 무감한 시선을 받은 홍가려는 입술을 꼬옥 깨문 채 치맛자락을 쥐었다.

“...고마워요.”

긴 침묵 끝에 쥐어짜낸 말.

잔뜩 억눌린 목소리에서 풀 길 없는 울분을 느낀 강엽은 소매에서 종이를 꺼냈다.

“복수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뜯어낸 흔적이 역력한 종이를 탁자에 올려놓자 홍가려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이게 뭐죠?”

“당신의 암살 의뢰서.”

“네에?”

생각도 못한 폭탄 선언에 깜짝 놀란 두 여인이 탁자 위의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거기엔 당신을 어떻게 죽일지, 죽인 뒤에 시신을 어디로 인계할지 적혀 있다.”

“...!”

“인계할 장소가 있다는 건 인계받을 사람도 있다는 거지. 십중팔구는 대공자의 끄나풀일 테고.”

“그럼...!”

강엽의 말뜻을 깨달은 두 여인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물론 증거를 찾는다고 대공자를 어떻게 하진 못할 거다. 장안대상회가 보호할 테니까. 하지만 사원루주가 도와준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강엽의 시선이 향하자 사원루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어떻게 말인가요?”

“알아보니 대공자의 밑엔 아우들이 있다던데. 그들과 다리를 놓아줄 수 있소?”

그 말에 사원루주도 강엽의 계획을 깨닫고 탄성했다.

“대공자의 아우들에게 칼날을 쥐어주실 생각이군요!”

“그러려면 그들과 만나야 하오.”

“...제 인맥을 동원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 의뢰서에 적힌 장소에 대공자의 부하들이 있을까요? 흑접이 망했다는 소식은 그들도 들었을 텐데.”

“재수 없으면 이미 떠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지 않소?”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증거를 찾는다면 서둘러야 하오. 시간이 지나면 대공자도 눈치챌 테니까.”

발뺌할 수 없는 증거가 경쟁자의 손에 들어가면 그건 대공자를 위협할 비수가 될 것이다.

“.......”

이야기가 순식간에 진행되자 홍가려는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암살을 사주한 흉수가 장안대상회의 대공자라는 말만 들었을 때만 해도 눈앞이 아득했었건만, 답이 술술 나오니 현실감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다만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그녀는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마워요.”

강엽이 없었다면 살아남는 것도, 암살을 사주한 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도 불가능했으리라.

눈시울이 붉어진 채 머리를 숙인 홍가려의 모습에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짜로 도와주는 건 아니야.”

“다, 당연히 의뢰비는 드려야죠.”

“아, 물론 의뢰비도 중요하긴 한데...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어서.”

의미심장한 말에 홍가려보다도 사원루주가 긴장했다.

‘설마 아니겠지?’

중경 제일의 미녀인 만큼 홍가려에게 구애하는 사내들은 널리고 널렸다. 강엽은 워낙 무뚝뚝해서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 아닌가?

걱정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는데, 강엽보단 오히려 홍가려가 상기된 기색이 역력했다.

“크흠흠! 뭐, 뭐죠?”

“그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 전에 말한 장안대상회의 경매장 초대장, 혹시 일회용인가?”

“그건 아닌데... 그걸 갖고 싶다고요?”

“궁금해서 말이야.”

대상단이 주관하는 경매장이라면 귀하고 특별한 귀물이 많이 나올 터. 운이 좋다면 흡혈귀의 약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귀물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설령 그런 걸 구하지 못해도, 귀한 영약을 구할 수 있다면 가볼 가치는 있지 않겠나.

강렬한 눈길을 받은 홍가려가 귀밑머리를 배배 꼬면서 새치름하게 말했다.

“뭐, 드릴게요. 저한테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이젠 그 초대장도 역겹게 여겨졌다. 암살을 사주한 대공자에게 받은 선물이 아닌가?

홍가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그 작자가 좀 이상한 말을 했었네요. 그땐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뭐라고 했길래?”

“경매장은 일부에 불과하고, 그 아래에 어마어마한 암시장이 있다고요. 상계와 관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무림인들도 정사마(正邪魔) 가릴 것 없이 온다던데요. 초대장을 갖고 오면 구경시켜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런 데 관심이 없었던 홍가려는 대리인을 보내서 영약만 좀 샀을 뿐이었다.

설명을 들은 강엽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암시장이라.”

음지의 암시장에선 어떤 물건이 사고 팔릴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시중에선 구할 수 없는 물건이 많을 것이다.

‘제대로 된 물건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홍가려의 말대로라면 경매장은 남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연막이고, 암시장이야말로 진짜였다.

“정사마의 무림인들이 모이면 싸움이 나진 않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했어요.”

강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암시장 측에서도 무림인들 간의 싸움으로 자기네 앞마당이 개판이 되는 사태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가볼 만한 가치는 있겠어.’

* * *

물안개가 자욱하게 낀 호수였다.

흑립과 검은 피풍의를 뒤집어쓴 남자가 호숫가에 지어진 목옥(木屋)에 다가갔다.

목옥 밖엔 방립을 쓴 장년인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정체불명의 남자가 다가오는데도 망부석처럼 낚싯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남자의 정체는 강엽이었다.

‘놀라지 않는군.’

짧은 순간 장년인의 눈이 허리춤에 패용한 검파를 훑고 지나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병장기를 지닌 무림인이 다가오는데 태평할 수가 없었다.

초음으로 장년인의 단전을 살펴보니 이십 년쯤 되는 공력이 들어차 있었다.

그의 옆에 온 강엽이 툭 내뱉었다.

“고기는 많이 잡히시오?”

“....”

장년인은 대답하지 않고 풀잎만 질겅거렸다. 강엽은 빈 망태기를 슬쩍 보고 입맛을 다셨다.

“한 마리도 못 잡으셨군. 온 김에 저녁이나 얻어먹을까 했는데 아쉽게 됐소.”

“객잔은 저쪽 마을에 있소만.”

사내가 턱짓으로 맞은편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자 강엽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야박하시군. 그쪽도 알다시피 우리 조직이 쫄딱 망해버리는 바람에 알거지가 됐소.”

“자꾸 영문 모를 말만 하는군. 조직?”

“재보는 건 관둡시다. 어차피 서로 누군지 빤히 아는데 시치미를 뗄 것 있소?”

“....”

“우리 조직이 쫄딱 망하긴 했지만, 나를 포함해서 몇 명은 운 좋게 도망쳤소. 근데 도망친 것까진 좋은데 억울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애초에 우리 조직이 망한 건 당신네가 홍가 계집을 죽여달라고 사주했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복수하겠다는 건가?”

장년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자 강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의뢰인한테 복수해서 뭘 하겠소. 대신 그쪽이 원한 대로 홍가 계집을 죽였소.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게.”

“으음!”

나직이 침음한 장년인이 강엽의 뒤편을 돌아보았다.

물론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시신은 내 동료들이 지키고 있소. 우리도 그쪽이 접선책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나만 온 거요.”

“홍가려는 아미파에 갔다고 들었는데.”

“며칠 전에 중경에 돌아왔소. 이젠 자기가 안전해졌다고 생각했는지 호위도 느슨해졌더군.”

“그래서 몰래 납치해서 죽였다?”

“그렇소.”

“뭘 원하나?”

“살수가 뭘 원하겠소. 당연히 돈이지.”

장년인은 납득했다. 흑접이 갑자기 멸문했으니 재물을 챙길 틈새도 없었을 것이다.

“시신이 썩진 않았겠지?”

“안 썩었소.”

“...좋아. 여기로 곧장 가져오면 된다.”

* * *

곧이어 강엽과 같은 차림새를 한 흑접의 살수들이 관짝을 싣은 달구지를 몰고 왔다.

당연히 그들의 정체는 살수 따위가 아니었다. 살수로 위장한 사원루의 보표들이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땐 장년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내들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확인해봐라.”

장년인의 말에 사내가 나와서 관짝을 열었다. 그러자 잠든 것처럼 죽은 홍가려의 시신이 나타났다.

수중에 든 용모파기와 대조해본 사내가 턱을 위아래로 움직이자 장년인이 흡족하게 웃었다.

“정말로 홍가려를 죽였군. 몇 번이나 일을 그르쳐서 영영 실패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원래 방심이 화를 부르는 것 아니겠소. 대금이나 잘 쳐주시오.”

장년인이 가죽 전낭을 휙 던졌다. 강엽이 전낭을 낚아챈 끈을 풀고 열어보자 금전과 은전이 들어 있었다.

상당한 재물이었지만 강엽은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마뜩찮은 티를 냈다.

“이게 전부요?”

“모르나 본데 우린 이미 의뢰비를 지급했다. 네놈들이 멍청하게 본거지를 빼앗겨서 날려먹은 거지. 그거라도 건진 걸 다행으로 여겨라.”

“빌어먹을, 우리가 이거 받자고...!”

채채채채챙!

강엽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과 동시에 장년인의 부하들이 병장기를 빼들어 살수들에게 겨누었다.

그러자 살수들, 아니, 사원루의 보표들 역시 엉겁결에 검을 뽑아들어 살벌한 기세를 내뿜었다.

“선택해라. 그 돈을 받고 얌전히 꺼질지, 아니면 지금 여기서 우리와 드잡이질을 벌일지.”

“....”

장년인을 노려본 강엽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분노로 치를 떠는 것 같았다.

“...물러난다!”

사원루의 보표들이 당황해서 강엽을 돌아봤다. 하지만 무언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터뜨렸다.

보표들이 물러난 공간을 장년인의 부하들이 차지했다. 관짝을 내리는 대신 그대로 달구지에 오르는 모습에 강엽이 눈을 얇게 떴다.

‘어디로 옮기려는 거지?’

그들이 멀리 사라지자 보표대주가 급히 물었다.

“이제 어쩝니까?”

“놈들을 따라가겠소.”

“...홍 소저를 부탁드립니다.”

관짝에 있는 시신은 홍가려 본인이 맞았다. 정확히는 약을 먹고 가사 상태에 빠진 상태였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접선책을 만나면 바로 붙잡아서 고문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을 들은 홍가려가 그걸로 되겠냐며 꾀를 보탠 것이다.

굉장히 무모해서 강엽도 반대했는데, 그녀는 기어이 고집을 관철시켰다.

‘뭐, 성공만 하면 가장 효과적이긴 한데....’

강엽이 떨떠름하게 볼을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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