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멸문 (2)
가릉강을 거슬러 낭중(閬中)까지 올라간 일행은 그곳에서 조금 더 작은 배로 바꿔 타서 장가진이라는 작은 포구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두 발로 가야 합니다.”
앞서 중경을 출발하기 전에 장경과 상의해서 검문관으로 가는 최단 경로를 짜낸 것이다.
사전에 설명했기 때문에 아미파의 비구니들도 왈가왈부하지 않고 배에서 내렸는데, 그들 전부 승복을 벗고 봇짐 장수로 위장한 차림새였다.
굳이 승복을 입지 않아도 여인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강엽은 칠호를 시켜 그녀들의 옷을 골라주었다.
아무래도 같은 여인이 따라다니는 게 여러모로 편할 테니까.
다들 처음엔 칠호가 옆에 붙어다니자 어색해했지만, 곧 그녀의 솜씨를 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칠호의 손길이 닿은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전혀 딴 사람으로 변모한 것이다.
옷은 그렇다 치고 가짜 수염은 어떻게 구했나 싶었는데 칠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마침 객잔에 공연패가 있길래 슬쩍했지.’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래와 춤사위로 먹고 사는 공연패는 때로 여인이 사내로 분장할 때도 있었는데, 그를 위해 가짜 수염을 붙였던 것이다.
검은 봇짐에 넣고, 창은 창날만 분리해서 마찬가지로 봇짐에 넣었다. 그러자 창대는 지팡이와 호신용을 겸한 목봉(木棒)으로 변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강엽은 박도를, 칠호는 검을 패용한 채 비구니들의 옆에 붙어 다녔다.
‘봇짐 장수를 호위하는 낭인들이라....’
언제 어디서 비적이나 맹수를 만날지 모르는 봇짐 장수들이 호위를 고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빌어먹을 햇볕이지.’
죽립과 피풍의로 몸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뜨거움에 몸이 익어버릴 지경이었다.
절정의 경지에 올랐어도 아직은 햇볕에 노출되는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예전처럼 화상을 입어 수포가 올라오거나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강 시주,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만....”
“배를 타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좀 쉬면 나아지겠지요.”
혜정 사태는 그러려니 했다.
무림 고수라도 흔들리는 배 안에서 며칠씩 생활하면 불편함을 느끼곤 하니까.
강엽은 식은땀을 줄줄이 흘리는 게 배멀미로 고생한 것을 넘어 몸 상태가 나락으로 가버린 것 같지만,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니 뭘 어쩌겠는가?
“너도 인간이긴 인간이구나. 배멀미가 약점이라니....”
칠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흑접의 상위 서열들도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운 괴물의 약점이 배멀미였다니.
“오늘은 객잔에서 쉬고 내일 동이 트기 전에 출발하겠습니다.”
장가진부터 검각은 지척이지만, 태양이 기승을 부리는 이때 적의 앞마당을 기웃거릴 필요는 없으리라.
아미파의 비구니들도 싸우기 전날 정도는 편히 쉬고 싶었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 * *
방을 구하자마자 창문을 닫아 피풍의로 암막을 쳤다.
햇볕이 들어올 구석을 완전히 막아버린 뒤에야 강엽은 좀 살 것 같은 기분에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다른 사람과 함께 다니면 이게 안 좋았다. 혼자라면 편하게 밤에 돌아다닐 수 있거늘.
‘운 좋게 흑무암쇄진을 구해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하면 함부로 쓸 수 없을 텐데....’
흑무암쇄진은 부득이하게 태양 아래에서 싸울 때를 위한 대비책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완전히 극복하려면 햇볕을 견딜 만큼 강해지거나, 다른 수단을 찾는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는데, 별안간 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강 시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깐 기다리시오.”
땀에 절은 옷을 버리고, 미리 챙겨온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야 문을 열었다.
문밖에 있는 사람은 소창후였다.
“내 방엔 무슨 일이시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강엽이 옆으로 비켜서자 소창후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변복했다고 해도 아미파의 여승께서 사내의 방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겠지. 용건이 있다면 기탄 없이 말씀해보시오.”
기세 좋게 들어온 것과는 다르게 소창후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망설였다.
보다못한 강엽이 불쑥 물었다.
“칠호 때문이오?”
“지, 짐작하셨습니까?”
“문을 열었을 때 방을 훑어봤으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신경 썼다는 뜻 아니오.”
일행 중에 그런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속마음을 들키자 소창후는 얼굴을 붉혔지만, 이내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강엽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강 시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 여시주의 일로 부득불 찾아온 겁니다.”
“여기까지 와서 정보의 신뢰를 의심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 여자의 처우 때문이겠군.”
“그렇습니다. 혹시 강 시주께서 크게 마음이 상하시지 않는다면, 일이 마무리된 뒤에 여시주를 어찌하실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왜 궁금하시오?”
“그녀가 흑접의 살수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그녀는 흑접의 살수로서 무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순순히 협조했다고는 하나, 그건 목숨이 아까워서 그랬을 뿐 진심으로 뉘우쳐서는 아니었지요. 섣불리 풀어주면 장차 후환이 될지도 모릅니다.”
“말을 빙빙 돌려서 하시는군. 칠호가 다시 살수짓을 하진 않을지 걱정된다는 말이잖소?”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강엽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자 소창후는 입술을 핥으며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본산에 항마동(降魔洞)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악인들을 가두는 뇌옥이지요.”
불살계에 묶인 아미파의 제자들은 죽음으로 다스려야 할 악적도 죽이지 못했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면 항마동에 가둬서 세상과 단절시킨다.
“칠호를 항마동에 데려가겠다?”
점점 짧아지는 말 속에 불편한 심기가 담겨 있었지만 소창후는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그녀가 지난날의 죄를 뉘우친다면 풀려날 것입니다. 단전을 폐하겠지만 말입니다.”
단전을 부순다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했다. 인생을 바친 적공이 사라지는 셈이다. 무인에게는 죽음보다 가혹한 형벌이었다.
“물론 칠호 시주는 참작할 여지가 있습니다. 금제로 인해 명령을 어길 수 없었고, 흑접에 대해 말한 공로도 있지요. 단전을 폐하더라도 이상이 없도록 세심히....”
“웃기는군.”
입매는 올라갔지만 북풍한설처럼 싸늘한 눈빛은 오히려 짙은 노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소창후의 안색도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방금 그 말은 아미파 전체의 뜻이오, 아니면 당신의 뜻이오?”
“그건....”
“아미파의 결정이라면 혜정 사태가 왔겠지. 왔어도 일이 다 끝난 뒤에 왔을 거고.”
설령 혜정 사태가 어린 사매와 뜻을 같이한다고 해도, 중요한 싸움을 앞둔 시점에서 괜히 대립각을 세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진 않을 터.
물러날 구석이 없음을 깨달은 소창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강 시주를 찾아온 건 제 뜻입니다. 하지만 죄를 저지른 자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일단 분명히 짚고 넘어가지. 나는 딱히 칠호를 옹호하거나 변명할 생각은 없소.”
“그렇다면....”
“하지만 나는 일이 끝난 뒤에 자유를 주겠다고 했소. 그래야만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난 내가 한 말을 반드시 지킬 것이오.”
“그로 인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겨도 말입니까?”
“그건 두고볼 일이지. 어쩌면 당신 말대로 뉘우쳐서 살수짓을 때려칠지도 모르지 않소?”
“무책임하시군요.”
“흑접을 물리치고 나면 칠호가 어찌 살든 관심 없소. 그러니 잡아가고 싶으면 그 뒤에 알아서 하시오. 괜히 날로 먹을 생각은 마시고.”
강엽이 철벽을 쳤음에도 소창후는 칠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 말씀이 진심이기를 바랍니다.”
도전적인 눈빛을 던진 소창후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강엽은 방 한 구석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제 나와도 된다.”
“...젠장, 금방 들켰네.”
구석진 음영에서 신기루처럼 튀어나온 칠호가 심통이 난 얼굴로 작게 투덜거렸다.
처음부터 방에 있었던 게 아니라,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는 것을 듣고 조심스레 들어온 것이다.
“소창후는 눈치 못 챈 것 같은데.”
“하, 그거라도 위안으로 삼아야지 뭐. 나중에 저 년이 쫓아오면 열심히 도망쳐야 하는데.”
그녀가 자신의 방과 멀리 떨어진 강엽의 방을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흑접을 치기에 앞서 계획에 빈틈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변수를 줄이기 위함.
그러나 소창후의 일 때문인지 칠호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문 쪽을 돌아봤다.
“아까 그 여자는 독단으로 찾아온 거다. 흑접을 없애기 전까진 널 어쩌지 못해.”
“...흠흠, 그렇게 신경 쓰는 건 아니야.”
칠호가 애써 표정을 다잡았다. 하나도 설득력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강엽은 더 걸고 넘어지진 않았다.
“일이 끝나도 쫓아오지 못할 거다. 도움이 되니 끌어들이긴 했지만,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려는 꼬라지가 뭣 같아서 말이야.”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칠호는 대강 알아듣고 키득거렸다.
“너무 골탕 먹이진 말라고. 나중에 아미파의 차기 장문인이 될지도 모르는 여자잖아?”
* * *
험준한 산령과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검각은 섬서와 사천의 경계인 대파산맥(大巴山脈)의 일부였다.
새벽 일찍 객잔을 나선 강엽 일행은 동이 트기 전에 검문관 근처에 도착했다.
“여기가 검문관이군.”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더 험악한 산세에 강엽이 혀를 내둘렀다.
대검산과 소검산 사이에 놓인 성문.
당나라 이백이 ‘한 사람이 관문을 지켜도 만 명이 뚫지 못한다’는 촉도난(蜀道難)의 시를 남긴 게 괜한 이유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흑접은 이런 검각에서도 깊숙한 곳에 꽁꽁 숨었으니 본거지가 드러나지 않을 수밖에.
“이 새끼 드디어 찾았다!”
멀리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강엽이 고개를 돌렸다. 하후진과 청수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이 자식아, 갑자기 여기로 오라는 말만 남기고 가버리면 끝이냐! 찾아오느라 개고생...!”
하후진이 말하다 말고 침을 꿀꺽 삼켰다.
청수도 놀란 얼굴로 일행을 바라봤다.
“아미파의 분들께서 여긴 어쩐 일로....”
혜정 사태가 사원루에 찾아와 홍가려를 데려갔기 때문에 아미파와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혜정 사태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장문인께서 제때에 명하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사태께서 도와주신다면 천군만마와 같을 겁니다!”
이후 소창후 등 다른 아미파의 제자들과도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칠호를 돌아보며 의아해했다.
변복을 푼 아미파의 비구니들과는 달리 칠호는 아직도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후진이 물었다.
“체형을 봐선 여자 같은데 누구여?”
“우리를 여기까지 이끈 일등공신.”
“엉?”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하후진과 청수가 눈을 게슴츠레 뜨자 칠호가 한숨을 쉬고 죽립을 벗었다.
반짝이는 햇살 아래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이 나오자 두 청년이 뜨악했다.
“뭐야, 이 미녀는!? 우리가 발바닥에 땀띠 나게 뛰어다닐 동안 넌 여자랑 헬렐레 놀았던 거냐!”
“실망입니다, 강 도우!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 우정이 그것밖에 안 됐습니까?!”
두 사람이 무척이나 억울해하며 호들갑을 떨자 다들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내심 청수를 무도의 경쟁자로 여겼던 소창후는 귀를 의심했고, 강엽은 이마를 덮으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한심한 짓은 니들이 하는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