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98화 (98/450)

14화. 멸문 (13)

“허참, 이게 다 얼마래냐?”

비고에 들어온 하후진이 입을 허 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은원보와 금원보 등이 가득한 나무상자가 수십 개씩 쌓여 탑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한쪽엔 금강석이나 야명주 등 보옥들과 값비싼 골동품들이 쌓여 있었다.

“이걸 죄다 돈으로 바꾸면... 못해도 수백만 냥은 될 것 같은데. 대대손손 놀고 먹어도 되겠구만.”

표사들과 낭인들의 눈에 탐욕이 어리자 소창후와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합장하며 염불을 외웠다.

“흑접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목숨값입니다.”

“크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구파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도둑질을 할 만큼 간덩이가 부은 사람은 없었다.

남인옥과 낭인전에서 나온 두 은천패급 고수들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소창후, 아니, 혜심 스님의 말씀이 맞소. 다들 진정합시다.”

남인옥이 엄중한 경고를 하자 다들 헛기침을 한다.

낭인들은 그렇다 치고 표사들까지 국주의 경고를 받고도 욕심을 부릴 순 없었다.

물론 남인옥이 욕심이 없어 소창후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욕심을 부리진 않겠지만, 우리 표사들의 목숨값은 받겠소. 아미파에서도 그것까지 막진 않으실 거라 생각하오.”

“....”

그 말에 소창후의 눈가에 난감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배분이 높은 혜정 사태뿐.

그녀가 빈사지경에 처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함부로 가부를 말할 수는 없었다.

남인옥이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논공행상의 지분을 주장하겠다는 뜻이었다.

흑접과 싸울 때는 등을 맡겨도, 전리품을 분배할 때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다.

“금정표국의 공로는 인정하오. 하나 흑접의 한 자릿수를 가장 죽인 곳은 우리 낭인전이외다.”

창비도 이후명과 소살관철 진린이 사호와 육호를 죽였고, 다른 은패급 낭인들의 공로도 적지 않다.

“의뢰를 받고 산적 소굴을 토벌하면 산적놈들이 꿍쳐둔 재물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소. 그럼 공로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낭인전의 관례요.”

“전문용어로는 가외수입이라고들 하지.”

이후명이 설명하고 진린이 뒷말을 덧붙였다.

대충 전리품의 값어치를 백만 냥이라고 가정해도 삼분의 일로 나누면 삼십만 냥에 달한다.

그걸 다시 공로에 따라 나누면 한 사람당 수중에 만 냥 이상은 떨어지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게 따지면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은....”

좌중의 시선이 한쪽에 우두커니 선 강엽을 향했다.

흑접의 상위 서열들을 가장 많이 죽였을 뿐만 아니라, 흑접의 총단을 찾아내고, 흑접주까지 죽였다.

단언컨대 여기 있는 사람들의 공로를 다 합쳐도 강엽이 세운 공로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뭇 좌중의 시선을 받은 강엽은 주변을 쭉 둘러본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로를 기준으로 분배한다면 내가 삼 할은 가져갈 수 있겠지.”

“음, 그건 너무 많은 게....”

어마어마한 수치에 누군가가 중얼거렸지만, 강엽이 지그시 노려보자 합죽이가 되었다.

“내 권리는 포기하겠소.”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진심이오? 삼 할만 해도 수십만 냥은 될 것이오.”

백만 냥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가격이 나가는 골동품도 많으니 실제로는 그 이상일 터.

한데 삼 할이나 얻을 권리를 포기하겠다니.

물론 강엽이 무골호인이라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다.

“대신 다른 걸 가져가고 싶소.”

“무엇이오?”

남인옥이 물었다.

“내가 원하는 건 두 가지요. 하나는 흑접의 비급들을 가져가는 것.”

“그건...!”

소창후가 눈을 부릅떴지만 강엽은 항변할 틈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살수들의 무공이긴 해도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암기술도 꽤 쓸 만하고.”

다들 금은보화에 정신이 팔리긴 했지만 비고 옆엔 흑접의 무고가 딸려 있었다.

“그리고 아미파와 금정표국에서 내가 흑접주를 죽였음을 공언해주었으면 하오.”

“공언이라... 단순히 소문을 내달라는 말씀은 아닌 것 같소만.”

“무림맹이 흑접주의 목에 무지막지한 현상금을 걸었다지? 근데 흑접주의 시신이 없지 않소.”

사실 흑접주의 시신이 남아 있어도 용모파기가 없기 때문에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다.

토벌대가 보는 앞에서 흑접주와 싸웠다면 모를까.

‘뭐, 그건 불가능한 얘기니까.’

아미파와 금정표국이 공언한다면 달라진다.

시신이 없어도 무림맹을 설득하여 흑접주를 죽인 게 자신임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즉, 강엽은 눈앞의 재물을 포기하는 대신 무고를 처분할 권리를 독점하고, 흑접주를 죽인 것을 증명하여 현상금을 타먹으려는 것이다.

‘이러면 나중에 자성검법을 선보여도 출처를 의심받지 않을 수 있다.’

대충 흑접의 무고에서 비급을 주웠다는 식으로 둘러댈 수 있을 테니까.

“금정표국은 받아들이겠소.”

황인검과 의견을 나눈 남인옥은 흔쾌히 수락했다.

무고의 비급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깝긴 하나, 그것들을 처분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한 비급도 아닌데 이런 걸로 드잡이질을 하느니, 차라리 시원하게 쾌척하고 재물을 양도받는 게 낫지 않겠는가.

낭인전 성도 분타의 은천패급 낭인들도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받아들이겠네. 필요하다면 자네가 흑접주를 죽였다는 증언도 해주지.”

아미파나 금정표국에 비하진 못해도 없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아미파는 어떻소?”

“...지금 대답을 드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답할 문제는 아니다. 혜정 사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는.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본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혜정 사태는 자신이 없는 동안 일어난 일을 듣고 당혹감을 금치 못했지만, 대세를 거스르진 못했다.

그녀가 아미파의 일대제자이자 명성높은 검호라도 피를 흘리며 싸운 사람들의 의견을 묵살할 수는 없는 노릇.

금정표국이 주변 마을에서 달구지 등을 싹 쓸어와서 재물을 싣는 동안, 그녀를 비롯한 아미파의 비구니들은 흑접의 무고를 면밀히 살펴봤다.

물론 강엽도 함께였다.

“흑룡교의 비급을 빼면 오십삼 권....”

흑접의 비고에도 흑룡교의 마공서가 몇 권 있긴 했다. 그리고 장로의 거처에서 찾은 술법서까지.

나머지는 약속대로 강엽의 차지가 되었다.

“자성검호의 비급도 여기 있을 줄은 몰랐군요.”

강엽이 슬그머니 자성검보를 무고 안에 넣은 다음 우연히 발견한 척한 것이다.

“강 시주께선 자성검법을 익히실 생각입니까?”

“도전은 해볼 생각입니다. 자성검호쯤 되는 초고수의 무공이 사장되는 건 아깝지 않습니까?”

“자성검호의 무맥이 복원되어 후세에 전해진다면 사천 무림의 홍복이겠지요. 하나 명맥이 끊긴 무공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 혹시 빈니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본산으로 찾아오십시오.”

“그러겠습니다.”

혜정 사태는 난풍혜검이라는 별호를 얻은 검호.

비록 결이 다르다 하나 그녀의 조언을 받아먹을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바로 아미파로 돌아가실 겁니까?”

“예, 빈니들이 할 일은 끝났으니... 다친 제자들만 치료하면 돌아가야지요.”

천만다행으로 아미파의 제자들은 죽지 않았지만 젊은 제자들 두 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이번 일에 도움을 주신 건 잊지 않겠습니다.”

“천만의 말씀. 오히려 빈니들이 감사를 드려야지요. 강 시주께서 애써주신 덕분에 사천의 민생을 어지럽힌 우환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물론 흑접이 없어졌다고 사천 무림의 살문들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리라.

호랑이가 없는 산에선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는 말처럼 다른 누군가가 흑접의 자리를 노릴 테니까.

열 길 물속처럼 깊은 눈으로 강엽을 바라보던 혜정 사태가 불현듯 물었다.

“강 시주께선 사마외도를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질문이 좀 갑작스럽군요.”

“흑룡교가 멸문하고 반백 년이 지났는데도 이 땅엔 아직도 많은 사마외도가 있습니다. 수없이 발본색원하여 뿌리를 뽑는데도 계속 나타나고 있지요. 본산을 비롯한 백도 정파가 누대에 걸쳐 사마외도와 싸웠지만, 진정으로 그들을 몰아낸 적은 없습니다.”

사마외도는 그림자 같아서, 무림이 존재하는 한 박멸할 순 없다.

“마는 마음에 기생하는 벌레 같은 것. 인륜을 저버리면서까지 힘을 갈망하는 그 벌레가, 결국 마가 되어 그 사람을 삼켜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

“강 시주께서는....”

“사태.”

일방적으로 말을 끊는 무례함에도 혜정 사태는 화를 내는 대신 강엽을 지그시 바라볼 뿐.

“사태의 말씀대로라면 누구나 마음에 마를 품고 있을 겁니다. 그 마가 알을 까지 못하고 죽을지, 성충이 될지는 그 사람에게 달린 일이겠지요.”

심상세계의 진조나 흑룡교의 잔당, 어디 처박혀 있는지 모를 모산혈조는 진정한 적이 아니다.

흡혈욕에 삼켜져 미쳐 날뛰는 흡혈귀의 본성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었다.

‘사람의 피를 마셔야 한다면 나와 같은 사마외도의 피를 마셔야 한다.’

마가 사람의 마음에 깃드는 벌레라면, 해충을 잡아먹는 익충(益蟲)이 되어야 할 터.

그 속마음은 바깥에 내뱉는 일 없이 내면에서만 맴돌았지만, 혜정 사태와 조금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소창후는 침묵 속에 숨겨진 결기를 느끼고 당혹스러워했다.

“...빈니가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렸군요.”

만면에 씁쓸한 기색을 머금은 혜정 사태가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여온다.

“....”

강엽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기왕이면 영원히 숨기는 게 가장 좋겠지만, 언젠가는 들킬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염두에 두었다.

사특한 기운에 민감한 구파의 무인들과 함께 싸우면서 기질을 완벽하게 숨기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

아마 자성검호의 무공을 복원하는 일이 벽에 막히면 찾아오라고 한 것은, 훗날 강엽을 다시 한번 면밀히 살펴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아직까진 추측만 하는 단계인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명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사공을 익혔다고 추측만 하는 것과 흡혈귀라는 사실이 탄로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죽어도 싼 놈들만 골라서 피를 마신다고 해도, 사실이 밝혀지면 공적 신세를 면치 못할 터였다.

그렇게 혜정 사태는 다시 한번 합장하며 돌아갔다.

“같이 안 가시오?”

아직도 자릴 지키는 소창후에게 시큰둥하게 묻자 그녀가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모산파에 대해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확실한 것을 말씀드릴 순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고맙다고 해야겠군. 그것까지 말했다면 좀 더 곤경에 처했을 텐데.”

“결례가 안 된다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원수요.”

백마디 말보다 강한 감정이 함축된 한마디였다.

“솔직히 지금도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소. 마지막으로 봤을 땐 빈사지경이었거든. 하지만 보통 미친 늙은이가 아니니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았겠지.”

“그럼 그자를 마지막으로 보신 건....”

“몇 달 전이오. 지금은 다른 데로 떠났을 거요.”

근거지가 철저히 파괴되었으니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살아있다면 다른 곳에 둥지를 틀었으리라.

‘혈교.’

만약 모산혈조가 일신의 안위를 위해 피신했다면 혈교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살아있다면 다시 만나겠지.”

흡혈귀의 영성이 속삭인다.

그 간악한 노마두는 죽지 않았으니 다시 만날 날을 대비해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엽이 몸을 돌리자 마침 불어온 밤바람이 긴 머리카락과 흑포 자락을 나부낀다.

승복을 여민 소창후가 고개를 들었을 때, 강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 * *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끼아아아아악!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망자들이 내지르는 귀곡성이 천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두려움에 찬 비명도 간헐적으로 들렸다.

“사, 살려주십... 카악!”

한 사람의 생명을 거둔 소도가 심장을 빠져나온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가 둥글게 파인 홈을 따라서 경사진 바닥 중앙의 제단으로 모인다.

바깥에선 핏빛의 법복을 입은 술사들이 얼굴 가득 비지땀을 흘리며 진언을 외우고 있었다.

제단 위에 있는 것은 가부좌를 튼 사내.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눈썹을 구부렸다.

쩌적...!

균열이 간 살거죽이 떨어지면서 새빨간 근육이 드러났지만 사내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마뜩찮은 듯 혀를 차는 소리만 낼 뿐.

“쯧, 또 실패인가....”

“소, 송구합니다!”

술사들이 진언을 외우다 말고 엎드리자 사내가 손을 내저었다. 하얀 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도 거미줄처럼 균열이 나면서 피와 진물이 배어나왔다.

“그나저나 손님이 온 것 같구나.”

사내의 시선이 향한 위쪽.

하얀 가면을 쓴 장신의 흑포 사내가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 있었다.

“마의(魔醫).”

[흐음.]

기이한 울림을 내뱉은 가면이 모로 기울어졌다.

사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크큭, 내가 어찌 살아있는지 궁금한가?”

[젊어진 건 아닌 것 같고... 다른 사람의 몸을 빼앗은 것 같군. 이혼대법(移魂大法)인가?]

“...그걸 한눈에 보고 아나?”

[술법진을 보니 그쪽이다 싶어서.]

“하긴 자네도 불로불사에 대해 많이 연구했지. 나와는 방향이 다르지만 말이야. 자넨 좀 성과가 있나?”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괜찮은 실험체도 찾았고.]

“호오, 누군지 물어봐도 되겠나?”

[흑룡교주의 시체다.]

“그건... 정말로 놀랍군. 시체가 남아 있었나? 염왕의 손에 작살난 줄 알았는데.”

[전대 흑룡교주다. 백이십 년 전에 죽었지. 시체를 잘 보존했는지 목내이가 되어 있더군.]

“목내이라....”

조용히 뇌까리는 사내의 눈에 살심이 스쳐지나갔다.

[원한이 느껴지는군.]

“갚아줘야 할 놈이 있거든.”

[하지만 그 몸은 불안정해 보이는데. 그 몸으로 밖으로 나갈 수나 있나?]

“그게 문제지.”

사내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마의라 불린 사내의 손에 든 물건을 보자 시퍼런 한광을 발했다.

“하지만 자네가 갖고 온 인면교룡(人面蛟龍)의 내단이 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줄 걸세.”

[그러기를 빌지.]

마의가 보자기를 휙 던지자 근처에 있던 술사가 허둥지둥 받았다.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어허, 귀한 물건을...!”

[볼일은 봤으니 난 돌아가겠다.]

무심하게 몸을 돌린 마의를 향해 사내가 혀를 찼다.

“내 대법이 궁금하진 않나?”

[나도 바쁜 몸이라서.]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한 점으로 사라진 마의였다.

술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혈조시여, 저자는....”

“망집에 사로잡힌 귀신이지.”

사내가 균열이 난 몸을 내려다보며 광기에 찬 웃음을 흘렸다.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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