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88화 (87/450)

14화. 멸문 (3)

“남인옥이라 하외다.”

금정표국의 국주는 이립이 안 되는 젊은 남자였다.

대파산의 악명높은 녹림채주를 꺾은 일화로 촉도표룡(蜀道鏢龍)이라는 별호를 얻은 젊은 잠룡.

하지만 선친이 암살당하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대형 표국의 주인이 되었다.

남인옥이 포권으로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기에 강엽 역시 포권으로 화답했다.

“강엽이오.”

“먼저 불구대천의 원한을 갚을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소.”

강엽이 아니었다면 부모를 죽인 원수가 누구인지 알고도 복수할 기회를 잡지 못했으리라.

흑접을 쳐부순다면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것은 물론, 국주의 권위를 세움으로써 안팎으로 흔들리는 표국을 바로잡을 수 있을 터.

안 그래도 선친의 죽음으로 표국이 흔들리는 와중에 경쟁 표국들이 사업권을 침범하거나 표사들을 빼가려는 등 훼방을 놓고 있었다.

표국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공적이 필요했다. 명분도 서고 실리도 얻을 수 있는 공적이.

“이 날이 오기만을 손 꼽아 기다렸소. 다행히 하늘이 무심하지 않으셔서 강 무사를 통해 기회를 주신 것 같구려.”

시퍼런 살기를 토해내는 남인옥의 눈동자는 부모의 복수를 자신의 손으로 완결 짓고 싶다는 욕망으로 꿈틀거렸다.

‘무모한 짓을 하면 곤란한데....’

작전의 성패에 금정표국의 역할이 큰 만큼 실수하면 작전을 그르칠 수 있었다.

그때 남인옥이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도 무엇이 중한지는 알고 있으니까. 상처뿐인 승리는 바라지 않소이다.”

흑접을 토벌해도 일백의 정예 표사를 잃으면 복수를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래도 그 이호라는 자와 만났으면 하는 바람은 있소. 내 손으로 원수를 죽여야 부모님의 영전에 당당히 고할 수 있지 않겠소이까?”

“시운이 따르길 빌겠소.”

“고맙소.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강 무사께 따로 사례하겠소.”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기에 강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인옥은 결기 어린 얼굴로 황인검 등 다른 표사들과 함께 후방으로 빠졌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나왔다.

“창비도(彰飛刀) 이후명일세.”

“소살관철(小虄貫鐵) 진린이다.”

두 사람은 은천패의 낭인들이었다.

창비도 이후명은 비도술의 달인이고, 소산관철 진린은 화살로 강철을 뚫는다는 궁술 고수다. 지금은 둘 다 성도 분타 소속이었다.

진린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네 소문은 들었다. 낭인전에 들어온 지 여섯 달밖에 안 됐는데 풍운을 일으켰더군. 성도 분타뿐 아니라 사천의 다른 낭인 분타들까지 떠들썩해.”

“흠, 어째 뼈가 느껴지는 말인데.”

떠들썩한 게 좋은 의미만은 아니리라. 강엽이 실소하며 묻자 두 사람이 쓰게 웃었다.

“유명해지는 걸로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 몇몇 녀석들은 동천패인 네가 벌써부터 굵직한 의뢰를 주도하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다.”

“이 바닥은 실력이 전부 아닌가?”

“다들 말은 그렇게 하는데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거든. 실력 못지않게 경력도 중요하다는 거야.”

“고까운 마음도 있을 걸세. 은천패급 되면 자존심 빼면 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한마디로 강엽의 밑에 들어가서 지시를 받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나마 성도 분타에서 인심을 쓰지 않았다면 은천패는 하후진을 제외하면 아예 없었을 수도 있다.

강엽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은 어떻지?”

이들이라고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을까?

이후명이 씩 웃었다.

“우린 호기심이 더 컸지.”

“금파검(金波劍)이 가보라고 하기도 했고.”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자 강엽이 눈썹을 모았다.

“...성도 분타의 금패급 낭인 말이군.”

어지간한 왕국에 준하는 영토를 자랑하는 사천땅에도 금패급 낭인은 단 두 명뿐. 그중 한 명인 금파검이 강엽의 소문을 듣고 관심을 가진 것이다.

“금파검은 다른 일로 바빠서 오진 못했네. 흑접의 본거지를 구경할 기회를 놓쳤다면서 아쉬워했어.”

“언젠가 은패급이 되면 만날 수 있을 거다. 은패로 승급하려면 금패가 낸 시험을 통과해야 하니까.”

“시험이라....”

“시험 자체는 대단찮다. 몇 합 정도 겨뤄보고 은패가 될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는 게 전부야.”

강엽도 장경에게 들은 덕에 대략은 알고 있었다. 은패가 되려면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던가?

‘먼저 승급 요건부터 채워야겠지만.’

일전에 받은 홍가려 호위에 이번 흑접 토벌까지 합쳐서 받기로 한 의뢰비는 이만 냥이었다.

이중 일할인 이천 냥을 수수료로 낭인전이 가져가는데, 은천패 승급 요건이 은전 일천 냥이었다.

승급 요건을 넘는 수수료를 받을 시엔 소급이 적용되니, 은패급에 오르면 은인패가 아니라 은지패부터 시작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어쨌든 와줘서 고맙다. 이 빚은 잊지 않겠어.”

“훗, 우리도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너무 마음에 둘 것 없어. 꼭 살아남으라고.”

두 사람이 간 뒤에도 여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다 모였음을 확인한 강엽은 대략적인 계획을 설명한 뒤 칠호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이제부턴 그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 * *

칠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금제를 풀고 자유의 몸이 된 걸로 모자라서 흑접의 적을 총단으로 끌어들일 줄이야.

그녀도 사람인 만큼 한솥밥을 먹은 옛 동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게 편하진 않았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조직을 배신한 것이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용기를 내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조심해서 따라와야 해.”

“정말 이런 데에 흑접이 있는 건가요?”

뒤에서 따라오는 소창후가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칠호를 믿을 수 없어 묻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궁금증을 대변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흑접이 검각에 숨어있어도 그동안 사람들의 눈에 한 번도 띄지 않은 건 말이 안 되잖아.”

“그건 촉도가 좁고 험준해서....”

“그래도 사람들은 많이 다녀. 사천과 한중(漢中)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잖아.”

“가릉강이 있잖아요.”

“당신 바보야?”

“뭐라고요?”

대놓고 욕먹은 소창후가 눈썹을 와락 치켜떴지만 칠호가 아랑곳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가릉강은 광원 위쪽부터는 강폭이 좁고 물살이 가팔라서 배가 못 다녀. 괜히 촉나라 강유가 위나라 십만대군을 막겠다고 검각에 틀어박힌 게 아니야. 육로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니까.”

“그 촉나라도 결국 멸망했잖아요.”

“야, 그건 운빨이지. 솔직히 그때 등애인지 등신인지 하는 놈이 검각을 넘는 미친 짓만 안 했으면....”

두 여자가 옥신각신 다툴 조짐을 보이자 사이에 있는 사람들만 난감해졌다. 혜정 사태가 있었다면 필시 말렸겠지만 그녀는 금정표국과 함께 후방에 남은 상태.

그러나 정작 강엽은 두 사람의 말다툼에 끼어들기는커녕 주변을 살피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 두 분 말씀 나누는 중에 죄송한데 얘기가 좀 다른 데로 샌 것 같습니다만....”

보다못한 청수가 만류하자 칠호가 겸연쩍어하며 크흠 헛기침을 뱉었다.

“아무튼 내 말은 흑접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것은 검각의 지형이 험준해서만은 아니라는 소리야. 술법진(術法陣)으로 총단을 숨긴 거지. 정해진 길로 가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그 안에서 뺑뺑 돌아. 미아 되기 싫으면 내가 걷는 길로만 똑바로 따라오라고.”

청수와 소창후가 입을 다물었다.

술법과 진법이 연계된 술법진은 대방파에서도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종종 쓰이곤 한다.

하지만 흑접이 이 일대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술법진을 구축했다는 이야기는 솔직히 믿기 힘들었다.

두 사람의 낯빛이 심각해지자 하후진이 별것도 아닌 걸로 뭘 심각하게 구냐는 듯이 중얼거렸다.

“흑접이라는 놈이 흑룡교의 술법을 이었다면서? 그럼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 일월신교 놈들도 비슷한 짓거리를 해대서 난 놀랍지 않은데.”

“그쪽 마인들도 장원을 숨겨?”

칠호의 물음이었다. 흑룡교의 술법이야 많이 봤지만 다른 마교의 술법은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뭐, 그런 술법은 아니지만 대개 마교의 술법은 나쁜 쪽으로 거창하니까. 사부가 들려준 얘기로는 흑룡교도 못지않게 악랄했던 것 같고.”

“참, 염왕도문에서 사사했다고 했었지. 네 사조가 흑룡교주를 죽였다며?”

“뭐?”

그 말에 놀란 것은 강엽과 소창후였다.

줄곧 다른 곳에 정신 팔린 듯했던 강엽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후진이 염왕도문 출신인 건 알았어도 흑룡교와 악연이 있음은 처음 알았다.

반면 소창후는 다른 이유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주께서 염왕도문의 계승자라고요?”

흑룡교를 멸문으로 몰아넣은 정마대전엔 구파도 참여한 만큼 흑룡교주와 싸운 절대고수들의 전설은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고 있었다.

“뭐, 그렇지. 나는 사부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지만 말이야. 젠장, 언젠가는 그 노인네를 넘어야 하는데.”

“잠깐, 사부라니? 태사부나 사조가 아니라?”

칠호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흑룡교가 멸문한 지 오십 년이 넘었으니, 상식적으로 따지면 흑룡교주를 죽인 염왕은 이미 천수를 마쳤어야 했다.

하후진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그 노인네 아직도 펄펄하게 살아있다.”

“...사부님의 세수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도 말 몰라. 처음 봤을 때부터 안 늙었거든. 하도 안 늙어서 요괴가 아닌지 의심하는 중이야.”

“반로환동...!”

청수와 소창후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온갖 초고수들이 득실거리는 구파 전체를 통틀어도 반로환동을 한 고수는 한둘이 있을까 말까였다.

강엽만 그러려니 했다.

‘수천 년 산 괴물도 있는데 다시 젊어지는 사람 정도야 뭐....’

물론 하후진의 말은 놀랍지만, 진조에 비하면 반로환동을 한 고수는 상식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 상식도 참 많이 비틀렸어.’

강엽은 속으로 자조적인 쓴웃음을 지었다.

* * *

일행이 멈춘 것은 칠호가 손을 들면서였다.

“저게 내가 말한 이정표야. 흑접에선 쉼터라고 불러.”

“...해골이군요.”

청수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칠호는 계속 걷다 보면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온다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소창후는 불쾌한 낯빛을 감추지 못했고, 하후진은 별 생각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였다.

강엽이 물었다.

“남은 거리가 십 리라고?”

“응.”

“이제껏 그쯤 걸은 것 같군. 그리고....”

강엽이 한쪽에 시선을 주었다.

사전에 들은 칠호의 말대로라면 여기서부터는 특별한 수단을 지녀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른바 통행부(通行符)라 불리는 기물로 진법의 생문을 열어주는 열쇠 역할을 했다.

흑접의 윗선은 살행을 나간 살수들이 적에게 통행부를 빼앗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나갈 때는 주지 않았다. 대신 살행을 마치고 들어올 때 지급했다.

좌우를 둘러본 강엽은 지금까지 알아낸 것을 일행에게 은밀히 전달했다.

[하후진, 동북쪽으로 사십 보. 나뭇가지 위쪽.]

[청수 도장, 서쪽으로 오십 보. 바위 뒤편.]

[소창후, 동쪽으로 육십 보. 수풀 사이.]

강엽도 움직였다.

다행히 흑접으로 가는 길은 머리 위까지 나무들로 우거졌기 때문에 햇볕이 닿지 않았다.

술법진 자체가 숲의 응달진 곳에서 끌어온 음기로 구축된 것이다. 햇볕이 닿으면 흐트러질 수 있어서 일부러 나무로 햇볕을 가렸다고 했던가.

‘나로선 천만다행한 일이지.’

사위가 어두운 덕에 전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암신을 발휘, 일행을 지켜보는 적들의 시선을 속여서 배후를 잡는다.

은신술로 주변 경치에 녹아든 흑접의 살수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강엽을 보고 경악했다.

‘어, 어떻게?’

십수 장 밖에 있던 강엽이 순식간에 그의 앞에 나타나서 심장을 관통했던 것이다.

그가 줄곧 보고 있던 게 허상이라는 것을 몰랐던 살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직후 그의 품을 뒤적거린 강엽은 누런 괴황지에 검은 염료로 무어라 끄적거린 부적을 찾았다.

다른 일행도 살수들을 잡고 통행부를 찾았다.

“뭐야. 네 개밖에 없어?”

“제가 몇 장 더 찾았습니다.”

소창후는 통행부를 혐오감 섞인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흑접에 들어가기 위해 이게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에 한 장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나머지를 몽땅 칠호에게 떠밀었다.

“좋아. 이 정도면 들어갈 수 있겠어.”

가장 중요한 통행부를 찾았으니 이젠 거칠 게 없었다.

칠호를 따라 안쪽 깊숙이 나아간다. 그렇게 십 리쯤 걷자 품에 넣은 통행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깨달은 일행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야.”

칠호가 손짓을 하는 것과 동시에 울창한 숲이 사라지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 지어진 것은 거대한 대장원이었다.

마침내, 흑접의 총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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