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멸문 (12)
흑접주의 비고는 크게 넷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금은보화를 보관하는 금고였다. 아마 비상시를 대비한 비자금을 보관해둔 것 같았다.
은전은 하나도 없고 죄다 금원보나 보석, 이름난 전장들의 고액 전표들이었다.
그다음은 병기고였는데, 병장기에 문외한인 강엽이 봐도 훌륭한 품질을 자랑했다.
다만 자성검 같은 신병이기와 비할 바는 못 되기에 욕심이 생기진 않았다.
영약 창고는 요상약 등을 제외하면 탈탈 털렸기에 한 번 둘러보고 끝이었다.
‘그나마 쓸 만한 건 서고인가.’
흑룡교의 마공서와 술법서뿐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마공 비급들도 비치되어 있었다.
마공에 한정해서이긴 하지만 청송객잔에 있는 동패무고를 능가하는 규모.
어쩌면 성도 분타에 있다는 은패무고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대충 눈에 띄는 한 권을 뽑아서 읽어보니 마공답게 상리에 어긋나는 수련법을 제시했다.
어린 동남동녀를 희생시켜야만 연마할 수 있다거나, 수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거나....
‘혈공진기도 똑같긴 하지.’
혀 안쪽에 쓴맛이 감돌았지만, 강엽은 금세 잡념을 털어내고 술법서를 꺼내들었다,
훗날 흑무암쇄진을 얻는다고 해도 흑룡교의 술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뿐.
흑무암쇄진이 구천호법 같은 고위 인사들만 썼던 최상급의 술법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같은 계통의 술법부터 익히는 건 당연한 일.
강엽에게는 흑접주의 비자금보다도 더 귀한 보물인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것들을 버릴 필요는 없겠지만.’
다만 지금 가져가면 출처를 의심받을 터.
비고 안쪽의 옷장에서 검은 장포를 챙긴 강엽은 대충 그걸로 갈아입고 자성검보만 갈무리했다.
나머지는 나중에 다시 와서 가져갈 수밖에.
‘그리고 이쪽은....’
흑접주가 썼던 책상.
그 위에 있는 것은 흑접주의 일기와 사천과 귀주, 섬서 남부 등의 지리를 표시한 낡은 지도였다.
일기장엔 흑접주 자신의 인생에 대한 소회와 함께 흑룡교의 유산에 대한 것이 적혀 있었다.
지도엔 흑룡교의 유산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장소가 표시되었다.
이른바 비선(秘線)이라고 불렸던 비밀 분타들.
“.......”
흑접주의 일기에 의하면 흑룡교의 비밀 분타들은 자금이나 정보를 모으는 역할만 하지 않았다.
교단에서 벌이기엔 위험천만한 실험을 하기 위해 만든 비밀 분타들도 있었던 것.
흑룡교가 멸문하면서 비밀 분타들도 대부분 폐쇄되었지만, 몇몇 시설엔 흑룡교의 유산이 남아 있다.
흑접주는 장로와 총관에게 그 사실을 듣고 비밀 분타들을 찾았던 것이다.
“어떻게 이 많은 비급들을 모았나 했더니만.”
일기장엔 그것 말고도 암룡승천술이나 흑접을 장악한 과정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미친.”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어떻게 자기 자식들을...!’
흑접주는 혼인을 하지 않았지만 대를 잇기 위해 젊고 아리따운 여인들을 품어 자식을 봤다.
그리고 자식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무렵 모친으로부터 강제로 떼어내서 살수로서 키웠다.
모든 자식들이 성공하진 않았다. 그러나 재능을 증명한 자식들은 상위 서열에 올랐다.
흑접주는 그들에게 자신이 아비임을 알려주진 않았다.
만약 자신의 대에 흑룡교를 재건하지 못한다면, 가장 뛰어난 자식을 골라 진실을 알려준 다음 대업을 대물림시킬 생각이었다.
그전까진 철저히 소모품으로만 써먹을 뿐.
‘칠호, 아니, 백서희도 자식이었다.’
백서희의 모친은 자식을 품은 채 도망쳤다.
하지만 제 스스로 먹고살 재주가 없었고, 운이 없게도 흑도의 꾀임에 넘어가 뒷골목 창기로 전락했다.
흑접주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배신한 여인을 구해주지 않았다.
부하를 시켜 감시만 했을 따름.
그리고 백서희의 모친이 비극적으로 죽고, 백서희만 탈출해서 거리를 전전했을 때.
우연을 가장한 만남으로 백서희를 흑접에 데려와서 흑접의 살수로 키웠다.
일기장을 덮은 강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마교라는 것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패륜마저 불사하는 광기.
불노불사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모산혈조나, 후계자를 찾겠답시고 음모에 가담한 진조와 닮은 꼴이 아닌가?
‘이런 건 모르는 게 낫지.’
강엽은 백서희가 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지상은 아수라장이었다.
“아이고, 나 죽네....”
하후진은 대 자로 뻗은 채 숨을 헐떡였다.
있는 공력 없는 공력 쥐어짜내며 싸웠더니 세상이 노랗게 보이고 입에선 단내가 풍길 지경이다.
그나마 소창후는 체통을 지켰지만, 창대를 지팡이 삼아 버티고 설 뿐이었다.
은천패급 낭인과 아미 제일의 기재가 힘을 합쳤는데도 죽을 고비를 얼마나 넘겼는지 모르겠다.
‘흑룡교의 사술... 그렇게 사특하고 막강할 줄이야.’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싸우는 장로는 소름 끼치도록 강했다.
만약 하후진과 합공하지 않고 일대일 생사결을 고집했다면 절대로 이기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염왕도문의 무공은 상상 이상이구나.’
신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흑룡교주를 죽인 염왕.
그의 진전을 물려받은 하후진이 작정하고 쏟아내는 창염 앞에선 장로도 크게 당황했다.
특히 온몸에 푸른 불길을 휘감았을 때부터는 어지간한 술법들은 쪽도 못 썼는데, 그때만큼은 하후진이 벽을 넘은 고수처럼 보였다.
왜 사문의 어른들께서 염왕도문을 경원시하는지 이해되었다.
‘사마(邪魔)를 불태우는 지옥의 업화. 하지만 언젠가는 스스로를 불태울지 모르는 재액....’
문득 소창후가 물었다.
“한데 저렇게 홀라당 타버리면 강 시주께서 생매장당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하후진이 움찔했다.
천신만고 끝에 장로를 쓰러트린 것까진 좋은데, 뒤를 생각하지 않고 싸우느라 교룡전이 타버렸다.
아무리 크고 웅장한 건물이라도 나무로 기둥을 세운 이상 화마에 삼켜지면 답이 없는 것이다.
덕분에 장로를 죽인 뒤에도 교룡전을 탈출하느라 고초를 치른 두 사람이었다.
“흠흠, 뭐 강엽 그 친구도 목숨줄이 보통 질긴 게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
소창후가 가자미눈을 뜨고 노려보자 지은 죄가 있는 하후진은 자라목이 되었다.
소창후가 한숨처럼 말했다.
“흑접주의 무위는 미지수입니다. 장로보다 강할 게 분명한데, 저희와 달리 강 시주는 혼자 싸우러 갔습니다. 도와야 하는데....”
강엽이 강하다고 한들 승산이 얼마나 되겠는가.
“만약 지하에 또 다른 출구가 있어 흑접주가 도망쳐버리면 후환이 남을 겁니다.”
“음, 그건 나도 걱정이긴 한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낙천적인 하후진이었다.
끙 하고 앓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책상다리를 한 채 시커먼 잔해만 남은 교룡전을 바라봤다.
그나마 교룡전 주변에 다른 전각이 없어 화마가 총단 전체를 뒤덮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잿더미가 바닥을 깔아뭉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뒤늦게 달려온 표사들과 낭인들이 잔해를 치우고 있지만, 지하의 싸움이 끝나기 전에 치울 수 있을까?
하지만 하후진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길 수가 없었거든.’
지하로 가는 입구가 막히는 것보다도, 장로가 흑접주와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는 게 더 중요했다.
물론 교룡전을 태워먹지 않고도 장로를 이기는 게 가장 좋았지만, 두 사람의 무공으로는 불가능했다.
내심 쓰게 웃은 하후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지친 몸으로는 방해밖에 되지 않수다. 청수 말코나 혜정 스님도 그렇고.”
“그건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핫, 지금이라도 도와주면 좋겠지. 그렇지만 난 강엽이 졌을 것 같진 않수다.”
“과하게 믿으시는군요.”
“그 녀석에 대해서 얼마나 아쇼?”
“많이는 모릅니다.”
“나도 마찬가지요.”
“....”
“만난 지 얼마 안 됐으니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지. 근데 내가 말하는 건 녀석의 성정이나 인간성에 대한 게 아니거든. 그 녀석의 힘이지. 나도 그 녀석이 얼마나 힘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수다.”
무림에선 삼 푼의 힘을 숨기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내보이면 적에게 자신을 분석하고 대처 방안을 짜낼 기회를 주지 않겠는가?
“뭔가 숨긴 게 많긴 했지요. 모산파의 술법을 익힌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아, 맞아. 그거. 모산파는 옛날 옛적에 망했다면서? 망한 문파의 술법을 어떻게 익힌 거람.”
“모산혈조를 아는 걸로 봐선 그자의 제자가 아닐까 싶군요.”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무림의 은원은 대물림되는 법. 모산혈조가 쌓은 업보의 화살이 강엽에게 향할 것이다.
“글쎄, 제자가 사부를 증오한다고? 뭐 그럴 수 있긴 하지만 진짜 웬수처럼 여기는 것 같던데?”
“자세한 건 본인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요. 제대로 대답을 해줄지는 의문입니다만....”
“그러다 괜히 자극하지 마쇼. 숨기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모르시는군요. 모산파, 아니 모산혈조에 대한 사안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모산혈조가 살아있다면 또 어디서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그러니까. 그 녀석도 모르잖수.”
“....”
소창후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쿠구구구궁......!
“이거 혹시?”
“교룡전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잔해 더미 중 일부가 뻥 날아갔다.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들이 병장기를 들고 싸울 태세를 갖출 때쯤, 검은 장포를 입은 청년이 재를 털며 나왔다.
“이 방화범은 하루라도 뭘 태우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히나. 죄다 태워먹었구만.”
“어....”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달려온 하후진은 들어갈 때와 사뭇 달라진 강엽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소창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검은 뭐여? 뭔 검이 보라색이여?”
옷이 바뀐 건 그렇다 치고 검은 어디서 났단 말인가.
불현듯 검의 정체를 깨달은 소창후가 목구멍을 쥐어짜냈다.
“설마 자성검입니까?”
그녀의 말에 표사들과 낭인들도 그제야 강엽이 쥐고 있는 검의 정체를 알고 웅성거렸다.
자성검호는 사천 무림을 대표하는 검객인 만큼 그의 자성검 역시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자성검 맞소. 흑접주가 쓰는 걸 가져왔지.”
“그럼 흑접주는....”
강엽이 조용히 하늘을 가리키자 좌중이 와아아 환호했다.
“수급을 가져왔다면 좋았을 텐데, 산산조각 나는 바람에 못 가져왔소.”
“그, 그렇군요.”
소창후는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모산파의 술법을 익혔어도 그렇지....’
설마 정말로 이길 줄은 몰랐다. 옷을 바꿔입은 걸 보니 꽤나 격렬한 싸움이었던 것 같지만....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청수 도장은 일호라는 자와 싸우다 내상을 입고 운기조식을 하고 계십니다. 혜정 사자(師姉)께서 호법을 서고 계십니다.”
그리고 금정표국의 국주인 남인옥과 대표두 황인검, 성도 분타에서 온 두 은천패급 낭인은 총단을 돌며 흑접의 잔당을 잡고 있었다.
“강 시주, 경황 중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죄송스럽지만 혹시....”
소창후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할 때, 저편에서 표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외쳤다.
“흑접의 비고를 찾았습니다!”
“...!”
강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비고는 내가 찾았는데 또 무슨 비고?’
비고에 다른 출구가 있긴 하지만, 흑접의 총단 바깥으로 이어져 있기에 안쪽에선 찾을 수가 없었다.
소창후가 놀라서 물었다.
“흑접주의 비고입니까?”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 말에 강엽은 깨달았다. 흑접주의 개인 비고와 별개로 흑접의 비고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 * *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반갑구려.”
다시 만난 남인옥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
그와 표사들 역시 힘든 싸움을 치르면서 적잖은 피해를 입은 만큼 이겼다고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럼에도 남인옥은 예의를 다해 포권했다.
“강 무사 덕분에 양친의 원수를 갚았소. 이 은혜를 죽는 날까지 잊지 않을 것이오.”
강엽은 황인검이 들고 있는 수급을 곁눈으로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뜻을 이뤄서 다행이오.”
남인옥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죽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오.”
“음?”
“우릴 여기까지 안내했던 그 칠호라는 여인이 원수의 수급을 갖고 왔소.”
“그녀가?”
바로 총단을 나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수급을 전해준 다음에 다시 떠났소. 금전을 좀 요구하긴 했지만.”
놓칠 뻔한 놈을 잡아줬으니 대가로는 싸지 않냐면서 노잣돈을 요구했던 것이다.
“저 목은 부모님의 영전에 바칠 것이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흑접의 비고를 찾았다고 들었소만.”
“그렇소. 운이 좋았지. 그 교룡전인지 하는 곳에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른 데에 있었소.”
강엽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같은 곳에 두기보다는 다른 곳에 두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총관이라는 작자의 거처에서 열쇠를 찾아서 열었지. 그리고 뜻밖의 수확도 얻었소이다.”
남인옥이 책자를 내밀었다.
“암살을 의뢰한 자들의 명단이외다. 비교적 최근 것이지. 생각보단 자세히 적혀 있소.”
“...!”
“내 부모님을 죽이라고 의뢰한 자가 누군지 궁금해서 부득불 먼저 읽어봤소.”
“그래서 알아냈소?”
“알아냈소.”
남인옥이 한숨을 내쉬었다.
흑접은 토벌했지만 암살을 의뢰한 자를 징치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복수를 했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강 무사도 궁금한 게 있을 것 같아서 가져왔소.”
홍가려를 죽여달라고 의뢰한 자의 정체.
책자를 넘겨받은 강엽은 끝단에서 의뢰 내용과 의뢰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함부로 밝히면 위험하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섣불리 건드리면....”
“알고 있소.”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