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86화 (85/450)

14화. 멸문 (1)

가부좌를 튼 강엽이 천천히 눈을 떴다.

집은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챙길 것만 챙겨 다시 청송객잔을 찾아갔고, 장경에게 안가를 빌려 쭉 운기 삼매경에 빠졌다.

다행히 안가 한 켠에 외부와 격리된 연공실이 있었기에 수련하는 데는 문제 없었지만....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군.’

오호의 선천지기를 소화하는 데만 집중해서 며칠 밤낮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잠시 붉은 안광이 스쳐지나갔다가 차분히 갈무리되었다.

오호의 막대한 선천지기를 소화했다고 그의 내공을 모조리 갈취한 것은 아니다.

혈공진기의 성취가 높아질수록 내공을 쌓는 것 역시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십 년 공력인가.’

이로써 그의 내공은 총 백십 년의 수위에 육박했다. 십 년 적공만 더 쌓으면 이갑자의 내공을 쌓는 것이다.

오호의 선천지기를 전부 흡수한 건 아니니 이대로 시간만 흘러도 이 갑자 내공을 얻으리라.

강엽이 절정고수들을 많이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동급의 고수들 중 자신 같은 내공을 쌓은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강호 무림이 넓고 기인이사가 많다 하나 이 갑자의 내공을 쌓은 고수들이 얼마나 되겠나. 사마외도의 무공이 축기 속도가 빠름을 감안해도 혈공진기는 비상식적이었다.

‘강호인들이 알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겠지.’

마공을 위험시하는 백도 정파의 협객이든, 힘을 탐하는 사마외도의 마인이든, 혈공진기의 비밀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온 사방에서 달려들 터.

그렇기에 이 힘을 쓰면서도, 힘의 연원은 철저히 숨겨야 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들킬 게 두려워서 멈출 순 없다.’

반년간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해졌지만, 세상엔 자신보다 강한 고수들이 수두룩했다.

피를 마셔야 연명할 수 있는 처지 때문에 강호를 등질 수 없다면, 그 누구에게도 죽지 않을 만큼 강해지는 것 말고 무슨 선택지가 있겠나.

천형에서 벗어나는 그날까지는, 모든 것을 걸고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설령 도중에 쓰러진다고 해도.’

흑접을 치는 것 역시 그 일환이었다.

놈들이 흑무암쇄진이 갖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포기할 수 없었다.

충분히 쉬었으니 이젠 다시 싸울 때였다.

가부좌를 풀고 밖으로 나갔다.

* * *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처마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을 힐끔 올려다본 강엽은 햇볕이 비추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 뜻밖의 광경을 발견하고 눈가를 좁혔다.

칠호가 탕약기 앞에 쪼그려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람을 후후 불다 연공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흠칫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 나, 나왔어?”

“뭐 하나?”

“흠흠, 의원이 뼈에 좋은 약재를 주고 가서....”

“...의원이 왔다고?”

“응. 장경이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묻던데. 누구 덕분에 팔이 부러져서 몸이 불편하잖아.”

칠호가 독단적으로 안가에 의원을 불렀다면 문제였지만, 장경이 보냈다면 뭐라고 할 건덕지가 없었다.

그때 칠호가 콧잔등을 잡고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야, 거기서 청승 떨지 말고 좀 씻고 와. 너 지금 엄청나게 냄새 나거든?”

흑접의 살수들과 싸운 직후부터 도망치듯 안가에 숨어 폐관에 드는 바람에 씻지도 못한 것이다.

강엽도 자기 몸에서 악취가 난다는 자각은 있었는지라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며칠이나 지났지?”

“닷새.”

그렇게 오래 있었다고?

강엽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칠호가 어깨를 으쓱 추어보였다.

“장경은 너 내상 입은 거 아니냐고 닦달하던데.”

그러나 섣불리 방해하면 강엽을 방해할지도 몰랐기에 밖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강엽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오르자 칠호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그 능력 말인데... 내상에도 효과가 있지?”

그녀와 싸웠을 때 강엽은 큰 부상도 너끈히 재생했다. 내상을 치유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강엽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장경은 몰랐던 거구나.”

“그래.”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뻔하다.

비밀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입막음이니, 일이 끝난 뒤가 걱정스러운 것이리라.

지금은 쓸모 있어서 데리고 다니지만, 흑접을 몰살시키면 그녀의 쓰임새는 사라지지 않겠는가?

쪼그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칠호의 얼굴을 본 강엽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비밀을 지키려면 널 죽이는 게 가장 쉽겠지.”

살인멸구를 염두에 뒀다는 것을 숨기진 않았다. 거짓말로 그녀를 속일 순 없다고 판단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더군. 소문이 난다면 십중팔구는 네가 퍼뜨렸을 텐데, 네가 어딜 가든 난 널 찾을 자신이 있거든.”

물론 혈종술도 완벽한 대책은 아니다. 하지만 칠호는 혈종술에 대해 잘 모른다.

흑접의 천리추영법처럼 혈종술 역시 반 영구적으로 유지된다고 생각한 그녀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씁, 술김에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해야겠네.”

글쎄, 술김에 그딴 소리를 나불대면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강엽이 작게 실소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흑접이 그랬듯 금제를 거는 거지만, 이쪽 분야는 잘 알지 못했다.

흑접의 금제를 풀면서 단초를 잡긴 했지만 완전히 통달하려면 적잖은 시간을 들여야 할 터.

비밀을 지키는 건 중요하지만, 칠호의 입을 막자고 그것만 신경 쓰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씻고 청송객잔에 간다. 준비해.”

“...응.”

* * *

장경은 강엽이 칠호를 대동하고 들어오자 안색을 쫙 펴고 반갑게 맞이했다.

“언제 오나 눈 빠지게 기다렸다.”

“걱정 끼쳤다면 미안하다. 내상을 입은 건 아니었어.”

“뭐, 저 여자도 그렇게 말했지. 그보다 인원이 다 모였어. 사천에 있는 분타들을 싹싹 긁어모았다. 네가 원하면 당장 출발할 수 있어.”

강엽이 이채를 띠었다.

“몇 명이나?”

“은패급 열여섯 명. 전원이 은지패급 이상이고, 두 명은 은천패급이야.”

“하후진과 청수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이군.”

“금정표국의 대표두가 정예 표사들 백 명을 끌고 왔어. 강호에 퍼진 명성만 보면 그도 은천패급이야.”

장경이 엄지로 식당을 가리키자 상투를 튼 초로인이 황색무복을 입은 사내들과 함께 일어났다.

그들의 가슴팍엔 소속을 알려주는 금정(金頂)이라는 청색 글씨가 흩날리듯 새겨져 있었다.

“인사해. 이쪽은 금정표국의 대표두인 황인검(荒忍劍) 고석형. 고 대표두, 이쪽이 요즘 저희 분타에서 명성 자자한 귀영입니다.”

“고석형일세.”

“강엽입니다.”

서로 포권을 나누자마자 강엽은 초음으로 황인검의 단전을 살펴봤다.

사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표국의 대표두인 황인검의 내공은 일 갑자를 헤아렸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에 미치진 못하지만....’

하지만 내공만 많다고 무조건 강한 것도 아니다. 초식과 투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리고 초식을 펼칠 상황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면 내공이 많아도 소용없었다.

게다가 황인검에게 기대하는 것은 표사들을 이끌어 흑접의 일반 살수들을 상대하는 것이지, 상위 서열들과 드잡이를 벌여 쓰러트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 건 강엽을 비롯한 낭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이 젊은이....’

한편 황인검 역시 강엽을 살펴보며 나름대로 그의 무공을 재단하고 있었다.

‘당혹스럽군. 도저히 가늠하지 못하겠어.’

표사로 일하면서 강호의 고수들을 만나보고 대표두가 되어 유망한 표사들을 손수 지도했기 때문에 고수를 알아보는 안목은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강엽에게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젊은이가 이만한 경지에 올랐다니.’

질투나 의심을 하진 않았다. 오히려 강엽이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 강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전대 국주를 죽인 원수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사실 흑접의 본거지를 찾았다는 말을 들었을 땐 믿지 않았네. 아니, 믿을 수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군.”

“이해합니다. 지난 수십 년간 아무도 흑접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당연히 낭인전의 분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허언을 일삼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네. 그래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알려주겠나?”

“금정표국의 국주를 누가 죽였냐는 겁니까?”

“...알고 있나?”

황인검은 아미파와 입장이 다르다. 그에겐 국주를 죽인 흉수를 알 권리가 있었다.

“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알고 있습니다.”

“음?”

강엽이 칠호를 가리키자 황인검의 이맛살에 깊은 골이 패였다. 곧 그가 무언가를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흑접의 간부인가?”

흑접의 간부를 잡았다는 것은 들었지만 설마 이토록 젊은 여인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칠호가 입맛을 다시면서 죽립을 들어올렸다.

“젠장, 설마 나도 자기 소개를 해야 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드러나자 황인검과 함께 온 젊은 표사들은 일순 넋이 나갔다.

황인검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칠호를 지그시 노려봤다.

“묻겠다. 소저가 우리 국주님을 죽였나?”

“아닌데요. 전 그쪽 표국 근처도 안 갔어요.”

“그럼 누구지?”

“그쪽 표국주가 어떻게 죽었는데요?”

“...독살당하셨다. 줄무늬 같은 검은 반점이 온몸을 덮었지. 주모께서도 같은 방식으로 돌아가셨고.”

“흑각선문(黑刻線紋). 이호가 즐겨 쓰는 독 중 하나죠. 비상(砒霜)에 다른 독들을 배합한 건데, 중독당하면 무림 고수조차 반각 안에 죽어요. 오장육부가 굳고 사지백해의 근육이 뒤틀려서 비명도 못 지르고요.”

“이런 찢어죽일...!”

듣기만 해도 얼마나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갈지 알 수 있었다. 황인검과 표사들이 분노를 짓씹었다.

“이호와 싸울 거면 조심해야 할 걸요. 그 작자는 일 대 다수의 싸움에도 능하거든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다.”

강엽은 황인검의 힘만으로는 상위 서열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흑접에 쳐들어가면 누가 누구를 상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와 싸울지도 모르지.’

그때 장경이 입맛을 다셨다.

“아미파도 합류하면 좋은데 말이야.”

“그쪽은 시간이 걸리니까.”

아무리 날카로운 보검이라도 쓸 수 없다면 없는 것만 못하다. 아미파의 도움을 받겠다고 밑도 끝도 없이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혜정 사태는 약속을 지켰어. 홍가려를 아미파로 데려갔거든. 덕분에 하후진과 청수 도장이 편히 쉬는 중이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올 거야.”

“내일 아침에 출발하지.”

“그렇게 빨리?”

“이미 닷새나 날렸어. 흑접은 바보가 아니야. 시간을 주면 놈들도 낌새를 챌 거다.”

“하긴.”

“하나 더. 따로 가는 게 낫겠어. 그쪽 일대는 흑접의 텃밭이니 분명히 감시하고 있을 거다.”

다 같이 가면 눈에 띄겠지만, 삼삼오오 가면 촉도를 통해 섬서로 가는 행객처럼 보일 터.

‘사실은 내 문제를 감추기 위해서지만 말이야.’

밤에 이동할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황인검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집결 장소는?”

“검문관(劍門關) 근처.”

* * *

강엽은 가릉강의 뱃길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중경에서 장강과 만나는 가릉강은 사천 최북단인 광원(廣元)까지 이어진다. 검각은 광원의 아래쪽에 있으니 그전에 내려서 육로로 올라가면 된다.

그렇게 선착장에 다다랐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이 왜 여기에...?”

강엽과 칠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혜정 사태를 비롯한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운 좋게도 황인검 고 시주를 만나서 사정을 들었습니다. 흑접을 치시러 가신다고요.”

“말릴 생각이십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

“장문인께서 낭인전을 도울 것을 명하셨습니다.”

“중지를 모아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장문인께서 이곳 상황을 들으시고 서둘러 다른 분들을 설득하셨습니다. 하나 빈니들은 불살계를 어길 수 없는 몸. 강 시주께서 허락하시면 살수들을 죽이는 싸움보다는 금정표국을 지키는 싸움을 하려고 합니다.”

아미파 입장에서 금정표국은 대를 이어 인연을 맺은 소중한 우방이었다.

비록 복수에 앞장서진 못하더라도 전멸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좌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말은 저렇게 해도 완벽히 지키지는 못하겠지.’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아군을 지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미파 비구니들의 무공이 대단해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순 없으리라.

칠호가 소곤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받아들여야지. 사태의 뜻대로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혜정 사태가 염불을 외며 합장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이 아이는 흑접을 토벌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했습니다.”

“소창후가 말입니까?”

강엽이 의외라는 시선을 보내자 소창후가 창으로 바닥을 쿡 찌르면서 늠름하게 말했다.

“탕마멸사는 복호승들의 의무입니다!”

강엽이 속으로 혀를 찼다.

힘을 보태면서도 흑룡교의 비술이 바깥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막는 임무를 받은 것이겠지.

‘거절할 명분이 없군.’

한 명이 아쉬운 이때 절정고수의 참전은 큰 보탬이 된다. 그리고 한 명 정도는 속일 자신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 지시를 따라주셔야 합니다. 특히 지금은 반드시 따라주셔야겠군요.”

“지금부터 말입니까?”

“예. 꼭 필요한 일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변복부터 하십시오.”

“...?”

“군중의 이목이 있지 않습니까. 스님들이니 승복을 입는 건 이해하는데, 아미파가 흑접을 친다고 동네방네 소문내실 겁니까?”

“...!”

그제야 강엽의 말뜻을 알아들은 아미파의 비구니들은 민망한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