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96화 (96/450)

14화. 멸문 (11)

칠호라는 이름으로 살다 제 이름을 되찾은 여인.

백서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거 실화냐?”

강엽이 보내주긴 했지만, 흑접의 총단을 빠져나간 것은 아니었다.

전망 좋은 자리에서 싸움을 구경했다.

그런데....

‘장로가 죽었어!’

교룡전을 감싼 자욱한 흑무(黑霧)가 사라졌다.

그녀는 전장을 이탈했기에 누가 교룡전에 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추측은 해볼 수 있었다.

‘어차피 그 녀석들일 게 뻔하잖아?’

상위 서열들조차 범접하지 못할 고위 술사를 죽일 수 있는 게 강엽 일행 말고 또 누가 있겠나.

문제는 흑접주였다.

‘그 괴물만 죽이면 흑접도 끝나.’

흑접주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자만 죽는다면....

“엥?”

문득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저건... 이호?”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를 동여멘 독인.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는 이호의 모습에서 평소 같은 여유는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붕대는 어따 팔아먹었대?’

붕대가 벗겨진 얼굴은 머리카락은 한 올도 없고, 화상을 입은 것처럼 썩어문드러져서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다.

몇 년 전에 산독(酸毒)을 배합하다 사고가 나는 바람에 저런 몰골이 된 것이다.

“전대 국주님의 원수를 쫓아라!”

“이놈, 어딜 도망가느냐!?”

금정표국의 표사들이 이호를 뒤쫓고 있었다.

‘저 새끼, 눈치 까고 튀는 거네.’

장로가 죽었으니 금제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겠지.

전장을 이탈한 살수는 이호 말고도 몇 명이나 있었지만, 독이 오른 표사들은 이호만 쫓았다.

전대 국주를 살해한 원수인 만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

“주제도 모르는 잡것들이 감히...!”

이호가 이를 뿌득 갈았다.

일단 되는 대로 독탄을 뿌려 표사들을 뿌리쳤다.

표사들이 피독주를 갖고 쫓아오는 만큼 그리 재미를 볼 순 없겠지만 시야 정도는 가려줄 테니까.

무영환살공의 은신술을 펼친 그는 주변 경물에 녹아들어 추격해오는 표사들을 떼어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를 관찰하고 있었던 백서희는 이호의 움직임을 어렵지 않게 포착했다.

왜냐하면 이호는 그녀가 은신한 곳으로 오고 있었으니까!

‘저 새끼가 여기로 왜 와?’

사실 이호가 그녀에게 오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숨은 곳은 일대 지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찾을 수 없는 은신의 명당이었다.

즉, 이호 입장에서도 표사들의 추격을 피해 숨을 돌릴 장소로 제격인 것이다.

“휴, 간신히... 응?”

추격을 뿌리친 이호가 가슴을 쓸어내리다 말고 멈칫했다.

독공을 익히느라 은신술 등 다른 공부는 소홀했던 그였지만, 명색이 흑접의 상위 서열이었다.

자신이 숨으려던 곳에 선객이 있음을 알고 목소리를 깔았다.

“누구냐.”

“....”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셋을 셀 동안 나오지 않으면 독을 풀겠다. 하나....”

이호가 위협하듯 숫자를 세자 백서희는 짜증이 왈칵 솟구쳤다.

‘썅, 이 새끼는 왜 여기로 와가지고.’

하지만 이호의 선택은 이해가 되었다. 몸을 숨기면서 아래쪽을 조망하기 좋은 위치였으니까.

그녀 역시 같은 이유로 이곳을 고르지 않았는가?

‘에라, 모르겠다.’

이호의 성질머리라면 정말 독을 풀고도 남았다.

내심 한숨을 내쉬며 빼꼼 얼굴을 드러내자 이호가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치, 칠호...! 네가 어떻게!?”

“으음. 사정을 설명하면 복잡한데 말이야.”

“설마 금제를 푼 건가?”

“어라, 바로 받아들이네?”

“...장로가 죽으면서 금제도 사라졌다. 그에 비하면 네가 살아있는 것은... 믿기 힘들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건 아니지.”

“적응이 빠르다고 칭찬해줘야 하나?”

“의리가 남아서 돌아온 건 아닐 테지. 내가 아는 한 넌 그런 계집이 아니야.... 그렇군.”

이호의 눈이 확신으로 시퍼렇게 빛났다.

“네년이 저놈들을 총단까지 데려왔나?”

“그래. 패해서 사로잡혔거든. 덕분에 개털도 없는 신세가 됐지만.”

인제 와서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겠지.

순순히 실토하면서도 이호가 비난을 퍼부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은 삼호가 그랬듯 말이다.

그러나 이호의 반응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흠, 그런가. 네년이 한 짓이 괘씸하지만, 그냥 넘어가주마. 흑접이 망한 건 내게도 좋은 일이니.”

“뭐어?”

백서희는 귀를 의심했다.

흑접이 망해서 좋다니....

“너 설마?”

“하핫, 이만한 독공을 쌓고도 흑접에 메여 사는 게 너무 아깝지 않나. 지금까진 금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젠 아니지.”

그를 옭아맸던 놈들이 사라졌다.

이 시점에서 이호는 흑접주가 죽었다는 것까진 몰랐다. 하지만 장로가 죽은 마당에 흑접주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두고 봐라. 난 하찮은 살수 따위로 끝내지 않는다. 독공의 대종사가 될 것이다!’

언젠가 당문조차 넘보지 못할 절대독인이 되어 천하를 오시하리라!

그러기 위해선 흑접이 사라져야만 한다.

“흑접의 지원을 더 이상 받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거야 발품 좀 팔면 될 일이지. 나 같은 유능한 독인을 원하는 세력은 널렸거든. 기회만 있었다면 내가 흑접의 뒤통수를 쳤을 거다.”

“그, 그래. 그렇구나. 응. 잘해봐.”

광기 어린 집념으로 번들거리는 이호의 눈에 진저리를 치면서 말하자 이호가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칠호.”

“갑자기 뭔 개소리?”

“네 무공이라면 내게도 큰 도움이 될 거다. 장차 천하제일독인이 될 몸의 동료가 될 기회를 주마.”

“....”

거창하다 못해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헛소리였다.

백서희는 정색한 표정으로 검지를 관자놀이 옆에서 빙빙 돌렸다.

“미쳤어? 지랄은 작작 좀 해.”

“거절인가?”

가늘게 뜨인 이호의 눈이 노릿한 안광을 품자 백서희가 입가를 당겨 조소했다.

“동료는 개뿔. 동료를 가장한 실험체겠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수련생들이 실패작이란 명목으로 이호의 실험체가 되었던가.

따라갈 마음도 없지만, 따라가봤자 좋을 대로 이용해먹다 실험체로 써먹겠지.

“경고할게. 한 번만 더 개소리하면 소리를 질러 표사들을 부르겠어.”

“네년이....”

이호가 눈알을 부라렸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찢어죽였을 살광.

백서희가 코웃음을 쳤다.

“뒈지고 싶으면 해보시든가.”

그녀 역시 무공을 다 회복하지 못했지만, 이호의 꼬락서니 역시 만만찮게 엉망이었다.

서로 전력을 다한다면 쉬이 승부가 나지 않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이 새끼가 얌전히 죽어주진 않겠지. 숨겨둔 독도 아직 많을 테고....’

본격적으로 독을 퍼붓는 이호는 일호도 부담스러워하는 강적이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도 정면에서 싸우긴 부담스러운 상대.

“...그래. 이번엔 그냥 물러나지.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이 수모는 잊지 않으마.”

뱀 같은 시선으로 백서희의 몸을 훑어본 이호가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리는 찰나였다.

다시 벼락같이 몸을 틀어버린 그가 독수(毒手)를 날렸고....

촤악!

“크억!”

부지불식간에 발목이 잘려나간 채 꼴사납게 고꾸라졌다.

그제서야 양옆의 벽에 쳐진 강사(剛絲)의 존재를 깨달은 이호가 경악성을 토했다.

“으, 은혼사...!”

“등신아, 모처럼 흑접에 왔는데 빈손으로 가겠냐? 당연히 몰래 내 방에 들어갔지.”

한 자릿수의 상위 서열들에게는 혼자서만 쓸 수 있는 숙소가 주어진다. 백서희는 자신의 방에 있는 여분의 은혼사를 챙겨나온 것이다.

“역시. 사고로 얼굴이 문드러졌을 때 안력도 떨어졌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

이호의 낯짝이 구겨졌다.

백서희의 말대로였다. 그의 얼굴을 뭉개버린 산독이 안구에도 조금 튀는 바람에 안력이 떨어졌다.

다행히 피해가 심하진 않아서 사물을 분간하거나 글씨를 읽을 정도는 되었지만, 은혼사처럼 안력을 집중해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가느다란 물건을 발견하는 건 무리였다.

“그럼 이제 염라대왕이랑 면담할 시간이야.”

“자, 잠깐...!”

뒤늦게 애원했지만 백서희의 검은 사정없이 목을 쳐버렸다.

떨어져나간 수급이 데구르르 굴러오고 나서야 백서희는 안도했다.

“어휴. 만약을 대비하길 잘했지.”

안력이 떨어지는 데다 마음이 급했던 탓에 이호가 은혼사를 발견하지 못한 게 생사를 갈랐다. 아마 적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개털이 됐다는 말도 이호의 무의식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근데 이놈 대가리를 어쩐다?”

그러고 보니 금정표국의 국주가 원한이 있었는데.

아직도 이호를 찾아 사방을 뒤적거리는 표사들을 흘끔 바라본 백서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 * *

강엽은 소량의 피를 마셔서 독혈이 자신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문제는 놈의 마기로군.’

암룡승천술로 인해 넘쳐나는 마기가 경맥뿐 아니라 피에도 조금씩 스며들었던 것이다.

혈공진기와 흑룡교의 마기는 똑같이 마에 뿌리를 뒀어도 서로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고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덩치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기에 흑룡교의 마기는 혈공진기에 녹아들었다.

이종진기를 하나로 엮는 태극의 심상도 도움이 되었다.

‘중단전....’

강엽은 흑접주와의 싸움을 복기했다.

중단전을 개척한 무인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혜정 사태 또한 중단전을 갖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공력을 담는 그릇만은 아니었지.’

그보다는 하단전과 공명하여 공력을 증폭하는 수단에 가깝다는 것을 흑접주와의 싸움으로 깨달았다.

중단전을 개척해야만 삼화취정에 오를 수 있다.

하나 드넓은 강호 무림에서도 그 경지에 도달한 자들은 하후진을 가르친 염왕이나 청수를 가르친 무당제일검 같은 초강자들뿐.

그리고....

‘진조, 그자 역시 넘었을 거다.’

진조의 시험은 앞으로 더욱 고달파질 것이다.

삼화취정, 하다못해 중단전이라도 개척하지 않으면 이다음의 시험을 통과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직감적으로 앞날을 통찰한 강엽은 흑접주의 피를 위장 가득 들이붓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

숨을 고르며 눈을 반개하자 홍옥을 닮은 영롱한 안광이 번쩍인다.

마른 장작처럼 살가죽만 남은 흑접주의 시체를 돌아본 강엽은 장력을 내뿜었다.

화골산으로 녹여버리는 게 가장 좋지만, 격전 도중 자기병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다른 수가 없었다.

꼼꼼이 시체를 부숴 증거를 인멸한 뒤에야 강엽은 자성검을 챙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성검호가 알려준 비고는 석실과 이어져 있었다.

‘여기겠지?’

바닥과 천장을 잇는 원기둥.

그중 하나에 진기를 흘려넣자 기관이 반응하면서 톱니끼리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쿠그그그긍...!

벽이 열리며 숨겨진 계단이 드러난다.

좁고 깊은 계단 너머로 나타나는 것은 긴 통로.

그 안에 몸을 집어넣은 강엽은 한참을 걸은 끝에 넓은 동공에 도착했다.

“허참, 상상을 초월할 거라더니.”

과연 자성검호가 말한 대로 흑접주의 비고는 어마어마했다.

서가엔 흑룡교의 마공서들과 술법서들이 비치되어 있었고, 반대쪽 거치대엔 질 좋은 십팔반병기들과 암기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영약을 보관하는 창고도 있어서 뒤져봤는데, 딱히 귀한 영약은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복용했겠지.’

흑접주가 복용한 영약의 기운은 강엽의 뱃속에 들어 있었다. 전부 녹인다면 단전의 내공은 이 갑자를 가뿐히 뛰어넘으리라.

하지만 강엽이 진정으로 찾는 것은 따로 있었다.

“......찾았다.”

자성검보(紫晟劍寶)라고 적힌 낡고 오래된 서책.

강엽은 혹여 자신의 괴력에 찢길까 봐 자성검호가 남긴 유산을 갓난아기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고엔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작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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