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00화 (100/450)

15화. 막간 (2)

기억 속의 고향은 언제나 어둡고 더러웠다.

늙고 병든 창기들은 푼돈을 받고 몸을 팔았고, 그렇게 모은 돈조차 포주에게 갈취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뒷골목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은 창기들이 아니라, 그녀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도,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주린 배를 움켜잡고 구걸에 의존해서 살아갔다.

한 끼라도 먹을 수 있으면 만족했고, 어른들한테 맞지만 않으면 운이 좋다고 생각했던 시절.

그 아이들은 커서 흑도 방파의 건달패가 되거나 기녀가 되어서 부모의 전철을 답습했다.

“.......”

성도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들이 거하는 뒷골목에 발을 들인 백서희는 걸음을 멈추었다.

‘인제 와서 돌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흑접의 명령으로 성도에 온 적은 많았지만, 옛날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인생에 커다란 질곡을 겪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마음 한 켠에선 고향이 어찌 변했는지 궁금했던 건지.

그녀 자신도 정답을 알지 못했지만 이번만은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걸었다.

“음, 달라진 건 별로 없네.”

어린 시절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거지들과 앵속쟁이들, 흑도 건달패들의 소굴.

들어오자마자 쓰레기와 악취가 가득한 뒷골목에서 시체를 발견한 그녀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한낮에도 살인과 강도 등이 버젓이 벌어지는 무법지대가 이곳 성도의 뒷골목이었다.

‘근데 길은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예전엔 개미굴 같은 뒷골목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다 커서 와보니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렸다.

길을 모를 땐 현지인을 찾아가는 수밖에.

“뭐요? 햇볕 가리지 말고 비키슈.”

다리 밑에 움막을 짓고 사는 거지들.

한가롭게 풀잎을 질겅질겅 씹고 있던 중년 거지는 백서희가 햇볕을 가리자 인상을 썼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몸과 떡진 머리에선 토할 만큼 악취가 풍겼지만, 백서희는 참고 물었다.

“개방이지?”

허리춤에 매달린 매듭.

각 지역에 상주하는 개방의 분타주들은 대개 세 번 꼬인 삼결(三結)을 가졌는데, 중년 거지의 허리춤에 매달린 매듭은 네 번 꼬인 사결이었다.

온갖 세력이 군웅할거하는 사천 무림, 그 중심인 성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사결제자를 배치한 것.

백서희가 다가오자 주변에 있던 거지들이 반쯤 몸을 일으킨 채 그녀를 힐끔거렸다.

피풍의와 죽립을 썼기에 용모는 알아볼 수 없지만, 꽤나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당신이 성도 분타주인 장한개(壯悍丐)?”

“그런데?”

아니꼬운 눈으로 백서희를 올려다본 장한개가 고개를 모로 꼬면서 사타구니를 긁적였다.

모욕적인 행동이었지만 백서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길안내를 의뢰하고 싶어. 당신이 부리는 거지를 한 명 데려가고 싶은데.”

“일없수. 그런 일이라면 낭인전에나 가쇼.”

“태평가(太平街)에 갈 거야.”

“....”

장한개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아무 근심이 없다는 의미와 달리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뒷골목에 들어가겠다니.

성도의 낭인들도 어지간하면 접근하지 않는 곳을 들어가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젊은 처자가 갈 곳이 아닌데. 신세 조지고 싶지 않으면 얼씬도 하지 마쇼.”

“열두 살까진 거기서 살았어.”

“...허, 알고 보니 동향이셨구만?”

“동향? 당신도 태평가 출신이야?”

“뭐, 그렇수다. 이 나이 먹도록 여길 나가지 못한 게 참 뭣 같지만. 근데 저 동네가 그리워서 돌아올 만큼 좋은 곳은 아닌데 왜 온 거요? 길잡이는 왜 찾고?”

“떠나기 전에 꽃 한 송이라도 드릴까 해서.”

“음?”

“...오랜만에 오니 어떻게 가야 할지 헷갈려서 길안내를 찾는 거야. 아무튼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어디로 가길래? 댁도 알겠지만 그짝은 개미굴처럼 얽혀 있어서 오래 산 사람도 헤매기 십상이오. 목적지를 알지 못하면 데려다줄 수 없수다.”

“파발(巴醱)이라고 알아?”

“...옛날에 태평가 동쪽의 포주였지.”

“그놈 구역으로 안내해 줘.”

거기까지만 가면 나머지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의존해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평가가 워낙 위험해서 돈 좀 많이 받아야 쓰겠는데. 호위도 있어야 할 테고.”

은전 한 냥이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그래도 장한개가 퉁명스럽게 바라보자 백서희는 떨떠름한 얼굴로 한 냥을 더 꺼냈다.

“에이, 어떻게 겨우 두 냥으로 저 위험한 동네에 들어가나? 적어도 넉 냥은 주셔야지.”

“호위는 필요없어.”

흑접이 망한 지 어느덧 보름이다. 그동안 꾸준히 요상약을 먹고 운기조식을 한 덕에 강엽과의 싸움으로 인한 부상은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부러졌던 오른팔도 이젠 멀쩡히 움직이는 만큼 특기인 쌍검술을 온전히 펼칠 수 있었다.

게다가 흑접에서 챙겨온 은혼사까지.

“당신 부하도 지켜줄 테니 길잡이만 내달라고. 그럼 두 냥으로 충분하잖아?”

“...킁, 허언 같지는 않구만.”

피풍의 안쪽에서 검파를 발견한 장한개가 코를 쓱 닦으면서 고개를 돌리면서 청년을 지목했다.

매듭 하나 달린 일결개였다.

“거기 너.”

“네? 저요?”

“그래, 이 자식아. 네가 길잡이를 맡아. 너도 그쪽에서 나고 자란 놈이잖냐?”

“으엑, 봐주십쇼. 게다가 파발 쪽이라면 좀....”

장한개가 눈알을 부라리자 청년은 입을 한 됫박이나 내밀고 구시렁거렸다.

다른 거지들이 자기가 걸리지 않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은빛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어랍쇼?”

반사적으로 은빛을 잡아챈 청년이 손바닥을 피자 절반으로 나뉜 은전이 있었다.

“수고비야. 그 정도면 충분하지?”

“추, 충분하고 말고요.”

은전 반 냥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한번 들락거리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웬만큼 질이 나쁜 건달패도 개방 거지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기도 하고 말이다.

죽립을 살짝 들어올린 백서희가 작게 웃었다.

“그럼 부탁해.”

“...!”

화용월태의 용모에 넋을 잃은 청년은 장한개의 호통을 듣고서야 정신 차렸다.

“이 자식아, 얼른 안 가!?”

“가, 갑니다! 이쪽으로 오십쇼!”

* * *

“좀 있으면 중양절(重陽節)이더라고요. 그래서 국화주를 드릴까 했는데, 엄마는 꽃을 좋아했잖아요. 술보다는 꽃을 더 좋아하실 것 같아서 오는 길에 구했어요.”

그늘진 구석에 내려놓은 국화꽃.

잠시 찬바람이 들이쳤지만, 입구를 막아둔 덕에 꽃이 날아가는 일 따위는 없었다.

“십 년이 넘게 지났는데 여긴 변한 게 없네요. 하긴 옛날부터 그런 동네였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워낙 어렸을 적에 헤어진 탓도 있지만 애초에 좋은 추억이 별로 없기도 했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사내와 몸을 섞든지, 술에 취해 세상을 원망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가끔은 백서희만 없었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라면서 해선 안 될 말까지 내뱉었다.

“그래서 전 엄마가 싫었어요.”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다. 상대를 미워하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애증의 관계.

“뭐, 생각해보니 나쁜 추억만 있진 않았네요.”

몸을 망쳐가며 모은 푼돈마저 술값으로 날린 어머니였지만, 백서희가 태어난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초라하게나마 딸의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딸의 머리에 이름 모를 들꽃을 꽂아주며 말이다.

“엄마가 목숨 바쳐 절 구해주지 않았다면 전 몸이나 파는 년이 되었겠죠. 뭐, 결과적으로는 손에 피를 묻히는 년이 되었지만.”

과연 뭐가 더 나쁜 인생일까?

자조적으로 키득거린 그녀는 한때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천막을 둘러보며 작게 속삭였다.

“여기 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그 대신....”

뒷말은 속마음으로만 전했다.

밖으로 나오자 쪼그려 앉아 있던 여인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일어섰다.

서른 안팎의 여인의 눈에 담긴 간절함을 엿본 백서희는 한숨을 쉬며 은전을 꺼냈다.

“약속했던 돈이에요.”

“고, 고맙습니다.”

“혹시 아이가 있어요?”

“...아뇨, 왜요?”

거적때기 안에서 어린 아이의 옷을 봤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억지로 삼켰다. 괜히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들쑤실 필요는 없을 테니까.

“으음, 아니에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한때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판잣집은 이 여인의 집이었다. 빈민굴에선 흔한 일이었다. 이 여인이 죽는다면 또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리라.

여인을 뒤로하고 나오자 골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개방도가 반색했다.

“이제 돌아가는 겁니까?”

“아직. 파발이 살아있다고 했지?”

“예? 아, 넵. 지금은 태평가 절반을 지배하는 흑골방(黑骨幇)의 방주가 되었습죠.”

“하, 포주 새끼가 출세했네. 기녀들이나 등쳐먹던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물론 예전에도 삼류 방파의 두령 노릇을 했었지만 이젠 규모가 달라졌다. 백 명이 훌쩍 넘는 방도를 거느리는 방주가 된 것이다.

“안내해.”

“거, 거긴 왜요?”

백서희가 싸늘하게 웃었다.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야.”

어머니를 착취하고, 자신을 기루에 팔려고 했던 포주가 칼침을 맞고도 살아 있다.

‘그렇구나.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이 순간, 그녀는 금정표국의 국주인 남인옥이 이호에게 품었던 증오를 이해할 수 있었다.

* * *

“크허억!”

우당탕탕 넘어지는 소리와 비명이 울려 퍼진다.

뒤룩뒤룩 살찐 몸을 가릴 생각도 못한 초로인은 주저앉은 채 덜덜 떨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흑골방을 피로 물들인 여인.

그가 돈을 갚지 못해 팔려온 여인을 덮치고 있었을 때 갑자기 방문을 열고 나타나더니, 미친년처럼 웃으면서 검극을 날려왔다.

‘호위 녀석들은 뭘 하는 거냐!’

분통을 터뜨린 것은 잠시였다.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했으니까.

그러나 늙고 둔해진 몸으로는 여인의 일초도 감당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서늘한 예기를 내뿜는 검극이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러면 소란을 들은 방도들이 몰려올 터.

하지만 침입자는 속지 않았다.

“기다려도 부하들은 오지 않을걸.”

“뭐, 뭣?”

“방해받기 싫어서 말이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혈(睡穴)을 짚어서 잠재웠거든.”

“...!”

“아, 밖에 있는 녀석들은 제법 기강이 잘 잡혀 있더라고. 걔네들은 어쩔 수 없이 다 죽였어.”

안 그래도 자욱한 피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있었는데 그게 호위들의 피냄새였다니.

저간의 사정을 깨달은 파발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짓씹듯 내뱉었다.

“으득, 누가 보낸 거냐? 서룡회(西龍會)인가? 그놈들이 날 죽이라고 사주했냔 말이다!”

서룡회는 흑골방과 함께 태평가를 갈라먹은 흑도 방파로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는 원수였다.

백서희가 피식 웃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런지 못 알아보네. 아참, 그쪽은 가만히 있어. 당신한텐 볼일 없으니까.”

방 한 구석에서 숨 죽이고 있는 알몸의 여인이 울먹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파발에게 고개를 돌린 백서희가 싸늘한 눈빛을 뿌렸다.

“칼침 맞고 뒈진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 있었어. 알았다면 진작 찾아왔을 텐데 말이야.”

“뭐라고?”

“아직도 기억이 안 나? 우리 엄마한테 칼침 맞고 저승 구경 했으면서.”

“...설마!”

그 말을 듣고서야 십수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 파발이 경악성을 토했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날 도망쳤던 소녀의 얼굴과 눈앞의 여인이 겹치면서 깨달음이 찾아온다.

“우리 엄마 이름은 기억해?”

“...그, 그래. 기억한다.”

지금은 먼 옛날의 일이지만, 당시엔 사경을 헤매면서도 부하들을 시켜 백서희를 쫓았다.

어떻게든 백서희를 잡아 자신을 죽일 뻔한 계집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때 죽었다면 나도 잊었겠지. 근데 우리 엄마가 못했던 일은 끝내야 하지 않겠어?”

“잠깐! 오해다! 그때 일은 사고였어!”

“사고는 개뿔.”

“나, 날 죽여도 네 어미가 살아돌아오는 건 아니잖느냐. 응? 제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이대로 죽어줄 수는 없다. 파발은 육중한 몸으로 손을 가리며 침상 아래에서 칼을 잡았다.

살수가 찾아오거나 부하들이 배신할 것을 대비해서 방 곳곳에 병장기를 숨겨둔 것이다.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촤악!

“크아악!”

경력이 실린 검격이 팔뚝 아래를 뚝 잘라버리면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한쪽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여인은 끔찍한 광경을 버티지 못하고 까무라쳤다.

핏발이 솟은 눈으로 백서희를 노려본 파발이 증오를 담아 외쳤다.

“나, 날 죽여도 변하는 건 없다. 내가 죽어도 누군가는 이 자리를 차지해서 똑같이 할 거란 말이다!”

“알고 있어.”

쓰레기를 치워봤자 또 다른 쓰레기가 그 자리를 차지해서 똑같은 짓을 자행하겠지.

하지만 파발을 내려다보는 백서희의 눈은 냉담했다.

“근데 그게 당신을 죽이지 않을 이유는 못 되잖아?”

“...!”

시리도록 하얀 섬광이 파발의 시야를 가르는 것과 동시에 돼지처럼 살찐 목에 붉은 혈선이 나타난다. 비스듬히 갈라진 목이 미끄러지며 머리가 떨어졌다.

백서희는 눈을 화등잔 만하게 뜨고 죽은 원수의 머리를 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성도에 오길 잘했네.”

협의나 정의감으로 파발을 처단한 건 아니다. 어머니가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지었을 뿐.

정신을 잃은 여인을 수습한 백서희는 원수의 시체를 흘깃 곁눈질하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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