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멸문 (10)
-고맙네. 자네 덕분에 이제야 비로소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하이.
마치 아들뻘의 젊은이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마냥 조곤조곤 귀천을 입에 담는 노인의 목소리.
생전의 자성검호는 육순을 훌쩍 넘은 노인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묻지 않는 걸 보니 눈치챈 것 같구먼.
“...가정만 했을 뿐입니다.”
교룡전의 지하에 있는 대규모의 석실.
흑접이 세워졌을 때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현재의 흑접주가 개수했는지는 몰라도 꽤나 옛날부터 존재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대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강엽은 일전에 백서희에게 들었던 정보를 통해 앞뒤를 끼워맞출 수 있었다.
“흑접주가 자기 거처를 교룡전이라고 명명하기 전에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교룡전은 중의적인 의미였군요.”
흑룡교를 재건하겠다는 포부이자, 대법을 통해 흑룡교의 마공을 대성하겠다는 포부.
그렇게 생각하면 흑접주가 왜 살수답지 않게 정면승부를 고집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흑룡교주의 혈손으로서 싸운다면 정면에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생각만큼 쉽게 풀리지 않아서 잔재주를 쓰거나 암기를 뿌리는 짓은 했지만, 석실에서 싸운 것 자체가 출신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똑똑한 친구구만. 암룡승천술이라고 하네.
“암룡승천술....”
-여기 있는 자들은 사악한 대법에 사로잡혀 그놈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지. 비교적 근래에 죽은 사람들은 자아가 강했기에 스스로를 잃지 않았네.
그 말에 강엽은 퍼뜩 깨달았다. 그의 앞에 와서 고개를 꾸벅 숙인 어린아이의 잔영은 오래전에 죽은 사람인 것이다.
-흑접주의 안에 있는 동안 그의 의념을 접했다네. 난 생전의 수행 덕분인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고.
흑접주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의 목표가 무엇인지, 대법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아까도 말했듯 흑접의 예고장은 단순히 그들의 악명을 높이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었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예고장이 흑접의 악명을 높이는 데 일조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강호에 악명을 떨친 살문들이 모두 흑접처럼 예고장을 보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고장을 보내지 않아도 악명을 떨칠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을 겁니다. 표적으로 하여금 대비할 시간을 주는 건 이치에 안 맞지요.”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랬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무엇을 할지 모릅니다. 암살을 성공해도 흑접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이번 경우만 봐도 그렇지 않나.
굳이 예고장을 보내는 대신 바로 홍가려를 죽였으면 흑접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고장을 보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그럭저럭 앞뒤가 맞습니다.”
흑접의 예고장을 만진 사람들이 죽으면 그 혼백은 석실까지 끌려와 대법의 양분이 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상리를 거스르는 역천의 술법은 천리까지 농락하는 법이었다.
그를 흡혈귀로 만든 진혈강림대법이 그러지 않았던가?
-그렇네. 흑접의 살수들도 예외가 아니었지. 그들 역시 까맣게 몰랐지만 대법의 희생양이었네.
“결국 흑접은 흑접주 한 사람을 위한 거대한 농장이었군요.”
-농장이라... 그 말이 딱 맞는군.
하나 뿌린 대로 거두는 법. 흑룡교를 재건하겠다는 망집에 사로잡혀 흑접주는 저 자신을 파멸시킬 재앙을 스스로 부르고 말았다.
‘그놈이 심산유곡 어딘가에 처박혀서 수련만 했다면 찾지도 못했을 텐데.... 하긴, 그런 일은 없었겠지.’
흑접주 본인이 조용히 살 성격인지도 의문이거니와, 장로와 총관이 부추겼을 테니 결국은 흑룡교를 재건하겠답시고 나서지 않았을까.
-한데 흑접주의 안에 있는 동안 그의 기억을 엿봐서 아는 건데... 자네가 찾는 건 없을 듯하이.
“...흑무암쇄진이 없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위쪽에서 술법을 쓴 장로는 과거 흑룡교에서 신녀(神女)라 불렸던 술법사들 중 한 명인데, 당시에도 직급이 높진 않았던 모양이야.
흑무암쇄진은 구천호법을 비롯한 흑룡교의 고위층이 썼던 술법진.
그러나 흑룡교의 신녀는 여러 명이었고, 그 당시 장로는 신녀들 중에선 신분이 낮은 편이었다.
“.......”
-실망한 표정이군.
“속이 쓰리긴 합니다.”
강엽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헛물만 켜는 셈이었다.
“뭐, 괜찮습니다. 애초에 놈이 거짓부렁을 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뒀으니까요.”
-음, 긍정적이군.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는데... 포기하는 건 아직 이를지도 모르네.
“예?”
-생전에 흑접주는 흑룡교의 흔적을 찾는 데 혈안이 됐었네. 아무리 흑룡교주의 혈손이어도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어린 시절에 흑룡교가 멸문했기 때문에 흑접주는 장로와 총관에게 흑룡교의 마공을 익혔다.
하지만 신분이 낮은 두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기에, 흑접주가 된 이후에도 틈틈이 흑룡교의 유산을 찾고 다녔다.
-놈이 가진 단서를 알려주겠네. 운이 좋다면 정말 흑무암쇄진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
-다만....
-닥치지 못하겠느냐!
우레처럼 쩌렁쩌렁한 노호성이 자성검호의 말을 막았다. 총관의 잔영이었다.
-감히! 이 찢어죽일 놈들이...! 감히 본교의 귀중한 유산을...! 그리고 네놈...!
그가 강엽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원한과 증오를 토해냈다.
-감히 위대한 흑룡교주의 혈손을 해하다니! 그 죄는 억겁 동안 지옥불에 타죽어도 만분지 일조차 갚을 수 없다. 네놈은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요, 네 후손들은 죄인이 되어 대대손손 비참하게 살...
귀만 더러워지는 저주였다.
자성검호가 불쾌함을 담아 혀를 찼다.
-쯧, 미련한 늙은이 같으니. 죽어서도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저짝의 말은 무시하게.
자성검호가 말하지 않아도 강엽 역시 총관을 무시한 지 오래였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흑접주의 기억을 엿봤다면 제가 백도 정파가 아님을 아실 텐데요.”
재생력을 썼고, 모산파의 술법까지 썼다.
백도 정파의 고매한 노협객이 사마외도의 괴물을 도와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흑접주의 비고를 찾을 것 아닌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알아낼 것 같은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승자의 권리다. 흑무암쇄진을 얻지 못해도 쓸 만한 게 있을지 모르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 정체가 뭐든 우릴 구해준 것은 변함없네. 자네가 사마외도인 것과는 상관없이.
“.......”
-궁금하긴 하군. 흑무암쇄진을 얻으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
“살기 위해 쓸 겁니다.”
-음?
“...귀천하신다면 말씀드려도 상관없겠지요.”
햇볕이 약점이라는 사실을 장경에게 말한 적은 있지만, 내밀한 사정까지 밝히진 없었다.
강엽은 차분히 설명했다. 자신이 어떻게 흡혈귀가 되었는지, 어떤 약점을 지녔는지.
이윽고 이야기가 끝난 뒤에 자성검호는 혀를 내둘렀다.
-허허, 기가 차는구먼. 나도 꽤 파란만장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비교가 안 돼.
온갖 괴이가 판치는 강호 무림에서도 강엽이 겪은 일화는 괴력난신이었다.
-자네가 겪은 그 모든 일에 유감을 표하네.
“....”
그 말에 강엽은 묘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흡혈귀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준 게 처음인 만큼, 위로를 받은 것 역시 처음이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군요. 다른 사람에게 제 비밀을 완전히 털어놓는 게 말입니다.”
-그런가?
“예.”
하지만 그건 자성검호가 곧 하늘로 돌아갈 사람, 아니 혼백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과연 자성검호 이외의 사람에게도 말할 기회가 올지는....
‘잘 모르겠군.’
물론 언젠가는 그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그때 자성검호가 쓴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네.
“제 말을 믿으십니까?”
-곧 하늘로 갈 사람에게 뭐하러 그런 장대한 이야기를 꾸며가며 사기를 치겠나?
뭣보다 강엽의 표정과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그의 말이 진실임을 일관되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성검호는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자네가 용기를 냈으니 이 늙은이도 이야기값을 치러야겠지.
“...?”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내겐 제자가 없네. 정확히는 흑접에게 잃고 말았지.
자성검호의 제자는 어렸다. 몇 년 뒤라면 몰라도 당장은 도움이 되지 않기에 피신시켰다.
-하지만 소용없었지. 흑접이 기어이 녀석을 찾았거든.
자성검호의 무공에 깊은 인상을 받은 흑접주가 온 산천초목을 뒤져 제자를 붙잡은 것이다.
-죽는 것을 대비해서 그 녀석에게 모든 무공을 전수했네. 그게 도리어 화근이 된 게야.
흑접주는 장로로 하여금 섭혼술(攝魂術)을 쓰게 해서 자성검호의 제자를 세뇌시켰다.
비록 당장은 쓰지 못해도 훗날을 기약하며 전수한 무공이 원수의 손에 넘어간 것.
자성검호는 그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혼백만 남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럼 제자분은....”
-.......
무거운 침묵만으로도 자성검호의 제자가 어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원수에게 목숨을 잃은 것도 모자라 신검과 제자까지 빼앗겼으니 그 원한이 얼마나 사무치겠나.
-지금이야 그놈이 죽었지만, 그놈이 지옥에서도 땅을 치고 후회하도록 복수하고 싶네. 사실 자네를 돕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어.
“이해합니다.”
강엽도 모산혈조라는 원수가 있는 만큼 자성검호가 어떤 심정인지 조금은 헤아릴 할 수 있었다.
-얘기가 다른 데로 샜군. 아무튼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자네에게 내 무공을 전수하고 싶기 때문이네.
“...!”
-물론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가르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겠지. 하지만 이대로 귀천하면 자성문(紫晟門)의 검맥은 끊기고 말 걸세.
“저는... 검술을 모릅니다.”
-알고 있네. 기본기와 비급으로는 알 수 없는 것만 알려줌세.
“대성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설사 그리 된다 해도 내가 잃을 게 무엇인가?
하긴 그랬다. 대성 여부를 떠나서 강엽이 그의 검맥을 잇지 않는다면 자성문의 역사는 끝나리라.
“...그럼 염치 불구하고 배사지례(拜師之禮)를 올리겠습니다.”
제자가 스승되는 이에게 세 번 절하면서 예를 갖추는 격식.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는 하나 사승 관계를 맺은 이상 반드시 지켜야 했다.
자성검을 빼고 상처를 치유한 강엽은 예우를 갖춰 세 번 절했다.
“갑진년(甲辰年) 곡우(穀雨), 산서성 운성(運城) 태생의 강엽이 사부님께 인사드립니다. 반드시 자성문의 검맥을 후대에 전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전수하겠다. 일어나서 자성검을 잡거라.
제자로 들인 만큼 자성검호의 말투도 달라졌다. 강엽이 자성검을 들자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강엽은 그의 가르침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자성검호도 강엽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가르침을 빨아들이자 깜짝 놀랐다.
-놀랍구나.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나 기이할 만큼 뛰어난 오성이다.
“진조의 영성 때문일 겁니다.”
-솔직히 반년 만에 절정고수가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땐 허풍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
아까는 믿는다면서?
강엽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라보자 자성검호가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 먼 산을 돌아봤다.
-허험, 뭐 알려주는 것마다 족족 터득하니 가르치는 맛은 있구나! 내가 사후에 제자를 참 잘두었어.
어쨌든 강엽의 학습 속도가 빠른 덕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은 것을 전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성검호가 앞서 말했던 대로 구두로 전하는 가르침은 한계가 있었다.
-비급에도 내 따로 주석을 적어두었다. 네 오성이라면 능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래는 어린 제자를 위해 적은 것이지만, 돌고 돌아 비급의 주인은 강엽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귀천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은 자성검호는 마지막으로 흑접주의 비고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제서야 후련한 마음이 된 그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먹먹하게 중얼거렸다.
-...허허, 저 너머로 가면 녀석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흑접주의 손에 희생된 어린 제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흐릿해지고 있다.’
강엽은 자성검호의 잔영이 조금씩 흩어지는 것을 깨닫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래. 이 말을 깜빡할 뻔했구나.
몸의 절반쯤이 사라진 자성검호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강엽을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가혹한 운명에 휘말린 제자야, 부디 네가 뜻한 바를 이루기를 바란다. 네 안의 마(魔)를 극복하고 너만의 길을 가거라.
자성검호만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흐릿하게 사라지며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총관을 비롯한 일부 살수들의 혼백은 여전히 증오를 짓씹듯 토해냈지만, 수백 수천의 혼백들의 목소리에 파묻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은공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대가 가는 길에 항상 무운이 따르기를.
그렇게 모든 혼백들이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면서 강엽은 작게 내뱉었다.
“...부디 평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