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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82화 (81/450)
  • 13화. 흑접 (7)

    칠호는 생각 같아선 넌 친구 있냐고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배석한 사람 때문에 그러진 못했다.

    어찌 보면 그녀는 죄인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난풍혜검이 염주를 굴리면서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빈니가 번뇌에 사로잡혀 괜한 질문을 했군요. 불자가 입에 담아도 될 질문이 아니었거늘.”

    기실 누가 금정표국의 국주를 죽였는지 알아도 사사로운 원한만 쌓일 뿐.

    흑접을 징치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난풍혜검은 방금의 질문이 자신의 잘못이었노라 말하고 있었다.

    “빈니의 질문은 잊어주십시오, 시주.”

    “어... 그, 그래도 살해 수법을 알면 누군지 알 수도 있는데요? 그놈들한테 의리 지키려고 모르는 척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아닙니다. 알아봤자 번민만 늘어날 터. 그럼 모르는 게 약이지요.”

    그 말에 강엽이 눈을 빛냈다.

    ‘원한 때문에 온 건 아니라는 말이군.’

    하긴 정종 불문인 아미파가 부처의 가르침을 뒤로하고 살계를 여는 것도 어딘가 이상했다.

    비록 상대가 마교의 비술로 청부살인을 일삼는 흑접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수수방관하진 않겠지. 싸움판에 끼어들 텐데....’

    문제는 흑접을 토벌한 이후다.

    단순히 흑접을 징치하는 것에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아미파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만약 흑룡교의 비술을 없애거나 회수할 요량이라면, 자신의 목적에 방해가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그 의심을 확인시켜주듯, 이후의 질문은 주로 흑룡교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흑접이 흑룡교의 비술을 얻은 과정, 현재 보유한 비술의 종류와 효과 등.

    칠호도 전부 알지는 못했기에 어떤 질문엔 답하지 못했지만, 난풍혜검은 개의치 않았다.

    강엽이 그랬듯 흑접의 위치를 마지막으로 물은 그녀는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타는 듯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로 입가심을 한 그녀가 강엽을 향해 치하의 말을 건넸다.

    “흑접의 살수를 생포한 예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런 적은 몇 번 있었지요. 흑접이 어찌 마교의 비술을 얻었는지, 그들의 본거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짐작하시다시피 그들의 머리에 새겨진 금제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미행이나 추종 등의 방법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요.”

    “그렇습니까?”

    “예. 강 시주께서 참으로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혹시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 금제를 푸셨는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

    강엽은 말없이 찻물만 들이켰다.

    사실대로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망혼소나 초음의 공능은 남에게 말할 만한 공부가 아니었다.

    “제가 익힌 음공 덕분입니다. 사문의 공부라 자세히 말씀드리진 못하겠군요.”

    “아... 그렇군요.”

    깊이 아쉬워하면서도 못내 납득한 눈초리였다.

    혹시 흑접의 금제에 뭔가 허점이 있는 게 아닐까 기대한 것이겠지만 그런 건 없었다.

    강엽이 칠호의 금제를 풀었던 건 실상 우격다짐에 가까웠다. 망혼소와 초음에 머리카락으로 모직을 짜듯 혈공진기를 세심하게 운용한 덕이었으니까.

    셋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칠호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으리라.

    “저도 몇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 질문하시지요.”

    “사태께서 아미의 제자들을 이끌고 하산하신 것은,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까?”

    “일단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저희가 흑접에 대해 옅게나마 파악한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믿는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다만 본산 차원에서 나서려면 장문인과 장로님들께서 중지를 모으셔야 하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수 있다는 점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겁니까?”

    “...예, 송구합니다.”

    흑접을 치는 것을 동의하더라도, 어떤 인선을 보낼지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난풍혜검이 난감한 어조로 말했다.

    “강 시주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참 면목 없지만... 모든 분들께서 흑접을 치는 것에 동의하신 건 아닙니다. 흑접을 토벌하는 일이 중생구제가 맞는지 의문을 제기하신 장로님들도 계십니다.”

    흑접이 타도해야 할 악이라는 것과 별개로, 불가의 불살계(不殺戒)를 어기는 게 아닌지 저어되는 것이다.

    속세의 강호인들이 보면 답답해할지 몰라도, 아미파가 불문의 정체성을 지닌 한 어쩔 수 없는 고민이었다.

    본산이 나서는 건 탁발이나 만행을 나온 제자들이 불의를 보고 협을 행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사였다.

    “반대를 하는 장로님들은 흑접을 토벌하는 것은 청성이나 당문과 의견을 나누되, 세 문파가 합심하여 무림맹에 건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강엽과 칠호는 어이가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시간을 달라는 말이라니?

    장경도 고개를 내저었다.

    “사태, 시간이 지나면 놈들도 알 겁니다.”

    흑접의 눈과 귀는 사천 전역에 퍼져 있다.

    아무리 신중을 기해도 낭인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강엽은 칠호를 흘깃 바라보았다.

    마침 칠호도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흑접은 이미 우리가 자기네들 뒷조사를 한다는 걸 눈치챘을 공산이 커. 놈들이 우리 예상보다 더 빠르게 행동하는 것도 계산해둬야 해.”

    “뭐? 벌써 안다고? 어떻게?”

    강엽이 칠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금제가 발동되면 흑접의 장로라는 늙은이가 그 사실을 바로 안다더군. 이미 두 명이나 금제가 발동됐는데 바보가 아니라면 당연히 알겠지. 어쩌면 금제가 풀린 것까지 알았을 수도 있고.”

    여기에 아미파나 무림맹까지 끼어 흑접을 토벌한다는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까?

    “최악의 경우엔 놈들이 총단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있겠지. 그럼 우린 닭 쫓던 개가 되는 거야.”

    총의를 모으거나 무림맹에 건의해서 토벌대가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결국 빛 좋은 개살구로군.’

    애초에 흑접 토벌을 계획할 때도 아미파가 개입할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흑접에 원한이 있는 문파를 끌어들이는 것 역시 어디까지나 흑접이 도망칠 구석을 차단하기 위해서일 뿐, 흑접을 치는 데 써먹기 위함이 아니다.

    ‘그래도 아예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야.’

    아미파를 토벌에 끌어들이진 못해도 다른 곳으로는 얼마든지 써먹을 만했다.

    “흑접을 치는 게 중생구제에 어긋난다면, 사람을 살리는 일은 어떻습니까?”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건 흑접이 청부살인을 받고 한 여인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해어화라 불리는 여시주께서 변을 당할 뻔하셨다고요. 하나 그 일은 강 시주를 비롯한 낭인전의 시주들께서 해결하신 게 아닙니까?”

    “흑접은 박회(䗅蜋, 바퀴벌레)처럼 끈질깁니다. 표적이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지요. 그녀는 이미 두 차례나 죽을 위기를 넘겼습니다.”

    “아미타불.”

    중년의 비구니의 만면에 안타까운 감정이 어렸다.

    강엽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흑접을 치진 못해도 홍가려를 아미파로 데려갈 순 있지 않습니까?”

    아미파가 홍가려를 비호한다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안전할 것이다.

    어쨌든 이 모든 일의 시작이 홍가려인 이상, 그녀가 살아남아야 의뢰도 성공하는 것이다.

    난풍혜검은 그 부탁까진 거절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중생을 지키는 일이라면 마땅히 나서야 할 일이지요.”

    * * *

    강엽이 칠호를 데리고 떠난 뒤, 아미파의 여승들도 청송객잔을 나왔다.

    그녀들은 유흥가와는 반대 방향으로 갔다. 승려들에게 있어 온갖 쾌락과 탐욕이 모이는 유흥가는 마땅히 멀리해야 하는 장소였다.

    청송객잔 역시 객잔이지만, 그녀들은 중경 외곽의 한갓진 곳에 따로 숙소를 마련해두었다.

    난풍혜검은 소창후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것을 보고 실소를 삼켰다.

    “불만이 많은가 보구나.”

    “탕마멸사(蕩魔滅邪)는 복호승의 의무입니다.”

    “계속 말해보려무나.”

    “흑접은 사마외도입니다. 한데 어찌 사마외도의 종자들을 두고 본단 말입니까?”

    난풍혜검이 붉은 계인을 찍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 마음은 알겠지만, 어른들의 뜻이 그러하니 어찌하겠느냐. 그분들의 말씀도 틀리지 않거늘.”

    “사저께서 허락하시면 저 혼자서라도 흑접 토벌에 참가하겠습니다.”

    “네가 정녕...!”

    난풍혜검이 눈을 부라렸지만 소창후 역시 지지 않고 사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굳은 심지와 짙은 의혹이 가득한 눈빛.

    “귀영이란 자의 태도를 보면 본산의 힘 없이도 쳐들어갈 기세였습니다.”

    “그런 것 같더구나. 하나 흑접은 만만한 자들이 아니야. 그 시주가 실패할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성공하면요? 그리고 그자가 사마외도를 없애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는다면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그자가 마교의 비술을 보고 괜한 욕심을 갖진 않을지 우려됩니다.”

    사마외도는 역병과 같아서 그것을 접한 사람을 유혹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강철처럼 단단한 신념을 지닌 사람이라도 그 유혹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만, 염려가 지나친 게 아닌가 싶구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설령 그자가 이겨내더라도 다른 낭인들도 그럴지는 모르는 법입니다.”

    난풍혜검, 아니 혜정 사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가 이 아이를 변하게 했구나.’

    부처의 가르침을 목숨처럼 받들었던 사매는 강호를 겪으면서 조금씩 변했다.

    중생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 못지않게 사마외도를 미워했다.

    “제 걱정은 마세요. 무당의 청수 도장도 참가한다고 했으니 별 일은 없을 겁니다.”

    “사매가 복마전이나 다름없는 곳을 가겠다는데 어찌 걱정하지 않겠느냐?”

    소창후의 안색이 환해졌다. 혜정 사태가 저렇게 말했다는 것 자체가 반쯤은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나 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너 혼자 보내는 것도 걸리고... 장문인께 연통을 넣을 테니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감사합니다, 사저!”

    혜정 사태는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사매가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데려오지 않았겠지만, 지난 일을 되돌릴 순 없었다.

    ‘그리고 이 아이의 걱정도 일리가 있다.’

    강엽을 봤을 때부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워낙 기파를 철저히 감췄기에 파악하진 못했지만, 언뜻 받은 느낌으로는 백도 정파는 아니었다.

    또 다른 사마외도가 출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흑룡교의 비술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부디 기우이기를 바랄 수밖에....’

    * * *

    칠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 아미파 없이 괜찮겠어?”

    강엽이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흑접이 대비하거나 내빼기 전에 칠 생각이리라.

    하지만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닐까?

    “상관없다. 아미파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도 않았어.”

    아미파의 도움을 받는다면 좋겠지만, 그들이 없는 게 목적을 이루는 데는 나을 수도 있다.

    “장경이 낭인들을 모으는 대로 바로....”

    그때 강엽이 말을 멈추고 콧잔등을 구겼다.

    심상찮은 기색에 칠호가 의아해했다.

    “왜 그래?”

    “피 냄새가 난다.”

    “뭐?”

    “따라와.”

    강엽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좁은 골목으로 돌아갔다.

    얼결에 강엽을 따라간 칠호는, 좁은 길목을 삼십여 장이나 지나서 발견한 시체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건 뭐 개코도 아니고....’

    그녀도 오감이 뛰어난 편이지만 이렇게 먼 거리에서 풍기는 피냄새를 맡을 자신은 없었다.

    “신기하긴 한데 그냥 시체잖....”

    칠호가 말끝을 흐렸다.

    벽을 등진 채 주저앉은 시체의 앞엔 동색의 낭인패가 굴러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시체를 살펴본 칠호가 미간을 좁혔다.

    “이 사람, 아까 청송객잔에 있었는데?”

    “그걸 봤나?”

    “직업병이야. 어딜 가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거든. 특히 강호인들이 있는 데는 유심히 살펴.”

    그녀가 변장을 하고 살수짓을 하는 만큼 역으로 다른 강호인들도 그럴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네 말대로라면 이놈은 청송객잔을 나오던 중에 습격당했다는 건데.”

    “고문당한 흔적이 있어.”

    “금전을 노린 건 아니군.”

    “원한 관계도 아니야. 상처는 많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에 난 검상이야. 한 방에 찔렀어.”

    원한에 의한 고문이라면 이렇게 깔끔할 리가 없다. 최대한 고통을 주며 죽이거나, 죽인 뒤에도 시체를 훼손했을 터.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한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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