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85화 (84/450)

13화. 흑접 (10)

칠호는 헛숨을 삼켰다.

‘미쳤어.’

강엽이 도망쳤을 때만 해도 괴물같은 놈이라도 한 자릿수 두 명을 상대론 승산이 없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웬걸. 삼호와 오호가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자 나방과 박쥐 떼가 출몰했다.

삼호와 오호가 그렇듯 그녀 역시 저것을 시충술 비슷한 술법이라고 생각했다.

‘왜 사자염도나 선풍룡을 안 데려오나 했더니.’

처음부터 여차하면 두 사람을 숲으로 끌어들여 판을 뒤집을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리라.

적이 얼마나 많든 일단 숲으로 끌어들인다면 각개격파를 할 심산이 아니었을까.

설령 적이 예상보다 강하거나 많아도, 저런 식으로 눈가림을 하면 도망칠 자신이 있었겠지.

그 심계에 감탄하면서도, 그녀는 시선을 멀리 향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 당장 오지 못하겠나!”

가식적이나마 적 앞에서도 예의를 지켰던 삼호가, 체면이고 뭐고 내팽개친 채 미쳐 날뛰는 광경.

도기를 싣은 칼날을 사방팔방 휘두르며 나방과 박쥐 떼를 쫓아내는 추태에 위엄 따위는 없다.

오히려 좌절과 두려움, 절박함이 한데 어우러진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보나마나 폭혈을 쓴 거겠지. 멍청한 자식.’

잠력을 격발한 이상 삼호는 이미 끝이었다.

당장 폭혈을 멈추고 몸을 추스른다면 모를까, 시간을 지체한다면 확정된 파멸을 맞이할 뿐.

그렇기에 강엽도 까다로운 삼호는 내버려두고 오호부터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가 있는 곳에선 강엽과 오호의 싸움이 보이지 않았지만, 누가 이길지는 불 보듯 뻔한 일.

한데 그때였다.

“거기냐!”

“엉?”

칠호의 눈썹이 작게 굽혀졌다.

놀랍게도 삼호가 그녀가 숨은 곳을 향해 살기 가득한 포효를 터뜨렸던 것이다.

‘쳇, 폭혈 때문에 기감도 좋아졌나?’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나무 위로 뛰어오르는 삼호를 피해서 그녀는 냉큼 뛰어내렸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마음이 급해진 삼호는 자신이 쫓는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무작정 뒤쫓았다.

쏴아아아아!

거친 경파가 수풀과 나무를 썩둑 잘라버렸다.

간발의 차로 위기를 모면한 칠호는 몸서리를 쳤다.

‘썅, 저 새끼 완전히 눈깔 돌아갔잖아!’

눈에서 검은자위는 사라지고, 얼굴은 핏줄이 도드라진 채 시뻘게져서 흉물스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삼호가 강맹한 도격을 내치며 외쳤다.

“도망치지 마라!”

“에라이! 이 미친놈아!”

땅을 구르며 칼날을 피한 칠호가 기어이 한마디 내뱉자 삼호가 주춤거렸다.

“이, 이 목소리는... 설마?”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흑접의 장로는 칠호가 죽었다고 했는데!

“네놈이 또 간악한 수작을 부리는구나!”

“수작은 지랄.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말고 눈이나 똑바로 떠, 등신아!”

물론 그렇게 말해도 삼호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아예 안 보이는 것은 아닌지 삼호는 유심히 칠호를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칠호가 맞군. 죽립 때문에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미치겠네. 강엽 그놈은 죽립 따위 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헷갈릴 수가 있어?”

“강엽? 귀영을 말하는 건가? 그놈을 봤나?”

“알면 뭐 어쩌려고.”

“시간이 없다, 칠호. 너도 협력해라. 오호가 죽기 전에 그놈을 찾아야...!”

돌연 삼호가 말끝을 흐리고 칠호를 노려봤다.

“잠깐. 금제가 발동됐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금제가 발동된 게 아니었나?”

“...아니, 금제는 발동됐어.”

마주친 이상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죽기 전에 풀었지. 덕분에 난 자유의 몸이 됐어. 네 반응을 보니 흑접은 금제가 풀렸다는 사실까진 몰랐던 것 같네.”

“마, 말도 안 된다. 그건 불가능해. 그건....”

“그래, 나도 그렇게 알았지. 근데 아니더라. 귀영은 흑접의 금제를 풀 수 있어.”

“....”

전혀 예상치 못한 정보를 들은 삼호는 머리가 돌처럼 굳어지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짓씹듯 내뱉었다.

“거짓이다. 간악한 술법으로 나를 현혹하지 마라. 칠호의 얼굴로 나를 속이려 하다니!”

“흑접의 총단은 검각에 있어.”

“...!”

“원래라면 우리끼리도 금제 때문에 내뱉을 수 없는 말이지. 금제가 그렇게 유연하진 않잖아?”

“어, 어떻게....”

눈앞에 있는 게 귀영의 술수라면 흑접이 검각에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불현듯 삼호의 뇌리에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흑접에 대한 정보를 몽땅 귀영에게 불었나?”

“....”

침묵이 무언의 시인이었다.

삼호가 침을 튀기며 분노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거냐!”

“뒈지기는 싫었거든. 솔직히 흑접이 우리 목숨을 바쳐가며 충성할 조직은 아니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조직을 배신했다. 그걸 안 이상 살려둘 순 없어.”

삼호가 칼자루를 고쳐잡고 접근했다.

“반항하지 마라. 보아하니 너도 몸이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맞서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

그녀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무기가 없으니 맞설 수 없고, 도망쳐도 지금의 몸으로는 금방 따라잡힐 게 뻔했다.

그렇게 삼호가 처단의 칼날을 내치는 찰나, 그의 안색이 크게 꿈틀거리더니 선지피를 웨엑 토해냈다.

칠호의 눈이 번뜩였다.

‘한계에 달했구나!’

폭혈의 부작용이 한계를 넘어 도리어 삼호의 목숨을 갉아먹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칼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몸을 지탱한 삼호가 부들거리면서 칠호를 노려봤다.

“네년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야.”

진심이었다. 배신했어도 옛 동료가 끔찍한 몰골로 죽어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항복할 생각은 없어? 지금이라도 폭혈을 풀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흥, 어차피 난 틀렸다.”

무리하게 폭혈을 운용한 탓에 원기가 크게 상했다. 폭혈을 푼다고 해도 수명이 크게 줄었을 것이다.

그 순간, 삼호는 사신이 등 뒤까지 다가온 것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오지 말라고 했건만.”

익숙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삼호는 필살의 기세를 담아 칼날을 내쳤지만, 이전과는 달리 힘이 없었고 정확하지도 않았다.

그전에 뒷꿈치를 걷어차여 몸의 균형을 잃었고, 손목은 강엽에게 잡혀 높게 들렸다.

우드득!

경력이 듬뿍 담긴 괴력이 삼호의 호신기를 손목과 함께 으스러뜨렸다. 이를 꽉 물고 고통을 감내한 삼호의 뒤통수에 강엽의 일권이 작렬했다.

앞으로 고꾸라진 채 미동도 없는 삼호의 몰골.

“.......”

옛 동료의 죽음에 비애감을 느낄 새도 없이 칠호는 강엽과 시선이 얽히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온몸으로 풍겨대는 요사스러운 기운이 심신을 자극했다. 살갗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마음이 미친 듯이 몰려오는 한편 정신이 혼미해졌다.

강엽이 오호의 피를 마신 직후 곧장 왔기 때문에 흡혈귀의 기운을 갈무리하지 못한 것이다.

“설마 날 돕겠다고 온 건 아닐 테고.”

“아, 그, 그게....”

안색이 허옇게 질린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칠호를 가만히 들여다본 강엽이 무심하게 등을 돌렸다.

칠호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그냥 넘어간다고?”

“도망치지만 않았으면 됐어.”

그 말에 칠호는 다짜고짜 도망치지 않은 자신의 신중함에 박수를 보냈다.

아예 들키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러면 재미없을 거다.”

흑접을 칠 때까진 칠호가 살아있어야 한다.

자세한 위치를 듣긴 했어도 무사히 들어가려면 그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니까.

“으, 으응. 그럴게.”

“집에 가서 시체나 챙겨. 이놈들 말고 세 놈이 더 죽었는데 여기 묻을 거다.”

지은 죄가 있는 칠호는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의 기척이 멀어지고 나서야 강엽은 삼호의 시체를 자세히 살펴봤다. 한꺼번에 과도한 선천지기를 소모한 영향으로 삼호는 고목처럼 말라 비틀어졌다.

머리가 활화산처럼 솟은 채 미쳐 날뛰던 아까와는 괴리가 느껴지는 몰골.

‘선천지기는 거의 없군.’

느껴지는 피맛이 하수들보다 못한 게 피를 다 마셔봤자 쓸모는 없을 듯싶었다.

‘이로써 남은 상위 서열은 여섯.’

흑접에 쳐들어가기 전에 상위 서열 두 명을 미리 처치한 것은 다행이었다. 저쪽의 전력을 미리 줄여놓을수록 이쪽의 승산이 더 커진다.

여전히 만만히 볼 수 없는 전력이지만, 장경이 낭인전의 은패급 고수들을 모은다면 해볼 만했다.

‘하지만 저쪽도 두 놈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 슬슬 위기감을 느끼고 있겠지. 지금처럼 상위 서열들만 찔끔찔끔 보내주면 가장 좋겠지만....’

강엽의 손에만 상위 서열 세 명이 죽었다. 옛날에 자성검호를 죽였을 때처럼 떼거지로 몰려온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무조건 그전에 쳐들어간다.’

***

장로는 흑접의 모처로 향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그곳은 상위 서열들조차 출입할 수 없는 금지였다.

함부로 발을 들이민다면 죽음의 절진이 발동되어 온몸이 난자당할 터.

“.......”

짐짓 몸가짐을 바로 잡은 장로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 넓은 공동에 이르러 납작 엎드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랜만이군, 장로.”

칠흑같이 어두운 공동에서 울리는 중저음에 장로는 머리를 더욱 깊게 조아렸다.

“미천한 몸이 삼가 접주님을 배알하옵니다.”

“고개를 들라. 그대가 찾아왔다는 건 내게 고해야 할 중대사가 생겼다는 뜻이 아닌가?”

“...송구합니다. 노신이 부덕하여 감히 접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말았습니다.”

“됐으니 무슨 일인지나 말해보도록.”

“예. 실은....”

장로의 입을 통해 저간의 사정을 들은 흑접주의 눈빛에 깊은 흥미가 어렸다.

“상위 서열 중 네 명을 잃었다는 건가.”

“두 자릿수 역시 스무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피해가 꽤 막심하군.”

“...면목이 없습니다.”

“대책은?”

“본접의 상위 서열들을 모두 동원하여 귀영을 처단하고, 이후에 해어화를 죽이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무작정 쳐들어가는 게 능사는 아니지. 놈을 함정에 빠트릴 방법이 있나?”

“의뢰를 가장하여 꾀어낼 것입니다.”

단일지명 의뢰를 넣어 강엽을 사지에 끌어들여 상위 서열들을 비롯한 흑접의 정예들을 대거 투입한다. 과거 자성검호를 죽였을 때 썼던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해어화의 암살을 의뢰한 자에게 양해를 구해야겠지요. 그건 노신이 맡겠습니다.”

“의뢰인이 누구지?”

“장안대상회의 대공자입니다. 미녀의 시체로 인형을 만들어서 수집하는 게 취미를 갖고 있는 놈입니다.”

“부족한 것 없이 태어난 놈이 악취미를 가졌군. 뭐, 그거야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어쨌든 암살 의뢰는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그것은 흑접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고, 나아가 그들의 염원이 걸린 일이었기에.

“아무튼 귀영이라는 놈이 그리 강하다면 내가 직접 싸워보고 싶군.”

“존귀하신 분께서 어찌 아랫것들의 일에 나서신단 말씀입니까. 노신이 맡겠습니다.”

“아니. 나도 간만에 성취를 얻어서 실전에서 써보고 싶던 참이다. 상대가 본접의 적수라면 더할 나위 없을 터.”

“아...!”

장로의 입에서 경탄성이 터졌다.

가부좌를 튼 흑접주의 전신에서 자줏빛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감축드립니다, 접주님! 마침내...!”

“새로 익힌 무공을 시험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내 뜻에 반대하지 말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접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장로가 감격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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