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멸문 (9)
모산파의 비급은 질문한다.
‘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몸을 해치는 것은 모두 독이 될 수 있다.
뱀독이나 광독처럼 해로운 것은 물론, 병자의 체질에 맞지 않는 약도 때로는 독이 되는 법.
‘근데 자기 피가 독이 되면 골 때리는 거지.’
상처를 통해 맹독을 퍼뜨리는 혈독(血毒)의 술법.
피를 독으로 더럽혀서 근육과 혈도를 파괴하는 악랄한 술법이다.
하지만 혈종술과 같은 계통인 만큼 이해하기 쉬웠고, 쓰임새 역시 훌륭했다.
설사 즉사시키지 못해도 몸의 일부를 못 쓰게 만들 수 있으니까.
흑접주가 더 많은 상처를 입었다면 효과는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 나중에 쓰고 싶었는데.’
흑접주가 대법의 기운을 폭주시키지 않았다면 이렇게 일찍 쓰지도 않았을 것을.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쓰지 않으면 내가 죽을 테니까.’
마치 석실을 통째로 쥐고 흔드는 듯한 존재감.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팔을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지금의 자신은 상대할 수도 없다고.
돌처럼 굳어진 채 오른팔을 축 늘어뜨린 흑접주가 자성검을 왼손으로 바꿔 잡으면서 혀를 찼다.
“평생을 우수검으로 살았건만.”
물론 왼손으로 검을 못 쓰는 건 아니었다. 혹시나 오른손을 못 쓸 경우를 대비해서 좌수검을 갈고 닦았으니까. 다만 오른손으로 검을 잡을 때만큼은 날카롭지 못했다.
설령 좌수검을 잘 썼어도 몸의 균형이 깨진 만큼 전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터.
“인정하마. 한 방 먹었어.”
그럼에도 승리를 확신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보답으로 최선을 다해 죽여주마.”
지상의 적들까지 쓸려면 최대한 빨리 싸움을 끝내야만 한다.
발을 내딛는 순간 흑접주가 사라졌다.
“...!”
초감각을 쓴 강엽의 시야는 시간을 분절한 것마냥 느릿하다.
그런데도 흑접주를 발견했을 땐 이미 그가 내지른 검격이 목까지 치닫기 직전이었다.
‘이런, 내력 수발이 몇 배로 빨라졌...!’
간발의 차로 벗어난 강엽이 다시 뛰어들었다.
한 팔이 망가진 흑접주는 휘두른 검을 회수해서 검면으로 일권을 막았다.
쩌어엉...!
굉음과 함께 튕겨나간 흑접주.
안 그래도 불안정한 자세에서 막았기에 버티지는 못했지만, 볼썽사납게 자빠지지도 않았다.
석벽에 부딪치기 직전 몸을 반전시키더니 진각을 밟으며 다시 달려든 것이다.
찰나, 흑접주의 왼팔 토시에서 비침이 쏘아졌다.
살짝 머리를 기울여 피하니 이번엔 자색 검기를 머금은 검격이 미간을 관통했다.
그러나 검격이 뚫은 것은 허상일 뿐.
진짜 강엽은 검을 찌르느라 비어버린 옆구리를 향해 통렬한 일격을 날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우장으로 응수하려고 했던 흑접주가 어깨를 움찔 떨며 등으로 받아냈다.
터엉!
‘무겁다.’
손목이 찌르르 울린다.
마치 맨주먹으로 암벽을 친 것 같은 묵직한 손맛에 강엽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군. 마기로 경력을 상쇄하고 충격을 분산시켰어.’
그때 검파를 역수로 고쳐잡은 흑접주의 왼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는 검로를 그려냈다.
초음으로 흑접주의 진기가 어떤 곳으로 향하는지 알고 있던 강엽은 신속하게 멀어졌다.
그러자 흑접주의 무릎이 채찍처럼 휘어지더니 강엽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터어엉!
“흡!”
마치 거대한 둔기로 맞은 것마냥 묵직한 충격에 강엽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암신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흑접주의 각력이 엇박자로 들어오는 바람에 살짝 늦었다.
족도(足刀)를 맞은 관자놀이의 살가죽이 찢겨지면서 핏줄기가 길게 뿌려진다.
하지만 흑접주 역시 후속타를 꽂지 못했다.
언뜻 균형이 무너지는 듯했던 강엽이 단단히 힘을 주고 버티더니, 턱주가리를 올려친 것이다.
몸을 감싼 마기 덕분에 정타를 맞진 않았지만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 틈을 타서 강엽이 손톱을 휘둘렀다.
‘상처를 입으면 위험하다.’
혈독의 원리는 몰라도 상처 부위로 독이 들어온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때 강엽의 입이 둥그렇게 말렸다.
-휘리리릭!
“으음!”
흑접주가 침음했다. 공력으로 보호하긴 했지만 한순간 빈틈이 드러났다.
다섯 줄기의 섬광이 종아리 비복근을 끊어낸다.
아릿한 통증에 흑접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놈이...!”
“알 것 같군.”
등 뒤에서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
강엽은 흑접주가 잠시 비틀거린 틈을 놓치지 않고 암신을 펼쳐 배후를 점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기회를 잡고도 종아리나 노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단순한 마기가 아니라 호신강기(護身罡氣)였어.”
호신기를 아득히 넘는 기예. 호신기가 옷이라면 호신강기는 단단한 갑주였다.
‘벽을 넘어야만 짜낼 수 있을 텐데....’
내공이 이 갑자를 넘보는 강엽도 호신강기를 짜내진 못한다. 호신강기 역시 강기공이기에 상승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흉내도 못 낸다.
흑접주의 무공이 고강하긴 해도 호신강기를 짜낼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다.
‘술법진 덕분이겠지.’
넘쳐나는 마기로 호신강기를 억지로 구사한 것이다.
만약 진짜배기 호신강기였다면 좋은 위치를 잡고 기습을 했어도 뚫지 못했을 터.
그때 흑접주가 허공에서 회전하며 검초를 뿌렸다.
촤아아악!
빛살같은 검격이 어깨 삼각근을 가르고 지나간다.
“크읍...!”
화끈한 격통이 내달렸지만 강엽은 꾹 참고 다시 한번 살점을 잡아뜯었다.
이번엔 허벅지였다.
“어떻게...!”
흑접주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강엽이 짐작한 대로 그의 호신강기는 완벽하지 않았다. 얼기설기 엮은 누더기처럼 곳곳에 빈틈이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마기가 유동적으로 흐르는 데다, 기껏 생긴 빈틈도 손톱보다 작아서 찾기 어렵거늘 대체 어떻게 알아봤단 말인가?
“넌 죽었다 깨도 모를 거다.”
초음으로 흑접주의 체내 변화를 살피기에 마기가 어찌 흐르는지 알았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포착한 빈틈을 뚫는 것도 어려웠지만, 호신강기를 직접 타격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전력을 다하면 어떻게든 뚫을 수는 있으니까!’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뀐 순간, 혈공진기를 감싼 검결지가 흑접주의 왼팔 곡지혈(曲池穴)을 찔렀다.
일순간 팔이 마비되는 통증에도 흑접주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검격을 내리쳤다.
자성검호를 상징하는 자색 신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커먼 마기가 검신을 감싼다.
콰아아아앙!
바닥이 쪼개지며 돌가루가 튀었다.
‘이젠 부서지나?’
흑접주에게 마기를 전해준 걸로 술법진의 효용이 다한 것이리라.
강엽은 아직 재생되지 않은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핏물.
뭘 하려는지 알아차린 흑접주가 노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술법독을 쓸 시간을 줄 것 같나-!”
끊어진 비복근과 대퇴근은 공력으로 엮어서 대체했다.
강엽이 다시 한번 망혼소를 불었지만 같은 수작질은 안 통한다는 듯 개의치 않고 검로를 이어간다.
익숙하지 않은 좌수검이어도 우수검에 비해 떨어질 뿐, 흑접주의 검세는 얕볼 만한 게 아니었다.
암신으로 기감을 속여넘기려고 해도 금세 허실을 파악하고 진짜를 향해 검격을 날린다.
촥! 촤악!
근육과 뼈가 끊어지며 핏줄기가 치솟았다. 마기가 스며든 몸은 고장난 것처럼 삐걱거린다.
문득 벼락같은 깨달음이 강엽을 찾아왔다.
‘이건...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해선 안 돼.’
심장을 비껴가는 것만이 최선이다.
한순간에 판단을 내린 강엽은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뛰어들며 비스듬히 검격을 받아냈다.
푸학!
검신이 늑골과 폐를 뚫고 등 뒤까지 관통하자 흑접주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폐가 꿰뚫린 시점에서 죽었겠지만, 상대는 재생의 공능을 가진 괴물. 경력을 퍼부어 산산조각 박살낼 작정이었다.
“끝이다, 괴물....”
만족스러워하며 경력을 집어넣는 그때, 섬뜩한 살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푸욱!
“커허...!”
강엽의 손가락이 가슴 중앙 단중혈(膻中穴) 어림을 두 치 가량 파고들었다.
호신강기로도 막지 못했다.
“쿨럭, 몰랐던... 모양이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빈틈.
새끼 손톱보다도 작았지만, 호신강기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약점이었다.
하필이면 중단전이 있는 단중혈에 충격을 받은 흑접주는 기혈이 꼬이는 충격에 울컥 토혈했다.
‘이런 실수를...!’
강엽의 말과 달리 흑접주는 중단전에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바늘구멍만큼 작은 곳이 꿰뚫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격하게 치고받을 때는 중단전을 꿰뚫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강엽의 몸을 꿰뚫은 지금은 아니었다.
재생력을 지닌 강엽은 얼마든지 제 몸을 희생하는 고육지책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아니, 서둘러 놈을 죽여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알면서도 무시했다.
시간을 주면 강엽이 술법독을 쓸 게 뻔했으니까.
강엽도 그걸 알고 있기에 혈독을 쓰는 척하면서 흑접주를 낚았던 것이다.
“이 사기꾼 같은 놈이, 커억...!”
중단전이 손상된 것은 아니라도 기혈이 꼬였기 때문에 경력이 이어지지 않는다.
고통스러워하는 흑접주를 밀어낸 강엽이 폐를 관통한 자성검을 매단 채 오만상을 찌푸렸다.
격통에 시달리는 것은 그 역시 매한가지였기에 바로 달려들지 못하고 앓는 신음만 흘렸다.
‘젠장, 이 짓만 벌써 세 번째니 원....’
처음 흡혈을 했을 때도 그렇고, 구양세가의 암검주를 쓰러트릴 때도 그렇고.
어째 정면승부로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나면 칼침을 맞고 역습하는 게 습관이 돼버렸다.
‘하긴 이만큼 적을 낚을 좋은 수단이 없긴 해.’
다만 조금만 실수하면 심장이 찢길 수 있으니 뒤가 없을 때나 쓸 수단이었다.
가슴에 검을 꽂은 상태에서 강엽은 수인을 맺고 진언을 외우자 흑접주가 눈을 부릅떴다.
부상을 입은 종아리 비복근과 왼팔의 곡지혈과 단중혈에서 혈독이 퍼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단단한 호신강기조차 피가 독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 것이다.
“약점투성이 호신강기라. 저잣거리 싸구려 외공만 못한 호신강기군. 대체 조문(弔門)이 몇 개냐?”
“네놈...!”
괴성을 지른 흑접주가 뻗은 손은 금세 검게 물들어서 돌처럼 굳어졌다.
흑룡교주의 혈손으로 태어난 자 역시 죽음이라는 절대 명제 앞에선 한낱 평범한 걸까.
확정된 죽음을 예감한 흑접주의 낯짝은 이제껏 강엽의 손에 명줄을 달리한 자들이 그랬듯이 절망과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끝이다.”
“......!”
* * *
손을 뻗은 채로 사지가 굳은 흑접주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본 강엽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거 흡혈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혈독의 공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과연 독이 된 피를 마셔도 되는 걸까?
‘나까지 중독되는 거 아닌가?’
버리자니 아까웠다. 이만한 고수의 피를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씁, 어쩔 수 없지. 일단 한 입 먹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뱉는 수밖에....’
만약 마실 수 없다면 앞으로는 가급적 혈독을 쓰지 말아야 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흑접주의 시신에 손을 대는데, 갑자기 시신이 들썩이더니 시커먼 마기가 솟구쳤다.
-카아아아아악!
검은 안개에서 절규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설마 흑접주가 혼자선 죽기 싫다고 물귀신 심보로 동귀어진의 수를 쓴 것일까?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끌어올린 강엽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고맙습니다.
깜짝 놀란 강엽이 돌아본 곳엔 희미한 잔영들이 있었다.
-오오, 마침내 해방되었다!
-빌어먹을 흑접!
사방에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누군가는 환희에 찼고, 누군가는 흐느꼈고, 또 누군가는 걸쭉하게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강엽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 목소리들은 설마....”
-.......
그때 흐릿한 잔영이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은 잔영의 모습에서 강엽은 어린 아이의 흔적을 느끼고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 강엽을 물끄러미 올려다본 잔영이 마치 감사를 표하듯 머리를 꾸벅 숙인다.
그리고 어느새 석실을 가득 채운 수천 개의 잔영들이 강엽을 향해 엎드려 절하기 시작했다.
-은인이시여....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지만, 강엽은 이들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흑접에게 살해당한 원혼들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았다. 개중엔 흑접주의 시체를 보고 증오를 내뿜는 원혼도 있었으니까.
말하는 걸 들어보니 교룡전에 가는 것을 막았던 총관인 듯했다. 그 말고 다른 살수들도 느껴졌다.
-흑접의 예고장은 세상에 흑접의 악명을 전하는 수단만이 아니었던 게지. 흑접의 살수들도 몰랐지만, 이 모든 건 흑접주를 위한 대법의 일부였네.
다른 원혼들과 달리 자색의 신광을 품은 잔영.
강엽은 왠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자성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