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멸문 (4)
흑접의 역사는 길다.
지금같은 악명을 얻은 것은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백 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지녔다.
흑접이 생겨난 이래 외인이 그들의 총단을 흙발로 비집고 들어온 역사는 없었다.
술법진을 절대적으로 믿는 만큼 문지기도 형식적으로 배치한 게 다였다.
“엇?”
“설마 침입... 커억!”
일행은 살수들이 호각을 불기 전에 빠르게 해치웠다.
강엽이 단숨에 뛰어들어 안면을 뭉개버렸고, 뒤를 이어 달려온 하후진이 칼날을 휘둘러 징을 치려던 놈의 가슴팍을 쪼개버렸다.
“쳇.”
자신보다 먼저 살수를 처리한 강엽을 보며 하후진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강엽은 어이가 없었다.
‘누가 먼저 죽이냐 시합하냐?’
고개를 휘휘 내저은 그가 빠르게 주변 지형을 훑은 다음 말했다.
“계획대로 진법부터 무력화시킨다.”
백여 명이 넘는 아군이 다 들어올 만큼 통행부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본대를 빠져나와 몰래 흑접에 잠입한다는 위험천만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청수가 확인차 물었다.
“진축을 부수면 된다고 하셨지요?”
“그래.”
흑접을 감싼 술법진, ‘환야미로진(幻夜迷路陣)’의 진축은 세 개.
이중 두 개를 박살내면 술법진이 와해되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군이 들어올 수 있었다.
칠호가 무공을 다 회복하지 못했기에 일행은 셋, 둘씩 찢어졌다.
“칠호, 청수, 하후진이 한 조. 나와 소창후가 한 조다.”
강엽은 말을 하면서 혀를 찼다.
‘이렇게 짜는 게 가장 합리적이긴 한데....’
일행 중 흑접의 내부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은 칠호뿐.
그나마 강엽은 지겹도록 설명을 들은 덕에 도움 없이도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신속하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그녀와 따로 떨어져서 움직여야 하는데, 문제는 소창후와 칠호의 사이가 견원지간이라는 것이다.
소창후도 일행의 작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사적인 감정을 앞세우진 않았지만, 칠호와 붙여놓는 것이 상책은 아닐 터.
“그럼 이따 보자고.”
“딱 봐라. 우리가 니들보다 먼저 성공할 거다.”
“두 분의 무운을 빕니다.”
그렇게 일행은 정 반대 방향으로 헤어졌다.
강엽과 소창후는 동쪽이었다.
* * *
“쭉 가다보면 검은색 지붕을 가진 육각정(六角亭)이 나올 거요.”
“꼭대기에 공 모양의 장식이 두 개 있다고 하셨지요? 그 정자 밑바닥이 진축이고요.”
경공으로 달려가면 한달음이다.
아직 흑접이 그들이 쳐들어온 것을 모르고 있을 때 빨리 부수면 일이 한결 쉬워지리라.
하지만 세상 만사가 언제나 예상대로만 흘러가진 않는 법.
두 사람은 살수들을 맞닥뜨렸다.
“저놈들은 누구지?”
“처음 보는 자들이군. 근데 한쪽은 머리를 깎은 게 어째 비구니처럼 보이는데...?”
설마 술법진이 깨졌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살수들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을 타는 살수들의 위로 가차없는 공격이 퍼부어졌다.
쾅! 퍽! 콰직! 쐐애액!
강엽은 말할 것도 없고 소창후의 손속도 상당히 독했다.
웅혼한 공력을 머금은 창격이 살수들을 집어삼키면서 팔다리를 가르고 몸통을 후려친다.
목숨을 빼앗진 않아도 대자대비한 불문의 가르침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자비한 창격이었다.
그럼에도 창술 자체는 강엽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출중했다.
‘무림삼대창술 중 하나라더니.’
팔가인 산동악가의 악가창, 그리고 신창양가의 양가창과 함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창술.
아미파가 배출한 기재의 손에서 아미복호창(峨眉伏虎槍)이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냈다.
추가로 두 명의 살수들이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진 뒤에야 흑접의 살수들도 현실을 깨달았다.
“이 머저리 같은 새끼들! 적이 쳐들어왔는데 뭘 멀뚱멀뚱 보고 있는 것이냐!”
흑립과 피풍의를 입은 살수가 일갈했다.
초음으로 그의 단전을 살펴본 강엽이 짧게 내뱉었다.
“두 자릿수로군.”
“...네놈이 그걸 어떻게?”
그야 이제껏 겪어본 살수들과 비교해서 알아본 것이지만,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살수는 깜짝 놀랐다.
하나 이어지는 충격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경험이지.”
“아니!?”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미처 몸을 돌리기 전에 우악스러운 힘이 목을 뒤로 돌려버렸다.
허망한 최후를 맞은 두 자릿수의 모습에 살수들이 전율했다.
소창후도 마찬가지.
‘...언제 저기까지 간 거지?’
분신과 같은 효과를 내는 보신경은 상당히 많다. 그러나 강엽의 암신은 아미파 제일의 기재인 그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고절했다.
만약 강엽이 그녀를 노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강 시주, 당신이 사마외도라면....’
불길한 예감을 느낀 소창후가 본능적으로 수중의 창을 강하게 붙들었을 때였다.
“소창후, 등 뒤!”
강엽이 사자후처럼 고함쳤다.
한 박자 늦게 눈치챈 소창후가 유려한 신법으로 몸을 휘돌리면서 고개를 틀었다.
시퍼런 암기가 그녀의 목덜미를 한 끗 차로 스쳐지나갔다.
만약 강엽이 경고하지 않았다면 등을 내주었을 터.
하지만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섬뜩한 경파가 떨어졌다.
쾅! 쩌어어엉...!
이번엔 강엽의 경고 없이도 가뿐히 막아냈다.
소창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초겸(草鎌)인가요?”
두 자가 넘는 두 자루의 쌍초겸을 애용하는 살수.
그녀 역시 흑접의 한 자릿수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들었기에 상대의 정체를 금방 추측했다.
“시주가 구호였군요.”
“...!”
복면 위로 드러난 눈이 쥐방울 만하게 커졌지만,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고 양손에 잡은 쌍초겸을 난상으로 휘둘렀다.
“아미파의 여승을 만날 줄은 몰랐군. 바깥의 쥐새끼들이 어찌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제압하고 물어보면 되지 않겠는가?
‘마침 근처를 지나가서 다행이군.’
구호가 여기까지 온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볼일이 있어서 지나는 찰나에 소란을 듣고 온 것.
[적들의 전력은 미지수다. 봐주지....]
구호의 전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언제?’
소창후의 발목을 묶은 그 잠깐 사이에 여기 있던 살수들이 죄다 시체로 변한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진 구호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몸을 던졌다.
그 판단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찰나에 쇄도한 손톱에 꿰뚫렸을 테니까.
강엽이 소창후를 곁눈질했다.
“일대일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으음....”
그녀는 아미를 찌푸릴지언정 강엽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강 시주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하나....”
손발을 맞춰본 경험도 없는 두 사람이다. 과연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연수할 수 있을까?
“걱정 말고 전력이나 다하시오. 나 때문에 동선 꼬이는 일은 없을 테니.”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강엽이 전위를 맡고, 소창후가 뒤를 받치는 형국이 됐다.
구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뭐지? 꼴에 사내랍시고 앞에 서는 건가?’
상식적으로는 장병기를 쓰는 소창후가 앞서고, 강엽이 틈을 봐서 기습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위치는 정반대였다.
‘뭘 할 건지는 모르겠다만 어차피 난 적당히 버티기만 하면 된다.’
조금 있으면 다른 한 자릿수들이 사태를 알고 올 것이다. 두 연놈이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합류하면 금방 제압할 수 있겠지.
구호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휘리릭!
“컥.”
기습적인 일격을 처맞고 침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반면 소창후는 강엽에게 전음을 들은 덕에 이문혈에 공력을 집중하여 망혼소를 막았다.
“지금!”
구호의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서 좌우에서 달려든다.
흑접의 한 자릿수답게 구호는 금세 망혼소의 영향에서 벗어났지만, 이어진 연수합격에 당황했다.
소창후의 말대로 손발을 맞춰본 적 없음에도 두 사람의 연수합격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정확히 말하면 강엽이 소창후의 창격 범위를 교묘하게 피해서 구호의 빈틈을 찔러갔다.
강엽의 입장에선 삼파전의 양상으로 다가오는 양상.
하지만 초음으로 두 절정고수의 진기 흐름을 들여다보고, 초감각을 통해 한발 앞선다.
오히려 두 사람의 동선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여 소창후를 자유롭게 두었고, 구호만 궁지로 몰아붙였다.
“이놈들이...!”
이제껏 싸운 한 자릿수가 그랬듯 구호도 살수 비기를 갖고 있었으나 두 사람의 합격 탓에 펼칠 틈새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궁...!
마치 지진이 강타한 것처럼 장원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세 사람의 싸움도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멀찍이 물러난 구호는 서쪽 부근에서 장대한 흙먼지가 치솟는 광경을 보고 기겁했다.
“...설마?”
“바로 그 설마지.”
강엽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너랑 싸울 동안 저쪽 녀석들이 먼저 진축을 부순 모양이야.”
“...!”
구호는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이미 흑접에 들어온 적들이 진축을 부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이런 바보같은... 설마 바깥에 더 많은 적이 있단 말인가?”
“호오, 아예 돌대가리는 아닌걸.”
비유하자면 술법진은 성벽이었고, 강엽 일행은 성문을 열기 위해 침입한 침투조였다.
“너흰 술법진을 너무 믿었어.”
흑접은 타성에 젖은 조직이었다.
술법진이 그들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했기에 자신들이 공격받는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
아연해진 구호를 향해 강엽이 다시 뛰어들었고, 소창후가 뒤를 따르며 복호창을 휘둘렀다.
콰앙!
결국 결정적인 순간 창대를 후려맞은 구호가 등이 활처럼 휜 채 멀리 날아갔다.
“꺼억...!”
불문의 정심한 공력이 구호의 호신기를 부수고 등뼈를 부쉈다.
지면을 튕긴 구호가 전각 기둥에 안면을 박고 기절했다.
즉사는 면했지만, 안면이 함몰되어 피를 줄줄 흘렸다.
“가만히 놔둬도 죽겠지만....”
낮게 중얼거린 강엽이 구호의 심장을 부쉈다.
잠력을 격발시킨 삼호의 사례도 있는 만큼 숨을 끊지 않으면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
소창후는 강엽을 나무라지 않았다. 사문의 가르침 때문에 불살계를 어기지 못할 뿐, 살수는 모두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연못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저기가 강 시주가 말씀하신 육각정 같습니다.”
연못 위에 있는 육각정.
경공으로 훌쩍 뛰어넘어 육각정의 지붕에 착지한 두 사람이 아래로 내려갔다.
“제가 부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강엽이 해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장병기가 깊숙한 곳까지 경파를 전달하기에 용이하리라.
복호창을 정자 밑바닥에 관통한 소창후가 숨을 들이키면서 경력을 쏟아부었다.
“흐읍!”
우우우우웅......!
창대가 부르르 흔들린다.
평범한 창대라면 견디지 못했겠지만, 복호창의 창대는 평범한 목봉이 아니었다.
아미산의 영험한 정기를 먹고 자란 고목이 수명이 다했을 때 베어서 만든 창대.
수백 년이나 산 고목은 반쯤 영물이나 다름없는 만큼 그 고목을 잘라만든 복호창의 창대는 소창후의 공력을 온전히 담아냈다.
이윽고 창날로 쏘아보낸 경파가 정자 밑둥을 관통하여 그 안에 있는 진축을 부쉈다.
콰아아아앙!
* * *
진축이 부서진 충격은 흑접의 총단 전체를 강타했다.
장로가 주름살을 떨며 분노했다.
“어찌 이런 일이...! 어떤 놈이 진축을 부쉈단 말이냐!”
“소, 속하들이 알아보겠습니다!”
장로의 부하들이 황급히 나가려고 했지만, 그전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살수가 뛰어들어왔다.
“적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무어? 어떤 놈들이냐!”
“그, 그게....”
“이놈! 똑바로 고하지 못할까!”
바로 그때 두 번째 충격이 강타했다.
이번엔 조금 더 가까운 위치였다.
쿠구구구구궁...!
장로는 망연자실했다. 한 개만 무너졌다면 몰라도, 두 개나 무너졌다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환야미로진이 깨졌다!
“이, 이럴 게 아니야. 당장 적들을 막아야... 아니, 총관은 어디 있느냐!”
“누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총관이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내가 애들 데리고 적들을 막겠소. 누님은 접주님을 모시고 만약을 대비하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내 방에서 창문을 열고 머리를 깎은 비구니를 봤소.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아미파의 땡중년이 틀림없소.”
“...!”
장로가 충격으로 비틀거렸다.
“이, 이런. 어찌 이런 일이....”
“필시 적의 군세가 몰려올 터. 만의 하나를 생각하시오. 우리가 다 죽어도 접주님... 아니, 주군만은 보중하셔야 하오.”
“...네 말이 옳다.”
지금은 총관의 말마따나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였다.
그때였다.
[나는 괜찮으니 두 사람은 적을 막도록.]
두 노괴의 머릿속에 울리는 흑접주의 중후한 목소리.
마치 천리전음(千里傳音)처럼 먼 거리에 있는 타인에게 자신의 수법을 전달하는 수법이었다.
실상은 세 사람의 심령이 술법으로 묶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흑접주만이 일방적으로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누님.”
“휴우, 주군의 명을 어찌 거역하겠느냐. 너는 즉시 상위 서열들을 내보내라.”
“누님은 어찌하실 것이오?”
“나 역시 적을 막을 것이니라.”
주름이 흘러내리는 노안이었지만 장로의 눈은 젊은이들 못지 않게 형형한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가증스러운 구파의 악적들에게 본교 형제들의 원한을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마음에 드는 대답이구려.”
두 노괴의 전신에서 시커먼 기운이 흘러나온다.
흑접의 살수들은 마기를 내뿜는 두 노괴를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